오행신수
"동해가 아닌 것 같은데?"
맛있는 물고기가 많아 배를 곯는 일은 없었지만, 식수 부족과 수면 부족으로 둘의 몰골은 거지가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꾀죄죄했다.
"방향이 조금 어긋났다고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중원에 도착하고도 남았다. 여긴 동해가 아니야."
화무룡과 사마귀는 힘이 탁 풀려 배에 그냥 드러누웠다. 출발할 때 가장 든든해 보이는 놈으로 골랐는데, 그간 풍파에 시달리며 언제 침몰할지 모를 난파선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반대쪽으로 가야 하나?"
"그러면 우릴 찾는 놈들이랑 다시 마주칠 텐데?"
"설마 지금도 우릴 찾을까?"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오던 길로 돌아가서 해도 따위를 찾아보자. 옷도 갈아입고 맛있는 음식도 좀 먹고."
둘은 오던 길을 되짚어 배를 훔친 섬으로 가기로 했다. 미지의 바다를 더 누비기엔 배의 파손이 심하고 몸도 마음도 지쳤다.
차라리 어느 정도 아는 길로 안전하게 운행하고, 섬에 도착해 지도도 찾고 새 배를 장만하는 게 탈출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둘의 계획은 천재지변에 가까운 방해를 받았다. 갑자기 바다가 흔들거리더니 작은 동산만 한 흰고래가 커다란 입으로 둘과 배를 함께 덥석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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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혼절에서 깬 사마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반갑다. 오행수의 주인이여."
사마귀는 눈을 힘겹게 뜨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거기엔 아주 청수한 인상의 푸른 도포를 입은 청년이 편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나 외관과 달리 나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오래 산 자라는 걸 사마귀는 한눈에 알아봤다.
"누구십니까?"
아직 피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에 사마귀는 욕을 자제했다.
"난 다보도인의 관문제자인 천안천수千眼千手라고 한다."
"저는 마교 소교주 사마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 있고 팔다리가 쇠사슬에 묶인 겁니까?"
"네겐 잘못이 없다. 그저 보물을 품은 게 유감이다."
필부무죄匹夫無罪 회벽기죄懷璧其罪.
필부는 죄가 없으나 옥을 품어 죄가 되었다. 지킬 힘이 없으면 보물을 품는 것도 죄가 된다는 우언이다.
"남색을 하시오?"
사마귀의 말에 천안천수가 껄껄 즐겁게 웃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오행수의 주인이라고."
"오행수라면 오살공?"
"그렇지. 그런데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죽으면 오행수도 죽는다. 우린 널 오래오래 살려둘 거다."
"내 친구는?"
천안천수는 사마귀에게 감탄했다. 현재 사마귀가 보여준 모습은 의젓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었다.
"저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절검문에 관해 질문할 게 많으니 네 오행수를 뽑아낸 다음은 네 친구 차례다."
대화하는 사이 정신을 완전히 차린 사마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처음엔 자신의 사지를 묶은 쇠사슬만 눈에 들어왔는데, 슬슬 주변에 놓인 수많은 기물과 괴이한 부호들이 보였다.
"진법인가?"
"마음 놓아라. 생명에 전혀 지장은 없으니."
그때 부끄러운 부위만 가린 건장한 사내들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두고 가거라."
네 사내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내려놓고 재빨리 떠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 사마귀는 진심으로 놀라 감탄을 뱉었다.
네 사내가 낑낑거리며 들고 온 무거운 상자를 천안천수가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제단에 올렸다.
"그거 뭔데?"
"오행의 기운을 품은 영물. 오행수의 새로운 집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다."
천수천안은 사마귀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지 아니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는지 모르지만, 사마귀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행수를 왜 옮기려고 하는데?"
"넌 오행의 기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어떻게 오행수의 주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네 안에 있는 오행수는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오행수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네 몸에서 꺼내 오행의 기운을 타고난 영물 안에 넣어서 그 힘을 뽑을 생각이다."
"그걸 뽑아 뭘 하는데?"
"세상을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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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구나."
사마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제단 위의 상자도 사라지고 천수천안도 없었다. 사마귀한테 말을 건 건 쇠로 만든 감롱監籠에 갇힌 화무룡이었다.
"팔자 좋구나."
움직이는 감옥으로도 불리는 감롱은 중죄를 저지른 죄인을 압송할 때 쓰이는 귀한 물건이다. 보통은 나무로 만드는데, 쇠로 만든 건 반역죄와 같은 가장 엄중한 죄를 범한 자를 압송할 때나 등장한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 하나 던져줄까?"
그러나 사마귀가 팔자 좋다고 한 건 감롱 때문이 아니었다. 감롱에 갇힌 화무룡 앞엔 무려 여덟 개나 되는 접시가 놓였고, 몇 개 접시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입맛이 없어."
시간이 얼마 흘렀는지 모르지만, 배가 고파야 정상이다. 그런데 사마귀는 전혀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기절했을 때 놈들이 네게 푸른 죽을 잔뜩 먹였다. 아마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은 나보다 네가 훨씬 더 배가 부를 거야."
"그래. 뭘 알아낸 게 있어?"
"내가 아는 데 네가 모르는 거라면, 놈들이 아주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
화무룡이 백변검을 손으로 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지 화무룡의 무기를 회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난 왜 이렇게 융숭하게 대접하는 거야?"
사마귀는 팔을 흔들어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신기하게도 분명히 쇠사슬로 보이는 데도 전혀 무겁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네가 나보다 잘생긴 거 같다. 그러니 저 남색 하는 놈들이 네게 환장하지."
"개소리 그만하고, 뭘 봤어?"
농으로 어느 정도 마음을 다스린 둘은 진지하게 대화했다.
