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도록
'아쉽구나.'
무룡은 자하괴독을 천계로 보내기 위해 전신뢰를 몸으로 품었고, 결국엔 자하괴독과 함께 떠나보냈다.
그래서 전신도를 깨우친 지금 벼락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미친 듯이 달리는 부유도 위에서 세상의 온갖 기운을 가져다가 사용해 보았지만,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무룡이 깨우친 전신도는 전신뢰의 영향으로 벼락의 힘하고만 상성이 좋았다.
독을 잃어 강한 힘이 사라진 지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전신도록마저 무룡을 외면한 셈이다. 이제 남은 건 검밖에 없는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무룡의 격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자하괴독의 도움으로 급하게 그리고 억지로 끌어올린 격이기에 떨어지는 것도 무척이나 빨랐다.
격이 떨어지면 검의 위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무룡에겐 힘 한 톨도 아깝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환기공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자하괴독을 보내는 과정에 마환기공이 새로운 경지로 발돋움했다. 순양공을 비롯해 무룡이 익혔거나 아는 무공을 흡수해 새로운 무공이 되었는데, 어떤 강대한 적을 마주하더라도 무룡의 목숨을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다.
"뭐야!"
까마귀가 놀라서 날개를 퍼덕이며 외쳤다.
꽁지에 불붙은 소보다 더 빨리 달리던 부유도가 갑자기 정지했다. 쏠림이 전혀 없어서 주변 풍경이 멈춘 걸 확인하지 않았다면 미처 정지한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무룡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부유도에서 머리 세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각자 다른 소리를 길게 뽑았다.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으면 나름대로 어울리는 부름의 소리였다.
부유도의 부름에 응한 건 커다란 흰고래였다.
"설마, 전설의 곤인가?"
까마귀가 흥분한 나머지 날개를 쉬지 않고 파닥거렸다.
그러나 누구의 대답도 없는 와중에 부유도가 흰고래의 입으로 돌진했다. 미처 무룡과 까마귀가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세상이 변했다.
"죽인다!"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한 괴이한 생김새의 괴물들이 인간의 말을 외치며 무룡과 까마귀를 공격했다.
까마귀는 높이 날아 싸움을 피했다. 무룡은 검룡이 떠나면서 남긴 껍데기를 들고 자신을 덮치는 자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현녀문과 놈들이 싸운다."
높이 오른 까마귀는 먼 곳에서 싸우는 두 무리를 발견했고, 한쪽이 현녀문임을 알아봤다.
'내가 이렇게 강했었나?'
무룡은 까마귀의 말을 귀에만 담으며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죽인다!"
괴물들은 이성이 별로 없는지 죽인다는 말만 반복하며 생사를 도외시한 채 무룡에게 끊임없이 덮쳤다. 그러나 무룡의 검에 스치기라도 하면 바람을 과하게 넣은 개구리 배가 터지듯 팡팡 터져 죽었다.
무룡은 현재 여동빈이 가르친 공원파와 사마귀가 술자리에서 알려준 고산종의 수법을 섞었다. 그저 스치기만 해도 알아서 상대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기에 굳이 어디를 공격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상대를 적중하기만 하면 되니 검의 경로에 제한이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무룡이 익힌 벽파검이 연환검이어서 현재와 같은 싸움 방식에 정말 적합하다.
어항에 갇혀 살던 물고기가 드디어 바다로 돌아간 셈이다.
'칠신도록까지 합치면.'
갑자기 무룡 주변에 있던 괴물이 동시에 사라졌다. 검에 실은 외기를 호세도 그리고 허신도로 움직이는 외부 기운과 공명하자 터무니없는 위력이 나온 것이다.
외기도 실질적인 무룡의 기운이 아니고, 허신도와 호세도로 움직이는 기운 역시 무룡의 것이 아니다. 무룡은 아주 적은 내공만 소모하면서 강호 어디에서도 고수 소리를 들을 법한 괴물을 간단히 처리했다.
