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기록
'경지가 또 올랐다.'
분명히 기뻐할 일인데 무룡의 이마 주름이 몹시 깊었다.
'이러다가 자하괴독과 함께 승천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자하괴독은 여의주에 담기기도 했고 직접 용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서 용도 하고 여의주도 할 수 없기에 승천은 못 했다.
'아니지. 내가 아닌 검룡을 노리는 거겠지.'
검룡은 무룡에게 예속됐다. 쉽게 말하자면 무룡은 검룡을 담은 그릇이다. 무룡의 그릇이 천방기사가 감탄할 정도로 크다곤 하지만, 용을 품을 정도는 아니다.
자하괴독이 승천하려면 현재 유일한 방법은 검룡의 격을 필요한 만큼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검룡의 격을 끌어올리려면 무룡의 그릇을 확장해야 하고, 무룡의 그릇을 확장하려면 우선 무룡의 격을 높여야 한다.
'외통수.'
그렇다고 무룡이 배짱을 부려 자하괴독이 몸을 해치게 방치할 수도 없다. 그러다간 아차 하는 순간 무룡이 죽고 자하괴독이 세상에 풀려난다.
솔직히 세상이 멸망한다는 건 실감이 안 나지만, 추영과 아이들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들이 자하괴독에 흔적도 못 남기고 사라지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두렵고 슬프다.
그러니 무룡은 자하괴독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그 과정에 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격이 어느 정도 오르면 그릇이 더 커지고, 그릇이 커지면 검룡의 격이 오른다.
'꼭 외통수는 아니다.'
무룡은 생각을 전환하기로 했다.
'자하괴독과 검룡이 승천한다면 내가 원래 생각했던 계획과 같다.'
돌고 돌아 결국엔 원래로 돌아왔다. 그러나 무룡에게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 과정에 내가 살려면 환생환이 꼭 필요한데.'
환생환은 무룡의 목숨만 지켜주는 게 아니다. 무룡이 못 버티고 죽어버리면 자하괴독도 승천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승천 과정에 무룡이 죽는다고 자하괴독의 승천이 반드시 실패하는 건 아니지만, 만전을 위해선 무룡의 숨이 붙어 있는 게 훨씬 낫다.
'그런다고 또 크게 달라지는 건 없고.'
무룡은 비천각의 밀실에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했고,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비밀기록을 확인했다. 만약 그 기록을 보지 않았다면 무룡은 마음 편하게 기린산의 비천각 밀실에서 수련에 전념하여 검룡과 자하괴독을 천계로 보내는 데 전념했을 것이다.
비밀기록에 따르면 마중구문도 세상의 멸망을 바란다. 물론, 자하괴독이 풀려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비천각은 마중구문이 세상의 인간을 모조리 죽이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려 한다고 분석했다.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건 당연히 인간이다. 지배종이 되면 의식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세상의 법칙은 이 흐름의 영향으로 일부는 강해지고 일부는 약해진다.
마중구문은 현재 흐름을 반기지 않는지 인간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인간이 죽고 다른 지배종이 나타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를 원한다.
수천 년 전부터 마중구문은 자연재해를 일으키거나 질병을 퍼뜨리는 방식으로 인간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어떤 궁핍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대를 이었고, 질병도 처음엔 무더기로 죽었으나 마지막엔 끝내 이겨냈다.
그래서 마중구문은 방식을 바꿔 전쟁을 일으켰다. 인간끼리 서로 싸워서 죽이게 하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그것도 결국 실패했다.
인간은 증오나 원한보다는 생존을 향한 본능이 훨씬 강해 어느 정도가 되면 아무리 충동질해도 전쟁을 멈췄다.
그 과정에 마중구문의 조종을 받던 왕들이 백성의 반란에 목이 잘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교훈을 섭취한 마중구문은 강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백성의 반란 따위에는 죽지 않는 강한 왕을 만들어 전쟁을 종식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문무백관을 포함한 지배층이 왕의 행보를 방해했다.
'그래서 만든 게 아홉 진법이겠지.'
이는 무룡의 추측이다. 비천각의 기록은 약 백 년 전부터 사라졌기에 근래에 발생한 구주대란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훨씬 전에 설치한 진법에 관해 빈약하나마 기록이 있었다.
'그 진법으로 뭔가를 이루려 했는데 형님이 방해했다.'
#
마중구문은 인간이 가장 많이 사는 아홉 곳의 지하에 진법을 만들었다.
원래 계획은 시기가 성숙할 때 진법을 발동해 안의 인간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봉인진으로 세상과 격리한 다음,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인간을 죽여버리면 진법 안의 세상엔 새로운 지배종이 나타난다.
물론, 진짜 세상과 달리 턱없이 작은 세상이어서 지배종의 의식은 강하지 않다.
그러나 오행의 힘을 품은 지배종이 나타나면 진법으로 그 의식을 증폭해 세상의 법칙을 비틀 수 있다.
마중구문의 그림자들 빼고는 아무도 모르던 구주에 펼친 진법의 용도다.
마중구문에겐 참으로 불행하게도 인구가 가장 많은 장안에 무룡과 천방기사가 있었다.
먼저 천방기사가 마중구문의 계획보다 일찍 진법을 발동했다. 확실한 결과를 위해 어마어마한 재화를 퍼부어야 하는 진법을 무려 아홉 개나 쳤는데, 당시 마중구문이 원하는 인구수를 만족하는 곳은 장안밖에 없었다.
즉, 아홉 개 진법 중에 유일하게 장안만 성공할 가능성이 있고 남은 여덟 개는 성공하더라도 마중구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하필 무룡이 장안의 진법을 파괴했다. 일말의 가능성마저 깡그리 지워버린 것이다.
