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여의
검극이나 교주와 손을 섞을 수 있는 고수는 강호에 여럿 있다. 그런데 왜 유독 둘만 무공이 하늘에 닿았다고 할까?
천룡갑을 입은 마교 대장로를 가볍게 지운 검극의 심검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히 싸우는 능력은 비슷한 자가 더 있을지 몰라도 이룬 경지는 독보적이다.
그런 검극의 심검에 대응하는 게 바로 마교 교주의 천멸장이다. 하늘조차 멸한다는 무공 명칭이 과장된 건 맞지만, 그런 이름이 붙을 이유나 자격은 분명히 있다.
교주의 천멸장에 당한 무룡은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 괴물의 뱃속에 끌려갔다. 거기에 북천검의 양의검 절초까지 가해졌다.
벽력문의 넷째 덕분에 빗맞으며 목숨은 부지했으나, 겨우 간당간당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천멸장이 독룡담에 품은 여의주를 부쉈다는 것이다.
여의주는 용의 짝으로 태어나 운명의 보호를 받는다. 여의주 자체는 단단한 물체가 아니지만, 강한 타격을 받을 상황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무룡의 몸에 자리를 잡는 바람에 그러한 보호가 약해졌다. 접촉한 인간의 격이 너무 떨어져서 여의주를 보호하는 힘이 대부분 사라졌다.
한없이 떨어진 여의주의 격, 인간의 무공으로선 끝에 닿은 천멸장의 격. 둘이 엇비슷하여 여의주는 속절없이 타격을 받아 금이 갔다.
얼기설기 생긴 금으로 자하괴독이 밖으로 새 나왔다. 여의주의 속박을 벗은 독은 독룡담에 만족하지 않고 무룡을 장악하려 했다.
그리고 심장 일곱 개를 잃은 괴물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수백 년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독단으로 자하괴독과 여의주의 잔재를 흡수하여 자신의 여의주를 만들려 했다.
모든 감각을 잃은 무룡은 괴물의 뱃속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끝내 독단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룡의 독과 자하괴독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원래대로라면 자하괴독의 압승이어야 하는데, 여의주와 별개가 되면서 격이 떨어진 탓에 양만큼은 압도적인 이룡의 독과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쳤다.
서로 상대를 제압하고 굴복하려는 두 독이 치열하게 다툴 때, 괴물도 무룡도 함께 죽어갔다. 큰 심장을 모두 잃은 괴물은 순환의 동력이 사라지며 육체가 서서히 괴사했고, 감각을 전부 잃은 채 두 절독의 싸움터가 된 무룡의 몸도 엉망이 되어갔다.
그때 무룡이 모래산에서 꺾은 검은 꽃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햇빛 한 줄기 안 드는 독 안개로 가득한 모래산에서 어렵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외롭게 싸워온 검은 꽃이 무룡의 편이 되어 두 독에 저항했다.
그리고 무룡의 몸도 서서히 감각을 회복했다. 두 독의 싸움에 휘말려 무룡의 몸을 헤집던 천멸장의 기운이 흩어지고 사라진 덕분이었다.
'이겨야 한다.'
무룡은 지각을 회복하자마자 상황 파악을 끝냈다. 지금 자신은 괴물의 몸속에 있고, 자신이 지면 괴물이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된다.
자하동의 여의주를 그대로 얻은 것보다는 약하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놈이 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냥 어마어마한 놈이 되어 천계로 사라지면 참 좋을 테지만, 어마어마한 개자식이 되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무룡이 감각을 회복함에 따라 마환기공이 다시 활발히 움직였다. 그리고 혈도에 꼭꼭 숨어있던 순양의 기운들도 순양공의 부름에 호응했다.
곧 벽파공까지 가세하여 안정적인 흐름을 만들고, 마환기공이 활약하며 독에 대한 저항력을 한껏 키웠다.
그에 독룡유의 흐름도 탄력을 받아 무룡의 몸을 마구 헤집는 독들을 독룡담으로 보냈다.
