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왕재림
정혈단이 여의주가 되기로 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단이 이미 망가졌기에 유일한 동아줄은 무룡인데, 무룡이 점점 강해지며 정혈단의 선택 여지를 없앴다.
정혈단이 실패하여 소멸하면 홀로 남은 무룡은 여의주한테 먹힌다. 여의주가 무룡을 가만히 두는 것은 정혈단이 무룡을 도울 것을 걱정해서지 무룡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정혈단이 성공하더라도 무룡에게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여의주가 되면 굳이 무룡에게 목을 맬 필요가 없다.
물론, 독룡담의 여의주를 잡아두려면 무룡이 살아야 하기에 당분간은 도울 것이다. 그러나 정혈단과 흑백구의 싸움이 끝나는 즉시 무룡은 죽은 목숨이다. 누가 이기든 더는 무룡을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원래 대치 상황에선 무룡이 얼마나 강해질지가 변수였는데, 정혈단이 변화를 선택하면서 무룡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었다.
'위기는 기회다.'
정혈단의 속셈을 무룡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무리 위기는 기회라고 마음을 다잡아도 전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그걸 받치는 실력이 있어야 하고 운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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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고요하게 흘렀다.
지상에선 마교가 수십 년에 걸쳐 제작한 귀한 벽력탄을 아낌없이 퍼부어 혈교를 감싼 진법을 파괴하며 천지개벽에 준하는 요란한 상황을 만들고 있지만, 지하 공동은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게 멈춘 듯했다.
- 날 도와라. 그러면 너도 산다.
흑백구가 말을 걸어왔다. 무룡은 대답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 날 도와 저 내단을 제압한 다음, 속박을 풀어라. 그러면 난 저 차마 이름조차 부르기 두려운 무시무시한 놈과 함께 천계로 간다. 그러면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저놈도 살고, 세상도 지킬 수 있다.
흑백구 입장에서 정혈단보다 무룡이 더 큰 걱정거리다. 흑백구는 현재 무룡의 암혈에 갇혀 있다. 제압당해 갇힌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자체로 갇힌 거긴 하지만, 흑백구가 무룡의 안에 있는 건 사실이다.
높은 확률은 아니지만, 무룡을 죽이고 속박을 벗어나는 과정에 흑백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문제는 무룡이 알아서 풀어주지 않으면 흑백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룡을 죽여야 한다.
승천에 관한 중대한 일이어서 흑백구는 최대한 안전한 길을 걸으려 했다.
- 그럴 바엔 나랑 손잡자.
정혈단의 속셈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급한 나머지 간과한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태생이 여의주인 흑백구조차 자하괴독과 완전히 결합하지 못했는데 정혈단이 여의주가 된다고 해서 과연 자하괴독과 결합해 승천할 수 있는지다.
- 저놈은 네 몸에 속박되었기에 널 죽이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네가 날 도와 저놈을 제거하면 난 네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나겠다.
정혈단은 이미 변화를 시작했기에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 반드시 여의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고, 여의주가 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불리하던 상황에서 주도권을 조금 확보한 정도밖에 안 된다.
승산을 일 푼이라도 높이기 위해 정혈단은 무룡에게 연합을 요청했다. 무룡이 흑백구와 손을 안 잡기만 해도 정혈단에겐 큰 도움이 되고, 무룡이 돕기라도 하면 승산이 삼 할 정도로 커진다.
흑백구는 셋 중에 힘이 가장 강하다. 무룡과 정혈단이 힘을 합치더라도 흑백구의 상대가 아니다. 힘이 강하기에 현재 협상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정혈단의 우위는 무룡의 몸에 속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무룡의 안에 있지만, 그건 무룡의 혼을 쫓아내고 백과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함이지 흑백구처럼 무룡에게 속박당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흑백주를 제거하고 자하괴독과 결합하기만 하면 무룡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날 수 있다.
현재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인 건 무룡이다. 흑백구를 돕는다고 해도 반드시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고, 정혈단을 도우면 흑백구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가장 조급해야 할 무룡이 제일 느긋했다.
