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외수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식 제자들한테 불려간 무룡은 십수 명이나 되는 무공을 익힌 청년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기절했다.
"이놈은 볼수록 기분이 나빠. 그냥 죽여버릴까?"
"그럼 이후엔 누굴 때려? 네가 무지렁이 대신 맞을래?"
대제자가 윽박지르자 입을 열었던 놈이 목을 움츠리며 물러났다.
"몸 하나는 진짜 튼튼한 놈이야."
자신들의 매를 받아줄 소중한 존재인 무룡이 찬 바닥에서 자다가 입이 돌아갈까 봐 걱정된 청년들은 친절하게 창고의 짚더미까지 옮겨 눕혔다.
청년들이 떠나자 무룡은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틈틈이 시간을 짜내서 나름대로 구한 약초를 돌로 빻아 즙을 낸 다음 몸에 골고루 발랐다.
어림짐작으로 몽둥이와 주먹질에 천 대는 맞은 것 같다.
너무 맞아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약초를 바른 후 천천히 식어갔다. 처음엔 고열 때문에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지만, 이젠 약초 덕분에 수면 시간이 세 시진으로 늘었다.
그러나 몸의 열이 가라앉고 통증이 꽤 사라졌음에도 무룡은 바로 잠들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이지?'
내공을 익히면 공력을 단전에 모은다. 외공을 익히면 공력을 전신에 분산한다.
그러나 내공은 단전만 있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고 외공도 단전 없이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전이 깨진 무룡은 이론상 자하신공은 당연하고 외공인 마환기공도 익힐 수 없어야 한다. 그나마 대성한 벽파공이 운기가 되지만, 단전에서 흐름이 끊겨 순환을 이룰 수 없기에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데 매일 저녁 당하는 매질을 통해 무룡의 마환기공은 점점 경지가 깊어가고 있다.
처음엔 매질을 오기로 버텼는데 마환기공의 성취가 높아지는 걸 알고부턴 한 대라도 더 맞으려고 버텼다.
또 하나.
매를 맞으며 받은 타격의 일부가 내공이 되었다. 원래는 그 효과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한데, 두 가지 이유로 무룡에겐 특별히 작용했다.
하나는 무룡이 자하신공을 익힌 것이고 하나는 단전이 사라진 것이다.
마환기공을 익힌 무룡은 외부나 내부에 타격을 받으면 그 일부를 내공으로 전환한다. 그 내공은 자하신공의 운기법에 따라 이백사십이 개 혈도를 거친 후 단전으로 간다.
그동안 마환기공으로 전환한 내공은 자하신공으로 단련한 단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그래서 원래부터 미미한 효과가 무룡의 몸에선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되어버렸다.
그런데 단전이 사라지며 이백사십이 개 혈도를 거친 내공이 갈 데가 없다. 자연스럽게 마환기공의 방식에 따라 단전과 가까운 혈도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쌓였다.
마환기공만 익히고 단전이 깨졌다면 이런 효과가 있을 수 없다.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을 함께 익힌 무룡이기에 보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마환기공은 비록 타격을 내공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모은 내공을 사용할 방법이 없다.
외공은 몸이 타격을 받았을 때 각 혈도의 공력들이 알아서 움직여 방어한다. 그래서 수비적인 면에선 공력이 단전에서 출발하는 내공 수련자들보다 외공을 수련한 자들이 월등하다.
대신 단전에 저장한 공력처럼 쉽게 끌어다 쓸 수 없기에 공격적인 면에선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외공을 익힌 자들도 아주 높은 경지가 아니면 각 혈도의 공력들을 우선 단전으로 보낸 다음 끌어내 사용한다. 단전에 저장한 공력이 제어하기 편하고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면 무룡은 공력을 아무리 쌓아도 사용할 방법이 없다. 혈도들에 공력이 넘쳐도 단전이 없기에 끌어서 쓸 수 없고, 경지가 아주 높아져 혈도로부터 직접 끌어쓸 수 있다고 해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양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무룡은 단전이 없어도 내공이 쌓이고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부의 복수와 추영의 구출에 대한 희망을 부풀리며 열심히 기회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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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나는 겁쟁이다."
백만 명이 넘은 무사와 교도를 앞에 둔 마교 교주가 외쳤다.
"아닙니다!"
수십만 명이 부정했다.
"맞다. 난 겁쟁이다. 그간 성혈 가문의 희생 뒤에 숨어서 투쟁을 잊은 겁쟁이다."
"아닙니다!"
"내가 겁쟁이인 탓에 성혈 가문엔 불씨 하나만 남았다. 난 성혈 가문이 이대로 사라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래서 오늘 목숨 바쳐 싸우기로 했다."
"따르겠습니다!"
붉은 장포를 입고 검은 피풍의를 두른 마교 교주가 자신의 무기인 참마도를 높이 들고 외쳤다.
"나보다 앞장서는 놈은 벤다. 가자!"
"성녀를 위하여!"
해독단을 삼키고 피독주를 입에 문 마교 무사와 교도들이 시커먼 독 안개를 향해 돌진했다. 가장 앞엔 무공의 끝을 보고 인간의 한계에 닿았다는 평이 자자한 마교 교주가 섰다.
괴물은 몸집이 거대하고 짙은 독 안개로 몸을 숨겨 전모가 확인된 적이 없다. 그러나 교주를 비롯한 고수들은 본능적으로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독 안개를 헤치고 괴물의 대가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무사와 교도들도 무작정 달리다가 가로막는 것을 마구 공격했다. 채 괴물에 닿지 못하고 중독되어 피를 토하는 자도 있고, 커다란 공포에 삼켜져 이지를 잃은 같은 편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자도 있다.