독룡담은 암혈로 저장할 수 있는 기운의 양이 단전보다 훨씬 크다. 이름 그대로 암혈이어서 기운을 꺼내 쓰는 게 느려 전투 상황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찾아내기도 어렵기에 대부분 무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암혈 중에서도 용량이 수위를 다투는 독룡담조차 자하괴독과 괴물의 독을 모두 품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야 독룡담은 여의주를 품고 독은 여의주가 품으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의주에 금이 가서 독이 지속하여 새는 상황이다.
'살 필요는 없다. 놈보다 늦게 죽으면 된다.'
무룡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양손을 뻗어 괴물의 독단을 만졌다. 심장이 모두 사라진 괴물은 강하게 뭉친 독단의 힘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독단이 사라지면 놈도 죽는다.
무룡은 양손을 괴물의 독단에 대고 독을 힘껏 빨아들였다. 다행히 가슴팍에 품은 검은 꽃이 도와줘서 막대한 양의 독이 몸에 흐르는 데도 죽지 않고 버텼다.
몸이 위험해짐에 따라 마환기공과 순양공 그리고 벽파공이 극한의 속도로 운기했다. 그에 따라 하얀빛이 무룡의 몸을 감싸 보호했다.
검극이나 교주로 바꿔도 숨 세 번 쉬기 전에 피를 토하며 즉사할 상황이다. 그러나 무룡은 여러 상황이 운 좋게 맞물리며 용케 버텨냈다.
그러나 독단에서 계속 독을 빨아들이고 독룡유에 인도되어 독룡담으로 갔던 독이 다시 나오면서 무룡의 몸에 흐르는 독이 점점 많아졌다.
정말 기적적으로 버텨주던 몸이 드디어 무너졌다.
가슴팍을 시작으로 몸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지자 무룡은 눈물을 흘렸다. 괴물보다 먼저 죽는다고 비관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괴물보다 오래 버틴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선 뭔가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그때 무룡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검은 꽃이 움직임을 보였다. 하얀빛이 조금씩 사라지는 무룡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괴물의 독을 빨아들였다.
이룡의 독을 흡수하며 꽃이 조금씩 시들었다. 꽃잎이 시들어감에 따라 열매가 생겼고, 주먹만큼 커진 열매는 몸을 부르르 떨어 배꼽 위치에 남은 꽃의 잔재를 털어버렸다.
그러더니 곧 탐스럽게 익어가다가 툭 터졌다.
터진 열매에서 수많은 씨앗이 나와 무룡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더니 줄기를 뻗었다.
그러곤 수없이 많은 검은 꽃을 피웠고, 서로 다투듯이 무룡의 몸에 가득한 독을 흡입했다. 이번엔 이룡의 독뿐이 아니라 여의주를 떠나며 격이 떨어진 자하괴독도 빨아들였다.
'고맙구나.'
이대로는 무룡도 죽는다. 그러나 검은 꽃의 도움으로 괴물보다는 오래 산다. 괴물보다 숨 한 번만 더 쉬면 되는 무룡이기에 이 상황이 아주 반가웠다.
그리고 무룡의 예상대로 괴물이 먼저 숨이 끊어졌다. 괴물이 죽자 남은 독단의 기운이 한꺼번에 무룡의 몸으로 넘어왔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무룡은 찰나의 극통을 영원처럼 느껴야 했다.
그리고 무수히 피웠던 검은 꽃이 하나가 되었다. 뿌리도 서로 엮여 굵어지고 줄기도 하나로 합쳐졌으며 꽃도 커다란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하나가 된 꽃이 뿌리를 길게 뻗어 암혈에 침투했다. 여전히 암혈에 남은 독과 여의주의 잔재를 뿌리로 흡수하여 꽃으로 보냈다.
꽃은 여의주의 잔재로 껍질을 만들고 독을 속에 채우며 새로운 여의주를 만들었다. 자하동의 여의주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여의주가 탄생했다.
그리고 무룡의 몸이 서서히 시들었다.
"아우, 죽으면 안 돼."
죽어가는 무룡에게 천방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얼굴은 보고 죽어야지."
무룡은 눈꺼풀에 힘을 줘서 어렵게 눈을 떴다. 자신은 어느새 괴물의 몸을 벗어났고 천방기사가 불을 소환해 검은 꽃과 싸우고 있었다.