"짐승을 가져다가 제단에 올린 다음 진법을 발동해 네 몸에서 오행수를 뽑으려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세 번 시도해서 모두 실패했다."
"놈들이 실패했는데 불행할 건 또 뭐야?"
"진법이 발동될 때마다 네가 울고불고 난리였어. 막 엄마도 부르고."
"제길. 내가 엄마 그리워하는 거 다 들켰네."
"그리고 이 감옥, 술사들이 만든 법보인 거 같아."
말을 마친 화무룡이 깨끗이 비운 접시를 창살 사이로 던졌다. 그런데 던진 접시가 다시 감롱 안에 떨어졌다.
"더 재밌는 것도 있어."
말을 마친 화무룡이 이번엔 팔을 창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화무룡의 손이 감롱 안에 나타났다.
"보기 흉하니까 빨리 팔을 빼."
괴이한 모습에 사마귀가 진저리를 쳤다. 화무룡은 바로 팔을 창살 사이에서 뽑았다. 팔과 동떨어져 있던 손이 다시 화무룡의 팔에 붙었다.
"밖에선 안으로 물건 넣을 수 있나?"
"그건 네가 해봐야지."
사마귀가 몸을 뒤척였다.
"미친 새끼. 그냥 침을 뱉어."
사마귀가 하체를 감옥 방향으로 향하자 화무룡이 욕을 뱉었다.
"난 아랫도리가 더 자신 있는데."
"지금 장난할 때야?"
화무룡의 항의에도 개의치 않고 아랫도리를 쑥 내밀던 사마귀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젖히며 침을 뱉었다.
사마귀가 뱉은 침은 정확히 창살을 통과해 감롱 안에 떨어졌다.
그곳은 하필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는, 화무룡이 아직 입조차 대지 않은 접시 안이었다.
"놈이 내 질문은 개소리 취급하는데 네가 질문하면 꼬박꼬박 대답하더라. 다음에 오면 오행수로 뭘 하려는지 자세히 캐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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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파괴할 거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오행수만 있으면 된다."
"오행수의 힘이 필요한 거구나."
이유는 모르지만, 천안천수는 사마귀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이 아주 친절하고 상세하진 않았다.
"너희가 마중구문이야?"
"그런 이름도 있지."
"세상은 왜 파괴하는데?"
"사람은 죽어야 환생한다. 낡은 집이 무너져야 새집을 짓는다. 낡은 세상을 파괴해야 새 세상이 온다."
"지금 세상에 불만이 많은가 보구나."
"인간도 아닌 것들이 인간을 위한답시고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걸 되돌려야 한다."
"인간도 아닌 것들이 누군데?"
"복희와 여와. 그만 잠들어라."
천안천수의 말과 함께 사마귀는 바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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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죽고 싶다."
기절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사마귀는 자신이 점점 피폐해지는 걸 느꼈다.
"거의 다 왔다."
"뭐가?"
"그간 질문으로 놈들이 뭘 하려는지 대충 알아냈다고."
"그게 뭔데?"
화무룡은 절검문 소속으로 마중구문에 관한 정보를 사마귀보다 훨씬 많이 안다. 그간 사마귀의 질문과 천안천수의 답변을 들으며 이번 사태의 윤곽을 대충 알아냈다.
"산해경은 산해경과 산해기경으로 나뉜다. 그중 산해기경은 요괴와 귀신의 문자로 쓰여서 알아보는 사람이 적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절검문주는 산해기경을 읽을 수 있다."
"힘드니까 본론만 얘기해."
"산해기경의 기록에 따르면 '세상이 어지러울 때 상서로운 짐승이 나타나는데, 세상의 근본이 되는 다섯 기운으로 만물을 다시 빚는다'고 해."
"세상이 어지러우면 오행의 기운을 품은 짐승이 나타나서 세상을 새롭게 바꾼다는 뜻인가?"
"그것까진 모르는데, 아무래도 놈들이 원하는 바가 그거인 거 같다."
"그런데 오살공은 마교가 시작할 때부터 있었는데."
"놈들이 구주에 진법을 설치한 이유가 뭘까? 세상을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려는 거지. 그런데 장안과 형주의 진법이 파괴되고 대도도 봉인진이 파괴되면서 놈들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았어. 진법이 발동한 시기도 놈들의 예상보다 빨랐고."
화무룡은 흥분하여 점점 말이 빨라졌다.
"실패했지만, 놈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어렵게 생각해낸 방법이 여섯 개밖에 남지 않은 명황성에서 어떻게든 오행의 힘을 품은 요괴를 찾아내는 거야. 우리 절검문이 온갖 방법을 다해 삼두랑을 제거하려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어. 오행과 가장 가까운 놈이거든."
사마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우리 사고뭉치 조카가 이번에 사고 제대로 쳤구나.'
놈들의 계획이 성공의 문턱까지 간 걸 추향이 도둑질했음을 모르는 화무룡은 신나서 침을 튀겼다.
"아마 놈들은 그 계획도 실패했거나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거야. 그래서 이미 있던 오행수를 찾은 거지."
"왜 처음부터 찾지 않았을까?"
"최선이 아닌 거야. 실패할 여지가 크겠지. 그런데 놈들은 현재 모종의 이유로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된 거야. 그러니 뒤늦게나마 널 잡아서 오행수를 뽑으려고 한 거야."
화무룡의 추측은 꽤 진실에 근접했다. 사마귀의 오행수는 확실히 최선이 아니고, 모종의 이유로 마중구문이 세상의 파괴를 서두르게 되었다.
"해결책은?"
사마귀는 간단한 질문으로 신나서 떠들던 화무룡의 입을 틀어막았다.
- 작가의말
천수천안. 자는 중이, 호는 흑염. 가난하게 태어나 크게 성공하여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평함. 그래서 흑염룡으로 부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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