싸움은 며칠 지속했다. 만 명이 넘은 무사와 수십만 명에 이르는 교도의 목숨을 뺏은 괴물이 결국 물러갔다.
"이번 싸움은 비긴 거다. 다음 싸움엔 반드시 이겨 내 의자를 괴물의 대가리 뼈로 바꾸겠다."
목숨을 부지한 무사와 교도들이 목청이 터지라 외쳤다. 마교는 수십만 명의 목숨을 대가로 내놓아 십여 년의 평화를 바꿨다.
슬프면서도 기쁜 일이다.
가류가 제자들을 이끌고 부상자를 해독하고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그간 어렵게 모은 약초들이 빠르게 동났다. 해독제와 외상약이 사라지자 침술로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채 한 시진도 못 쉬며 환자를 치료하면서 가류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근처에서 모시는 제자들이 그 서슬에 당해 하나둘 채찍질로 드러누웠다.
그중 대부분은 오래 못 버티고 숨을 거뒀다. 평소라면 잘 치료해서 목숨이라도 부지했겠지만, 괴물과 싸운 자들을 치료하느라 쓸 약초가 없다.
"사부께 아룁니다. 잡일을 하는 놈 중에 눈치가 빠르고 손이 정교한 자가 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부분 잃은 대제자가 꾀를 냈다.
"개소리 말고 어서 데려와."
대제자는 굽신거리며 사부의 거처를 떠난 다음 경공으로 달려 무룡을 찾아냈다.
"무지렁이. 네게 큰 기회가 왔다. 사부께서 널 제자로 들인다고 한다."
"대인의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무룡이 비굴하게 웃으며 굽신거렸다. 왠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자기 대신 사부의 매질을 받아줄 소중한 존재여서 꾹 참았다.
"입은 옷은 버리고 몸을 깨끗이 닦아라. 내가 곧 새 옷을 갖다주마."
무룡은 대제자의 지시대로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우물에 가서 시원하게 목욕했다. 평소에도 일찍 깨서 찬물로 씻는 게 일상이기에 남루한 행색에 비해 몸은 깨끗했다.
'진짜 몸이 튼튼한 놈이야.'
그간 그렇게 때리고 괴롭혔는데 명치에 난 커다란 흉터를 빼면 딱히 눈에 띄는 상처가 없었다. 자신들의 몽둥이와 주먹질로 낼 만한 흉터는 아니니 그간 밤마다 열심히 팼는데도 무룡의 몸에 멍 자국 하나 못 남긴 셈이다.
"사부는 따뜻하신 분이야. 그저 가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손속이 과하셔. 하지만 매질이 심하더라도 꾹 참고 버텨야 한다. 잘 버티면 내가 종종 술과 고기를 먹이고 여자도 품게 해주겠다."
단전이 사라진 무룡은 경공을 펼칠 수 없다. 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대제자를 따라 열심히 뛰어야 했다.
도착한 곳엔 북방의 유목민족이 사용하는 대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집이 가득했다. 그리고 미처 집도 차려지지 않아 그냥 땅에 드러누워 신음하는 사람도 기수부지였다.
대제자는 무룡을 데리고 가장 큰 집으로 갔다.
"사부께 아룁니다. 침술을 도울 자를 데려왔습니다."
가류가 자신을 쳐다보자 무룡은 바로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렸다.
가류는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고 몸에 혹이 여럿 달렸다. 몸이 자라면서 혹도 자랐고, 몸이 성장을 멈춘 후에도 혹은 계속 자랐다.
누구라도 가류와 같은 삶을 겪었다면 성질이 고울 수 없다.
가류는 무룡처럼 덩치가 크고 사지가 건장한 사람을 보면 화가 치민다. 그러나 질투와 증오가 느껴짐과 동시에 바닥에 바짝 엎드린 무룡을 보며 오는 커다란 쾌감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군."
무룡은 눈치 빠르게 몸을 일으킨 후 양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거로 가류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글은 아느냐?"
"쉬운 글자는 읽고 씁니다."
"혈도는 배웠고?"
"무공을 수련한 적 있어서 혈자리는 대부분 압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타인에 무관심하다. 가류는 다른 이유로 자기애가 지나쳐서 예전에 후문영의 부탁을 받고 단전을 치료하려 했던 무룡을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을 칼로 긁었고 그간 자주 굶어 체형도 달라졌지만, 가류 정도 고수라면 무룡을 알아보는 게 정상이다.
"그럼 내가 지시한 사항을 적어두고 그대로 해라."
가류는 부상자에게 침을 놓은 다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 혈도의 침을 뽑아야 하는지 무룡에게 설명했다.
처음엔 종이에 자세히 받아적던 무룡이 어느 순간부터 머리로 기억하고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해냈다. 실수가 전혀 없어 가류가 침을 다시 놓는 수고를 덜게 했다.
"내가 말한 순서와 깊이대로 침을 꽂아보아라."
가류는 부상이 얕거나 가망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무룡에게 맡겼다. 그 와중에도 가류가 치료한 환자의 침을 제때 뽑는 걸 잊지 않고 정확히 해내서 점점 신임이 두터워졌다.
무룡이 일을 잘한 덕분에 가류의 채찍질이 뜸해졌다. 다른 제자들도 무룡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겨 지나가다 만나면 먹을 것을 챙겨주며 친근하게 굴었다.
- 작가의말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수련에 무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역시 금수저 다이아몬드 수저 핵 수저 반물질 수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최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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