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결계
마중구문의 본거지는 화무룡과 사마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방비가 허술했다.
천수천안의 도복을 입고 얼굴을 최대한 가린 채 느리게 움직이는 둘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아주 중요해 보이는 문서가 가득한 방에 들어가는 데도 둘을 막고 신분을 확인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중구문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들어오려면 우선 흰고래한테 삼켜져야 한다. 흰고래가 함부로 삼키는 일도 없고, 삼킨 사람이나 물건이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수십 번 확인을 거친다.
그렇기에 이미 안에 들어온 지금은 오히려 대비가 허술하다 못해 방비가 째진 그물만도 못하다.
"제길. 모르는 글자야."
문서를 몇 개 펼쳐서 확인했으나 아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화무룡의 말에 사마귀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 뭐 하니?"
"문서를 해독하는 중이다."
사마귀는 눈을 꼭 감은 채 문서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눈은 왜 감고 냄새는 왜 맡는 건데?"
"네가 아는 바로는 마중구문의 역사는 혈교 다음으로 유구하다. 맞아?"
"그렇지."
"현재 이 문서에 적힌 글자들은 우리가 모르는 글자다. 맞아?"
"빨리 결론이나 말해."
사마귀는 득의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냄새로 문서의 작성 순서를 정리하는 거지. 다음 넌 최근 문서부터, 난 오랜 문서부터 읽는 거야. 문자라는 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글자가 간단해질 가능성이 크다. 너는 역순으로 나는 차순으로 해서 이 문서들에 적힌 글자를 배우는 셈이지."
화무룡은 사마귀의 발상에 깜짝 놀랐다. 산더미는 아니더라도 작은 동산 정도로 쌓인 문서를 모두 확인해 미지의 문자를 익힌다는 생각은 화무룡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조카님이 가르친 속독술이 있는데, 너한테도 알려줄게."
추향이 가르친 속독술은 천환서고가 아니어도 효과가 있다. 오살공 때문에 수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외삼촌을 위해 추향이 고심해서 만든 재주다.
그러나 원체 무공서 빼고는 읽기 싫어하는 사마귀여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쓸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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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부 사실일까?"
사흘 정도 흘렀을 때 둘은 약 백 글자 정도를 익혔다. 문서의 내용을 해석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전혀 모르던 것에서 백 글자라도 알아본다는 건 크나큰 발전이다.
문서에 쓰인 글자는 총 육만 개가 넘는데, 일부 글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표기법이 달라지고 뜻은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 글자를 제외해도 만팔천 자는 되어서 갈 길이 멀었다.
그런데 백 글자를 토대로 문서를 읽다 보니 금세 이백 글자를 익혔고, 이백 글자가 하루 만에 오백 글자가 되었다.
고비는 팔백 글자였는데, 팔백 글자를 익혀 일부 문장의 내용을 확실히 해독하게 되면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다.
글자뿐이 아니라 문법도 현재와 너무 달라서 뜻을 해독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다행히 화무룡의 많지 않은 취미 중에 독서가 있다. 서역 상인이 많이 드나드는 장안 근처에서 자랐기에 서역 문자도 조금 접했고, 문장에서 단어 순서가 다를 수도 있음을 알았다.
덕분에 어렵게나마 문법을 파악했다. 문법 파악이 끝난 다음부터는 쉬웠다. 이게 사물의 이름을 말하는 건지 어떤 행동을 표현하는 건지 아니면 느낌을 묘사한 건지 판단할 수 있기에 글자의 뜻과 단어의 쓰임새를 더 정확히 유추했다.
그렇게 새로운 글자와 단어를 알아가고, 잘못 알았던 글자나 단어의 뜻을 교정하면서 문서를 빠르게 독파했다.
그 결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득 알게 되었다.
"일단 여기 것들이 다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이걸 갖고 밖으로 나가야지."
사마귀한텐 추향이 고래 등뼈로 만든 공간 주머니가 있다. 고래의 뿔로 만든 무룡의 것보다 훨씬 부족하지만, 무룡처럼 수많은 독과 약초를 들고 다니지 않기에 중요한 문서만 추려서 넣으면 자리가 넉넉했다.
"나가는 방법을 모르잖아."
문서 어디에도 이곳을 나가는 방법이 없었다. 대신 절망적인 정보만 가득했다.
둘이 있는 곳을 벗어나봤자 도착하는 곳은 명해다. 끝없는 바다로도 불리는 명해는 결계로 세상과 분리되었다. 명해를 벗어나는 방법은 결계를 통과하는 것밖에 없는데, 들어올 곳은 태산파의 구멍을 비롯해 꽤 많아도 나가는 길은 따로 없다.
결계를 통해 사람이나 물건을 내보낼 수 있는 건 천수천안을 비롯한 그림자들밖에 없다.
"생각을 전환하는 거야."
사마귀는 오살공이 떠나면서 무공만 강해진 게 아니라 머리도 훨씬 영활해졌다.
"결계를 통과하는 법을 모르잖아. 그러면 결계를 파괴하는 거야."
"파괴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결계를 파괴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문제가 생길 리 없지. 이 결계는 세상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여기 마중구문의 잡것들을 보호하는 거니까."
현재 지배종인 인간의 의식 흐름은 태고의 피가 흐르는 마중구문의 사람과 요괴 그리고 마수들한테 치명적이다.
원래대로라면 사라져야 할 이들이 여태껏 죽지 않은 건 결계로 세상과 분리한 것과 결계 밖으로 나갈 때 다른 존재인 것처럼 위장한 덕분이다.
"그럼 결계를 어떻게 찾고, 또 어떻게 파괴할 건데?"
"결계 찾는 거야 쉽지. 우리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면 돼."