멀리서 짜낸 비명 같은 소리가 울리자 괴물들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대신 몸과 머리 그리고 팔다리까지 자라 등딱지 같은 걸 잔뜩 붙인 자들이 무룡을 향해 몰려왔다.
'나도 모르는 내 검술을 파악한 건가?'
무룡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해본 것이지 확신이 있어서 외기와 외부 기운을 공명한 건 아니다. 그리고 성공한 지금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괴물들은 무룡의 검술에서 바로 약점을 찾아내 적절한 대응을 했다.
외기와 외부 기운이 공명하여 생긴 힘은 새로 등장한 괴물들의 갑옷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무룡은 내기와 외기를 공명했다. 몸의 수많은 혈도를 단전처럼 쓸 수 있는 경지기에 손의 몇 개 혈도를 진동하여 내기와 외기의 공명을 이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까보다 기운 소모가 심하지만.'
갑옷 같은 딱지로 전신을 보호한 괴물들도 펑펑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갑옷을 넘어 힘을 안으로 전달하느라 내공 소모가 심해지긴 했지만, 아까보다 좀 더 쓴 거지 상대의 강함을 생각하면 전혀 과소비가 아니다.
또 비명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갑옷 괴물도 물러났다. 그리고 찰흙을 뭉친 것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무룡은 굳이 갑옷 괴물들을 상대하던 수법을 시험하지도 않았다. 아마 무룡이 터득한 두 가지 공격 방식 모두 괴물들에게 안 먹힐 게 뻔하다.
'몸이 무르니 진동으로 파괴하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무룡의 검이 수십 개가 되어 가까운 괴물들을 찔렀다. 허신도와 호세도는 그저 기운을 모아주는 용도로만 쓰고, 외기도 검의 찌르기를 빠르게 하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공원파를 약하게 펼쳐 괴물의 존재를 말살했다.
물렁물렁해서 검이 잘 박히는 바람에 공원파가 괴물의 존재를 유지하는 핵을 쉽게 파괴했다. 비록 아까처럼 한꺼번에 많은 괴물을 처단할 수 없지만, 한 번 찌르면 하나를 확실히 제거하여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그렇게 싸우는 사이, 부유도가 헤엄을 멈췄다. 무룡은 경공으로 몸을 훌쩍 날려 현녀문의 무리에 합류했다.
"어찌 된 일인가?"
자하괴독이 떠나서 처음 만났을 때의 위엄은 없지만, 현녀문 제자들은 무룡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비록 무룡의 격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 누구보다 높은 격이다. 게다가 칠신도록으로 주변의 넓은 범위의 기운을 움직이고 있기에 기세도 무척 강성했다.
"저들이 문주를 해쳤습니다. 죽었거나 죽기 직전 상황입니다."
호법 하나가 빛을 잃은 하얀 옥을 꺼내 무룡에게 보이며 말했다. 일정 기간 몸에 품고 다니면 주인의 상태에 따라 다른 빛깔을 띠는 옥인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거의 죽음에 가깝다.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면, 최선을 다해 돕지."
"어딘지 저희가 압니다. 가는 길 편하시게 우리가 길을 열겠습니다."
천계로 갈 길이 열려도 현녀문 문주를 빼면 누구도 승천할 수준이 안된다. 이들은 천계로 간 문주가 구천현녀한테 잘 얘기해서 자신들을 구제해 주길 바라야 하기에 문주의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수비적이던 현녀문이 바로 공격으로 태세를 바꿨다. 십수 명 혹은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진법을 펼쳐 괴물들을 상대하는 동시에, 무룡과 네 호법을 중심에 두고 천천히 이동했다.
"저기로 들어갔습니다."
옥 덕분에 호법은 문주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다. 그러나 채 반 리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하면서 현녀문 제자는 천 명 가까이 죽거나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약속은 꼭 지키겠다."
무룡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리 휘둘러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둔기로 때리는 듯한 공격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문이 단단하여 보이자 무룡은 공격 방식을 바꿔야 함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자마자 검이 움직였다.