'뭔가 더 있다.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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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혈단과 무룡에겐 다행이고 흑백구한텐 귀찮은 결과가 되었다. 정혈단이 여의주가 되는 데 성공했다.
품은 기운이 적고 질도 별로긴 하지만, 어쨌든 여의주는 여의주다.
그때부터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정혈단은 세상으로부터 온갖 기운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무룡을 도와 흑백구의 공격을 방어했다.
흑백구는 무룡을 공격하는 척하며 정혈단을 싸움에 끌어들였다. 정혈단이 싸움에 발을 깊이 담그는 순간 확 잡아두려는 목적이었다.
무룡은 칠신도록의 여섯 운기법으로 지속하여 기운을 모으는 동시에 두 여의주의 싸움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둘이 기운을 어떻게 다루는지 유심히 살피며 경탄도의 운기법을 더 완전하게 바꿔 미약하게나마 격차를 줄여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억을 헤집었다. 무룡이 알지만 떠올리지 못한 해결책이 뭔지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목숨을 부지할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있다.
흑백구도 선택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무룡을 해칠 마음이 없고, 정혈단도 무룡을 지키는 것보단 자기 안위를 더 챙기는 바람에 싸움엔 진전이 없었다.
언뜻 치열하고 격렬해 보이지만, 둘 다 몇 수씩 감추고 확실한 기회만 노리고 있기에 보이는 것과 달리 무룡은 아주 안전했다.
꽤 오래갈 것 같던 대치가 깨진 건 무룡 때문이었다.
"검룡출세劍龍出世!"
무룡은 벽력문의 전신뢰를 얻어 흑백구를 견제하고, 검룡을 흑백구의 짝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검룡의 격이 하도 낮아서 정혈단과 환생환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 자하괴독이 방해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려고 남궁세가의 피독주를 노렸다.
이 계획은 남궁세가 항주 본가를 멸문하는 과정에 깨졌다. 다행히 천방기사와 추향이 수를 내어 무룡을 구했으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여겼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정혈단을 얻을 기회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미적거린 탓에 위기에 처했지만, 이미 실패했던 계획을 떠올린 덕분에 머리가 환해졌다.
고래의 뿔로 만든 공간에서 나온 검룡이 무룡의 몸에 들어갔다. 무룡과 검룡은 인검합일人劍合一의 경지를 넘어 진정한 하나가 되었기에 검룡이 마구 헤집어도 무룡은 어떠한 해도 입지 않았다.
"먹어!"
- 먹어!
무룡과 흑백구가 동시에 검룡을 응원했다. 둘의 성원에 보답하기라도 하듯이, 검룡은 정혈단을 궁지에 몬 다음 커다란 입을 벌려 덥석 삼켜버렸다.
"전신뢰, 정定!"
무룡이 검룡을 풀어 정혈단을 삼키게 한 것은 그저 흑백구의 계획에 따르려고 벌인 일이 아니었다.
흑백구가 독룡담에 완전히 숨은 탓에 할 일이 없었던 전신뢰가 드디어 출전했다. 전신뢰의 기운에 포착된 흑백구는 여전히 암혈에 숨어 있음에도 그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공원파!"
검룡은 진정한 용이 아니고 정혈단 역시 진정한 여의주가 아니다. 예전이라면 둘 다 부족해도 승천해서 신성을 얻었을 것이나, 천라지망으로 천계와 하계가 완전히 격리된 현재 힘이 부족한 둘은 결합하고도 승천에 실패했다.
적어도 자하괴독 정도는 되어야 천라지망의 틈을 비집고 천계로 갈 능력이 있다.
다행히 검룡이 무룡에게 예속됐기에 승천에 실패해도 벌은 없었다. 그리고 여의주를 얻어 한결 강해진 검룡이 무룡의 의지에 따라 그간 모은 모든 기운을 담아 공원파를 펼쳤다.
공격 대상은 당연하게도 전신뢰의 농간으로 존재감이 드러난 흑백구다.
- 제길.
원래는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흑백구인데, 검룡의 출현으로 가장 먼저 소멸했다. 그리고 흑백구 다음으로 강세였던 정혈단은 검룡이 삼켜 자신의 일부로 전환했다.