결계는 공간과 공간을 분리하는 방식이다. 공간은 시간과 달리 연속성이 꼭 있지 않기에 결계가 꼭 명해의 바깥을 감싼 게 아니다.
무인인 둘로선 원래 결계를 찾을 방법이 없어야 맞는데, 사마귀가 머리를 썼다.
"밖에서 들어올 때 굳이 결계와 먼 곳에 보내진 않았을 거야. 법술이 신비롭긴 하지만, 허무맹랑한 건 아니니까."
둘은 시간을 더 끌지 않고 공간 주머니를 중요한 문서로 가득 채우고 마중구문의 본진을 탈출했다.
탈출은 아주 싱거웠다. 배가 가득한 선착장에서 좋아 보이는 배 하나 골라 노를 저어 떠나는데도 누구 하나 눈길 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독한 무관심 속에서 배를 타고 무작정 노를 저으니 어느새 명해에 나왔다.
둘이 잡힌 후 수색하던 배들이 철수한 바람에 방해꾼도 없었다. 둘은 하늘의 별을 보며 방향을 정해 노를 젓다가 익숙한 섬을 발견했고, 기억을 더듬어 배를 훔쳤던 섬을 찾아냈다.
그다음부터는 배에 숨어서 오느라 길이 익숙지 않지만,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를 알기에 최초에 도착한 섬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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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부푼 꿈을 안고 마교 정벌에 나섰던 군왕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유일하게 육신을 보유한 천수천안이 명해를 떠나 세상으로 나오면서 명령을 정확히 전달해 줄 사람이 사라진 탓이다. 비록 마중구문이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손에 쥔 밑천을 모조리 던질 이유는 없다.
'살길을 찾아야 한다.'
혼자 살려면 쉽다. 어디 인적이 없는 심산유곡을 찾아 여생을 보내면 된다. 그러나 군왕은 가문의 안위도 고민해야 한다.
"대장군, 소인이 돌아왔습니다."
"어서 오시게."
군왕은 기쁜 얼굴로 달려가 자신의 심복을 맞이했다. 처음 있는 환대에 심복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성과가 있었는가?"
"대장군의 위엄 덕분에 확실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과연 저 무리에 폐하가 계시는가?"
"그렇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폐하가 촉씨 가문의 여식과 혼인했다고 합니다."
군왕은 숨이 턱 막혔다.
제국이 가장 사정이 나쁠 때도 이백만 군세를 유지했던 걸 생각하면 촉씨 가문의 오만 정예는 별거 아닌 듯하다.
그러나 촉씨 가문이 차지한 땅의 넓이를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실력은 중원을 모두 삼키기에 부족하지만, 황제와 옥새라는 거대한 명분이 있기에 급한 건 군왕 쪽이다.
당백호는 젊기도 하니 이십 년 정도 촉의 땅에서 군사를 기르며 기회를 엿봐도 된다.
그리고 당백호를 촉의 땅에 가둔 채 중원을 통일해 새 제국을 세워도 문제다. 당백호의 핏줄이 이어지는 한, 새 제국이 약해지면 언제든 다시 왕조가 바뀔 수 있다.
'게다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단 말이지.'
마중구문에 문제가 생긴 건 맞지만, 군왕이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하진 않다. 그러나 예상도 못 한 큰 패배에 보급선이 끊긴 일까지 겹쳐 군왕은 판단력이 흐렸다.
"내 자네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생각이야. 이번 일에 성공하면 자네 가문과 혼연을 맺을 생각이네."
심복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군왕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군왕의 눈에서 진심을 엿본 탓이다.
"실패해도 방계의 여아 하나를 자네 가문에 보내겠네."
"목숨 걸고 분부를 이행하겠습니다."
군왕은 격동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신을 작성했다. 그러나 문장이 마음에 안 드는지 몇 번이나 고쳐서 쓴 다음, 품질이 좋은 종이에 정식으로 작성했다.
"편지를 읽게."
심복은 군왕의 눈치를 한 번 더 살핀 다음, 서신을 펴서 내용을 읽었다. 읽는 내내 얼굴 근육이 푸들거리고 눈동자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냥 전달하는 거면 굳이 자네가 필요치 않겠지. 이 서신을 황태후 마마한테 전달한 다음 확답을 받아오게. 최악의 경우엔 나와 자네 가문의 안위라도 보전하게."
군왕은 배신을 결심했다.
자신을 비롯한 구왕이 마중구문이 갖춘 힘의 대부분이라고 여겼기에 배신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구왕 중 절반 이상을 설득해 자기편에 세울 자신이 있다.
'명분. 명분 때문에 또 고개를 숙여야 하는구나.'
군왕이 갖춘 힘은 당백호가 갖춘 힘과 명분을 이길 정도가 아니다. 만약 당백호를 죽이고 마교까지 평정할 자신이 있다면 굳이 투항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군왕의 정성이 가득한 서신은 아주 빨리 효과를 봤다. 채 하루도 안 되어 추영이 친히 심복과 함께 와서 직접 담판에 임했다.
"유왕을 잡으면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유왕은 삼대에 이어 놈들을 섬겼기에 우리보다 아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놈들을 섬기는 자들에 관한 정보는 제가 유왕보다 훨씬 많이 압니다."
군왕은 자신의 쓸모를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좋다. 너는 보급 부대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여길 떠나라. 우리가 잡은 포로를 너한테 양도할 테니 수습해서 중원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소위 구왕이라는 자들을 소집해라."
"시간과 장소는 어떻게 전달할까요?"
"알아서 찾아가마."
군왕은 사지가 덜덜 떨리는 걸 억지로 참았다.
'배신하기 잘했다. 우린 태후의 손바닥 위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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