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천하
장안을 새까맣게 덮은 건 두꺼비를 닮은 푸른 금속 괴물로 크기는 제각각이나 모양은 거의 비슷했다.
일단 머리도 몸통도 두꺼비를 닮았으나 다리 모양이나 걷고 뛰는 모습은 개와 비슷하다. 꼬리는 자라의 것처럼 짧고 굵은데 뒤로 덮치는 상대를 향해 침을 쏘기도 하고 안개를 뿜기도 했다.
웬만한 공력이 실린 공격은 아예 안 먹혔고, 베고 찌르는 공격도 거의 허탕이었다. 대신 중병기로 힘만 적당히 실어 때리면 몸에 금이 가고 해서 너무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많다는 게 문제일 뿐.
오지열은 눈치 빠르게 추영 일행에 합류했다. 무슨 일인지 다들 모르는 상황인데, 추영 일행은 그나마 많이 아는 것 같았다.
'저 남자가 원래 마교에서 찾으려던 그 용혈인가?'
오지열은 자신한테 덤비는 두꺼비를 중검으로 부숴 쳐내면서 무룡에게 자꾸 눈길을 줬다.
'또 강해졌다. 지금은 내가 셋이어도 못 이기겠구나.'
용혈로 추정하는 거구의 사내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졌다. 처음엔 세 초식이면 제압할 자신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바라보기도 아득할 정도로 멀어졌다.
"아빠. 빨리. 이러다 진법에 완전히 갇히겠어."
추향의 외침을 들은 오지열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도 더 강해질 여지가 있다고?'
무룡 역시 조급한 마음이지만, 암혈의 기운을 다시 꺼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을 괴물과 싸우면서 하려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완전히 부숴. 밖으로 나가면 회복한다."
괴물들은 동궁에 들어오면 약해졌다. 그러나 동궁 밖으로 나가면 빠르게 회복하여 다시 전투에 투입됐다.
"정체 아는 사람?"
"청동괴靑銅傀다."
괴산이노가 나무와 바위로 만든 인형을 통제했듯이 현재 괴물들도 청동으로 만든 인형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만 알 뿐 이놈들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무룡과 추향은 천방기사가 역천진을 건드려서 생긴 일임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는 마찬가지로 오리무중이었다.
"아까 진법이라고 했습니까?"
꾸준히 강해지는 무룡 때문에 미처 주의하지 않았던 추향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장안 전체를 덮는 진법이 있다.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갇힐지도 모른다."
추향의 대답에 오지열은 이마가 찌푸려졌다.
'장안 전체를 덮는 진법이 있는데 누구도 몰랐다고? 만든 사람이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비밀에 부쳐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장안 전체를 덮는 진법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일 리 없다. 그걸 계획한 자가 있을 거고, 돈을 댄 자가 있을 거고, 그 진법을 만드는 데 투입된 자가 있을 거다.
이 자들이 모두 비밀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진법을 만드는 과정에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어쩌면 너무 오래돼서 잊힌 진법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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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기사는 허신도를 얻고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했다.
안 그래도 넘치는 재능 때문에 기고만장하다가 사고를 종종 친 위인인데 허신도로 강한 힘을 얻으니 좀이 쑤셨다.
그래서 무룡과 추향 몰래 기운을 움직여 역천진을 탐색했고, 전엔 발견하지 못했던 진법의 핵을 찾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방기사는 단 한 번도 사고를 치려고 했던 적이 없다. 매번 호기심에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큰 사고로 번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소환과 봉인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기능을 품은 진법을 알고 싶은 마음에 핵을 살피다가 실수로 살짝 건드렸을 뿐이다.
그리고 진법의 목적을 단번에 이해했다. 봉인은 장안성을 상대로 한 것이고, 소환은 장안성의 사람을 모두 죽일 괴물을 상대로 한 것이다.
즉, 진법은 장안성을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봉인하는 동시에 괴물을 불러 안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황급히 이 사실을 알려 무룡과 추향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알린 다음, 다시 핵을 살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아냈다.
중원은 흔히 구주로 나눈다.
기주, 연주, 예주, 청주, 서주, 양주, 형주, 량주, 옹주.
장안이 속하는 곳은 옹주고 낙양이 속하는 곳은 예주다. 그리고 남은 곳들도 각각 하나씩 주를 대표하는 고대부터 번성한 대도시가 있다.
그 대도시들 밑에 장안성의 역천진과 같은 진법이 있었고, 아홉 진법은 서로 연결되었다.
장안의 진법이 발동되었기에 남은 여덟 도시의 진법도 순차적으로 깨어날 것이고, 마찬가지로 도시가 봉인되고 괴물들이 소환되어 사람을 죽일 것이다.
'막아야 한다.'
천방기사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고를 쳤지만, 재산 피해는 어마어마해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 사고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지우게 생겼다.
당황한 천방기사는 역천진을 파괴하려 했다. 역천진이 파괴되면 장안성의 봉인이 풀리며 소환된 괴물이 천하로 흩어진다.
그러나 다른 여덟 지역의 진법이 발동하는 걸 막을 수 있기에 그나마 나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힘이 부족해. 날 도와."
그러나 붉은 부리의 까마귀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우리 둘 목숨을 얹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 그리고 넌 잘한 거야. 만약 이 진법이 더 늦게 발동됐으면 세상이 망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까마귀의 말은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수십 명까지는 어떻게 자기 탓이 아니라고 애써 넘어갈 수 있지만, 수백만은 그렇게 넘어갈 숫자가 아니다.
"네 지혜를 빌려줘."
"무룡. 우린 다 무룡에게 끌려온 인연이야.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무룡밖에 없어."
"또 아우가 희생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겠다. 이 사태의 열쇠가 무룡이라는 것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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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 형제. 내가 왔다."