"이대로 떠날 게 아니라면 독룡담에 돌아오는 게 어때?"
무룡이 자하괴독을 협박했다. 졸지에 여의주를 잃은 자하괴독은 무룡의 몸을 떠나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오히려 다음 기회를 노리기 위해선 무룡의 몸을 봉인 삼아 독룡담에 숨어야 한다.
- 이대로 돌아간다고 결과가 달라질까?
"약속한다. 내가 영생할 것도 아니니 널 확실하게 천계로 보낼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돕겠다."
무룡이 아주 그럴듯한 흑백구의 계획에 따르지 않은 건, 흑백구의 부족한 격 때문에 결국엔 승천에 실패할 걸 대비해서다.
무룡이 속박을 풀어준다고 흑백구와 자하괴독이 반드시 천계로 간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흑백구의 계획은 그저 모헙이었다.
- 한낱 인간의 약속이 얼마나 무거울까?
"이대로 끝나는 것보다 도울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자하괴독처럼 오랜 세월을 존재하고 감내하면 시간의 흐름은 큰 의미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희망이 커지느냐 사라지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그렇기에 자하괴독은 무룡의 제안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 날 어찌 감당하려고?
예전엔 여의주가 자하괴독을 가둔 덕분에 무룡에게 직접적으로 끼치는 해가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의주가 깨져서 무룡이 자하괴독을 직접 감당해야 한다.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면서 배운 게 많아."
무룡은 피독주와 전신뢰를 검룡에 합쳤다.
"독룡유를 돌려줘. 그래야 널 확실히 감당할 수 있다."
자하괴독은 두말 않고 독룡유를 무룡에게 넘겼다.
"검룡, 부탁한다."
피독주와 전신뢰까지 품은 검룡이 용의 모습을 한 자하괴독을 한입에 삼켰다. 무룡은 자하괴독을 삼킨 검룡을 급하게 몸으로 들여 독룡유로 독룡담에 이끌었다.
그러나 격의 차이가 너무 커서 자하괴독이 독룡담을 벗어나 무룡의 몸으로 퍼지려 했다.
"물이 많으면 그릇을 늘리면 되지."
무룡은 독룡유로 흘러나온 자하괴독을 독룡담으로 보냈다. 동시에 돌아온 마환기공에 자하신공 그리고 벽력공까지 동원해 미처 독룡유가 돌려보내지 못한 독을 체내에 순환했다.
순환하는 독으로 신체에 손상이 생긴 부분은 칠신도록의 여섯 운기법으로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거로 해결했다.
역근세수환골탈태비약을 먹어 몸을 죽이고 재생한 기억이 있는 덕분에 손상한 부위를 빠르게 재생하여 육신의 완전성을 잘 지켰다.
- 약속을 잊지 마라.
이 말을 끝으로 자하괴독은 독룡담에 웅크렸다. 품은 기운이 너무 커서 여전히 독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자하괴독이 의지를 갖고 공격하는 게 아니어서 무룡이 어찌어찌 감당할 정도는 되었다.
"물론이지.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니까."
칠신도록의 여섯 운기법으로 끌어온 세상의 기운과 독룡담에서 흘러나온 자하괴독이 무룡의 몸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공존할 수 없는 둘이 무룡의 몸을 매개체로 전투를 벌인 셈이다.
원래는 너 안 죽으면 나 죽는 전투여야 하는데, 무룡이 매개체가 된 덕분에 존재를 걸고 싸울 상황까지 가지 않았다.
"몸에 내공보다 독이 더 많이 흐르는구나."
무룡은 언젠가 덕구가 떠올렸던 독룡유의 경지에 의도치 않게 발을 디뎠다.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지만, 무룡은 명실상부한 독왕이 되고 말았다.
- 작가의말
흑백구 : 날 도우면 저 무시무시한 놈이 천계로 가서 네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데, 왜 내 말을 안 따른 것이냐!
무룡 : 그러면 소설이 끝나잖아. 그리고 저놈이 사라지면 나더러 독왕이 어떻게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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