게다가 절검문도 마중구문의 계획을 방해했다. 마중구문의 속셈을 알고 방해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재물로 온갖 강호의 불나방을 모아 여섯 개 명황성을 청소했다.
강대한 지배종이 나타날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는 동시에 삼두랑처럼 위험한 요괴를 미리 찾아내 싹을 잘랐다.
"거기까지 알아냈어?"
사마귀가 죽은 물고기 눈알처럼 생기라곤 전혀 없는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아니, 놈들이 서두르는 이유도 알아냈다."
문제는 대도에서 일어났다. 대도에 은거했던 술사들이 무인과 손잡고 진법을 찾아냈다. 그러나 무룡과 달리 진법의 핵을 찾지 못해 실수로 봉인진만 깼다.
봉인진이 깨지며 소환진은 더 큰 세상의 기운을 이용하게 됐고, 다른 여덟 곳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청동괴를 소환했다.
소환된 청동괴들은 처음에 인간을 적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소환진이 주입한 명령보다는 생존의 본능에 따르는 청동괴가 늘었다.
청동괴야 어차피 진법 안의 인간을 다 죽이고 사라질 운명이어서 어찌 되어도 그만이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마중구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대도의 의도치 않은 사고 때문에 청동괴가 세상에 풀려났고, 그로 인해 인간의 의식에 변화가 시작됐다.
이 변화가 끝나면 명황성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만든 지배종의 의식을 아무리 증폭해도 인간을 모조리 죽일 수 없다.
마중구문이 서두르는 이유다. 인간의 의식 흐름이 변화를 마치기 전에 지배종을 만들어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바뀐 세상의 법칙으로 인간의 몰살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버티면 우리 승리라는 뜻이잖아."
사마귀는 매번 기절하여 고통을 느끼지 못했으나, 사마귀의 몸은 고통의 기억을 새겼다. 그래서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적 없지만, 몸도 정신도 피폐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했다.
그래서 화무룡이 그간 사마귀의 질문으로 알아낸 것들을 정리해 틈틈이 들려주는 것이다.
"이게 실패하면 또 다른 수를 내겠지. 그래도 최소 천 년은 위험한 일이 없을 거야."
"머리 아프니까 됐고. 이번에 할 질문이나 알려줘."
화무룡은 그간 고민하여 정리한 질문을 사마귀에게 알려줬다. 사마귀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화무룡의 말을 그대로 따라 외웠다.
이제 천안천수가 오고 외운 질문을 그대로 던지면 사마귀의 역할은 끝이다. 답을 듣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건 화무룡의 몫이다.
#
"다 죽이자."
무룡은 다짐을 입으로 뱉는 것으로 결심을 단단히 굳혔다.
"마중구문과 관련한 자는 다 죽이자."
두 가지 조건만 만족하면 자하괴독은 승천에 반드시 성공한다.
첫 번째는 넉넉한 시간. 어쩌면 천 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룡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 사백 살까지는 무난하다.
그리고 지금 속도로 경지가 오르면 천 살은 물론 이천 살도 우습다.
두 번째는 무룡의 생존. 첫 번째 조건과 맞물리기도 하지만, 굳이 따로 분리한 건 자하괴독의 승천 과정에 무룡의 생존이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현녀문의 환생환을 얻으면 해결할 가능성이 크다. 천환서고에서 얻은 지식이기에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지만, 자하괴독과 관련한 일이어서 무룡도 섣불리 자신하지 못했다.
"당장 놈들이 내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 죽이자."
세 번이나 '다 죽이자'는 말을 뱉는 것으로 무룡은 확고한 결심을 내렸다. 어쩌면 마중구문을 위해 일하는 것도 모르는 무고한 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룡은 이번 기회에 마중구문의 싹을 아예 자르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을 내린 무룡은 비천각의 밀실을 벗어나 마교로 달렸다. 여전히 사람이나 동물과 가까이하는 건 안 되지만, 경지와 함께 자하괴독을 제어하는 능력이 올라 옷은 입어도 괜찮았다.
덕분에 사람 눈을 피하지 않아도 되어 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부군!"
추영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무룡의 품에 뛰어들었다. 비록 검극에게서 무룡이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마영의 죽음과 폐인이 된 사마월의 모습 때문에 매일 마음을 졸였다.
거기에 절검문을 걸쳐 태산파로 간다던 사마귀마저 감감무소식이어서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가던 차였다.
"미안하오."
그런데 무룡이 보법을 펼쳐 추영을 피했다. 설움이 북받친 추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독이 발작했소. 가까이 오면 부인 목숨이 위태하오."
연유를 알았지만, 추영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추영과 추향 모두 가족에 집착하는 건 비슷하지만, 추향은 항상 긍정적이고 추영은 늘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다.
오라비와 남편 그리고 두 자식이 밖으로 나갔는데, 자식만 정기적으로 소식을 보내고 남편도 오라비도 소식이 없었다.
그 과정에 마교와 독무곡 그리고 당백호의 수하들까지 다루느라 노심초사하며 쌓인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전에 없이 북받쳤다.
"내가 모자라서 부인이 고생 많았구려. 그런데 이젠 걱정하지 마시오. 마중구문이라는 배후를 알아냈고 주요 세력도 알아냈소. 그리고 괴독을 처리할 방법도 생겼소. 마중구문에 관련한 자들을 찾아서 모조리 죽인 다음 수련하여 독을 천계로 보내면 우리 가족은 걱정 없이 살아도 되오."
- 작가의말
최근 몇 편을 쓰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음모론을 좋아하는구나 느꼈습니다. 쓰면서 제가 신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