벽력문 소문주가 유성추 한 쌍을 들고 나타났다. 호박과 비슷하게 생긴 유성추의 커다란 머리엔 벼락이 머리카락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어떻게 알고?"
"까마귀가 나타난 걸 보고 큰 사고가 나겠다 싶었지. 그런데 이렇게 큰 사고일 줄은 몰라서 나만 왔다."
무룡은 추영과 두 아이를 소개했다.
"벽력문 소문주 청람靑嵐이라고 합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군요. 자식도 이리 출중하니 참 뿌듯하시겠습니다."
청람의 유성추가 괴물을 가득 부순 덕분에 잠깐 짬이 났다. 일행은 물론 목숨을 부지하고 동궁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통성명했다.
"해결책은?"
"나도 모르지. 그런데 이거 장안뿐이 아닐 거야. 이런 진법이 천하에 아홉 개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이 진법은 파훼할 방법도 발동할 방법도 없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 짓이야?"
"응."
청람은 천방기사의 재능에 감탄했다. 벽력문이나 절검문도 진법의 존재를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진법인지를 몰랐고 파훼할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 놓고 있었는데, 천방기사는 진법을 발견해 발동까지 했다.
"차라리 잘 됐어. 이 진법은 시간이 오랠수록 강해지는 괴물이야. 사람이 꽤 죽겠지만, 그래도 나은 편이야."
"장안만 해도 백만 명 이상 사는데."
당백호의 말에 청람이 허허 웃었다.
"백만 명 죽기 싫어서 두고 보면 천만 명 죽는 거지. 독사에게 손가락 물리면 잽싸게 손목 잘라야지, 손 아깝다고 어물쩍대다간 목숨까지 잃어."
그때 괴물이 다시 몰려왔다.
"싫은데 억지로 등 떠밀린 것 같구나."
청람의 말마따나 덩치가 큰 놈들은 동궁에 발을 들이지 않고 작은놈들만 기어들어 왔다.
"시간 좀 벌어 줘."
벼락을 가득 품은 청람의 유성추는 괴물을 재기가 불능할 정도로 박살 냈다. 덕분에 무룡은 뒤에서 암혈의 기운을 뽑아내는 데 집중했다.
기운을 뽑는 데만 집중하니 훨씬 진도가 빨랐다. 괴물을 상대하던 무인들은 점점 강해지는 무룡의 기세에 몸을 떨어야 했다.
청람의 활약 덕분에 몰려온 괴물을 물리치고 쉴 틈이 생겼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룡과 청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오늘 여기서 죽는 건가?'
아는 게 많은 술사들이나 촉이 좋은 놈들은 사태 초반에 도망간 바람에 현재 동궁에 몰린 무인 중에 쓸 만한 자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오지열이 꽤 빨리 결단을 내렸지만, 장안성의 중심인 황궁에서 출발한 바람에 미처 진법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장안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부하들을 이끌고 괴물과 맞섰는데, 결과적으론 차라리 전력을 모두 보전해서 돌아오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
그렇게 괴물의 공격이 몇 번 더 있고 무룡이 기운의 수습을 완성했다. 기운을 다 뽑아 전신 혈도에 갈무리하니 일견 평범한 무인으로 느껴졌다.
'반박귀진은 아닌데.'
반박귀진은 아니지만, 오지열이 모르는 아주 높은 경지임은 틀림없었다.
"대협,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오지열의 물음에 모든 사람이 무룡을 주시했다. 추영이 그런 오지열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오지열은 질문 하나로 무룡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만든 것이다.
"황궁 비고에 가서 진법을 파훼해라."
대답은 무룡의 위에서 들려왔다. 붉은 부리의 까마귀를 본 무인들이 무기를 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같은 편이다. 까마귀가 나타나서 사고가 난 게 아니라 고맙게 사고가 나기 전이 미리 알려준 거다."
무룡의 말에 무인들이 무기를 거뒀다.
"여기서 황궁 비고까지 거리는 이백 장이다. 그리고 다들 눈치챘겠지만, 저 청동괴라는 괴물은 여기에서 힘을 다 못 쓴다. 무력에 자신 있으면 따라오고, 아니면 여기 남아서 사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무룡의 말에 무인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오지열은 몇 안 남은 청룡대 대원들에게 무룡을 따라간다고 수신호로 알렸다.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으로 나뉜 후, 바로 출발했다. 선봉은 당연히 청람이 섰고 무룡이 가장 마지막에 섰다.
오지열은 부하들을 데리고 청람을 도왔다.
"그냥 다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았습니까?"
시녀들의 엄중한 보호 덕분에 당백호는 검을 휘두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추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한 자들이 죽으면서 진열이 흩어지면 남은 사람도 위험하다. 그리고 목숨을 구한다는 명분이 있어도 타인의 의지를 무시해선 안 된다."
무룡 일행이 떠나고 동궁에 남은 자들은 연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끊이지 않는 비명에 당백호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면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추영은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기에 뭐라고 말해줄 것도 없고, 마침 강한 괴물이 나타나서 손발이 필요했다.
"약해 빠졌구나."
지나치며 동생에게 쓴소리를 던진 추향이 괴물을 향해 멸화장을 펼쳤다. 황소만큼 큰 두꺼비를 닮은 괴물이 허공에서 사지가 분해되며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인간으로 치면 단전 위치를 봉인한다는 생각으로 멸화장을 펼쳐. 그럼 괴물이 힘을 잃는다."
추향의 말에 당백호도 검을 넣고 장법을 펼쳤다. 쌍둥이의 활약에 큰 괴물들이 픽픽 쓰러지며 전진 속도가 빨라졌다.
- 작가의말
내일 1부 완결합니다. 2부는 일단 비축분을 쓰면서 서버가 안정되길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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