'이대로 죽긴 아쉽구나.'
절실히 원하던 바를 이뤘기에 여한은 없다. 그러나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을 성취하니 욕심이 생겼다.
목숨을 부지해 추영과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단 하루라도 보내고 싶었다.
마음을 바꾼 무룡은 자신을 돕던 검은 꽃과 싸움을 시작했다. 자신을 거스름 없이 받아들이던 무룡의 몸이 저항을 시작하자 검은 꽃도 독을 풀어 무룡을 공격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간 무룡에게도 모습을 감췄던 자하구가 불시에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도 반응할 새가 없이 새로 생긴 여의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여의주 안에 들어간 자하구가 회전했다. 위로 아래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구체가 보일 수 있는 모든 회전을 동시에 보이며 새로 생긴 여의주의 기운을 흡수했다.
"아니, 저놈은."
천방기사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늘 멋진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는 천방기사로선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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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용의 운명을 타고난 거머리가 있었다. 그러나 놈은 다른 용을 죽이고 여의주를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며 천계로 가는 길이 막혔다.
놈은 결국 천벌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빼앗은 여의주는 독으로 더러워졌다.
그런데 인간으로 환생한 죽은 용이 여의주 없이 편법을 써서 천계로 가버렸다. 여의주는 순식간에 짝을 잃어버렸다.
천계와 하계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며 여의주는 새 짝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아 만나지 못했고, 여동빈이 수작을 부려 순양동에 여의주를 봉인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룡이라는 괴물이 생겨나 여의주의 짝이 되었는데 무룡과 엮이면서 괴물도 죽고 여의주도 사라졌다.
이대로는 모든 게 원만하게 끝난 셈이 되는데, 하나 놓친 게 있었다.
바로 용의 운명을 타고난 거머리의 짝이 되는 여의주였다. 거머리와 만나지 못해 여의주가 되지 못한 놈은 꾹 참고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다 인연의 끈이 작용하여 무룡의 손에 들어갔으나 자하동에서 자신의 짝을 빼앗은 여의주를 공격하려다가 힘의 차이로 허무하게 밀려났다.
무룡에게 여의주를 삼키게 하여 다음을 기약한 놈은 자신의 존재감을 감쪽같이 숨긴 채 새로운 기회만 노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여의주가 될 기회가 생겼고, 끝까지 인내하다가 목적을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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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날 도구로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어이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기물이다. 당연히 인간보다 훨씬 똑똑하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놈한테 달렸지."
천방기사가 새롭게 여의주가 된 자하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놈이 너와 맺은 인연을 이어가면 넌 대단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가 되고, 놈이 이대로 떠나면 강호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무인이 되고."
순양공, 마환기공, 몇 갑자에 이르는 막대한 내공.
비록 단전이 없어서 생사를 겨루는 대등한 대결에 불리하긴 하나 맹룡도와 호세도 덕분에 웬만한 고수는 쉽게 상대할 수 있다.
"그냥 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겪은 고난만 해도 웬만한 사람은 백번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다 겪기 힘들다. 무한한 가능성이 생긴다곤 하지만, 놈이 그냥 떠나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러나 세상은 무룡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여의주가 자리를 잡기엔 무룡의 독룡담만 한 거처가 없었다.
"제길."
천방기사가 낭패한 얼굴로 무룡의 입에 열 개가 넘은 약을 연신 넣어줬다.
"버텨. 어떻게든 버텨야 해."
자하괴독과 이룡의 독을 모두 품은 여의주가 무룡의 독룡담에 들어갔다. 갓 여의주가 된 자하구는 품은 기운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독룡담이 넘치는 독 기운을 밖으로 뱉어내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양의 독이 무룡의 몸을 돌아다녔다.
몇 갑자의 내공을 지나가는 강아지로 취급할 만한 막대한 양의 독 때문에 무룡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든 아우를 구하고 만다."
천방기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 작가의말
남편 뺏긴 복수를 수천 년 기다려서 한 의지의 자하구.
여의여의는 여의가 여의하다로 각각 명사와 동사입니다. 여의는 뜻을 이룬다는 의미로, 여의주가 뜻을 이루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의주는 자하구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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