'이건 또 어떻게 한 거지?'
깃털처럼 가볍게 휘두른 검에 문이 박살 났고, 안에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추향아!"
무룡은 자신이 방금 문을 부순 수법이 뭔지 고민하는 걸 팽개치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문주!"
현녀문 제자와 호법들도 쓰러진 문주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격이 부족해 문이 사라졌어도 감히 문턱을 넘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하. 늦었구나."
천수천안은 계획의 성공이 점점 가까워지자 본성을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을 조롱하며 기쁨을 느끼는 저열한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이쿠. 원래는 내가 도망 다녔어야 했는데, 그 강대한 힘을 그냥 보내버렸네?"
"세상을 위한 일이었다."
"그럼. 세상을 위한 일이었지.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넌 챙긴 거 없어? 참 아쉽네. 나였으면 수많은 깨달음은 물론 잘 협상해서 힘도 얻어냈을 텐데. 격만 높으면 뭐 해. 그 격을 받쳐줄 지혜와 힘이 없는데."
그때 현녀문 문주가 안간힘을 다해 외쳤다.
"검. 놈의 약점은 검입니다."
"왜? 차라리 내 약점은 한꺼번에 천 개의 목숨을 벨 정도로 강한 검이라고 하지 그랬어? 저 검도 대단하긴 하지만, 기껏해야 목숨 몇 개 벨 수준이야. 더구나 검을 잡은 사람이 격도 힘도 부족해서 그것마저 어려울 거야."
"저자를 죽이는 데 관심이 없다. 내 딸은 어떻게 구하지?"
"그건 내가 대답하지. 만약 네가 저 진법을 부수면 네 딸은 바로 죽어. 저건 네 딸이 안 죽게 보호하는 고마운 존재니까. 진법이 파괴되면 내가 하는 일은 실패하겠지.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성공하면 네 딸은 살아. 너도 살고. 넌 격이 높고 네 딸은 재능이 비범하니 어쩌면 혼돈을 견뎌 새 세상을 맞이할지도 모르겠어. 뭐, 그땐 너희가 우리처럼 이렇게 숨어서 살아야겠지만."
"그러면 저기서 하는 짓거리를 멈추면 되겠군."
무룡이 검을 들어 예두가 놓인 제단을 가리켰다.
천수천안은 갑자기 뭔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이미 제사는 시작됐고, 오행수한테서 첫 번째 기운을 뽑는 중이다. 오행오룡여 덕분에 그 과정이 아주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고, 통천교주 정도 존재가 아니라면 현재 진행하는 제사를 망칠 능력이 없다.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천수천안은 손을 저어 무룡에게 지네독을 쐈다.
"하하. 네가 그 이름도 부르기 두려운 흉독을 천계로 보낸 덕분에 내 독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독이 되었다. 최고의 독이 얼마나 강한지 잘 음미해 보아라."
자하괴독은 무룡을 진심으로 죽이려 한 적이 없다. 무룡은 독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극도로 절제한 것이었다.
무룡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대안이 무룡밖에 없음을 느낀 다음부터는 오히려 보호하려 했다.
그렇기에 무룡은 제대로 된 독의 공격을 사실상 받아보지 못했다.
- 제단은 완벽합니다. 대신 저기 용이 끄는 마차를 파괴하면 훼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현녀문 문주가 전력을 다해 전음을 보내왔다.
- 여긴 청평검의 기운이 있습니다. 그 검으로 기운을 흡수한 다음, 오행오룡여를 공격하십시오.
전음을 마친 문주가 피를 울컥 토했다. 얼마 없는 기운을 전음에 쓰느라고 탈진한 탓에 총기가 사라진 눈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추향은 무조건 산다고 하니 제사나 방해하자.'
무룡은 천수천안의 강한 독에 간신히 버티면서도 검에 청평검의 기운을 흡수하는 걸 잊지 않았다.
- 작가의말
온갖 악재가 겹친 지금, 과연 무룡은 어떻게 판을 뒤집을까.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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