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기전양
음양강수는 황동을 비롯해 몇 가지만 빼고 다 녹인다. 그러나 자하동의 문은 물론이고 동굴 벽도 녹이지 못했다.
오독신충의 독으로 강화한 후엔 황동까지 녹일 정도로 강력하게 변했으나 여전히 자하동의 문엔 별 효과가 없었다.
당시 느꼈던 실망감이 무척이나 커서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 생생한 기억 덕분에 자하동 안에서 여의주의 행방을 고민하던 무룡의 뇌리에 문득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얼핏 봤던 문이 떠올랐다.
전에 강화한 음양강수로 살짝 녹였던 부분이 사라진 듯한 기억이 들어 황급히 밖으로 나가 확인했다.
과연, 자하동의 문은 음양강수로 녹였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돌로 된 문이 복원되었다. 마치 칼에 베인 자리에 생살이 자라나듯이. 흉터가 남아 상처였음을 알리는 인간의 살과 달리 어떤 흔적도 안 남기고.
'자하동이 여의주다.'
조양봉을 다 무너뜨려도 자하동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하동은 실제로 조양봉에 있는 동굴이 아니다. 그저 두 개의 문으로 세상과 교접한 다른 세상이다.
두 문은 이 세상에 속하지만, 자하동 안은 다른 세상이다. 이는 세상은 세상이고 여의는 여의라는 말에 부합한다.
그러나 피 냄새에 쥐와 같은 짐승들이 끌려오고 겨울이 가까워지면 뱀들이 찾아왔던 걸 생각하면 또 완전히 분리된 세상은 아니다.
무룡은 이 세상과 이어지는 통로 중 큰 것은 문을 만들어 막고 작은 건 그대로 뒀다고 추리했다. 조양봉에 있는 수많은 작은 굴 중에 자하동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한두 개 혹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있지만,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다. 독립된 세상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기도 했다.
자하동의 비밀은 자하동이 여의주라는 것이다.
"찾기는 찾았는데, 다음엔 뭘 해야지?"
찾은 답이 맞는다고 호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무룡은 확신했다. 자하동 자체가 여의주여야만 지금까지 겪은 모든 괴이한 일이 설명된다.
"이걸 무슨 방법으로?"
괴물을 화산까지 데리고 올 방법은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여의주를 찾아 괴물 앞에 갖다 놔야 한다.
그때 품에 있던 자하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 말이 맞으면 신호를 줘."
무룡은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지푸라기를 잡는 마음으로 자하구에게 말을 걸었다.
"밖에서 찾아야 한다."
자하구가 잠잠했다.
"안에 들어가야 한다."
자하구가 부르르 떨었다.
"좋아. 일단 안에 들어갈게."
무룡은 음식 주머니를 메고 자하동 문을 열었다. 반년이나 음식을 섭취하지 않았음에도 전혀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를 씹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여 육포와 기름에 바짝 구운 떡을 조금씩 뜯어 쉴 새 없이 입에 넣었다.
"공동에 간다."
자하구가 부르르 떨었다.
"좋아. 난 널 믿어. 난 널 믿을 거야."
무룡은 육포를 질근질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젠 손발 다루듯 익숙해진 맹룡도와 호세도로 경공을 펼치니 순식간에 공동에 도착했다.
"중심에 간다."
자하구가 부르르 떨었다.
"너도 뭔가 두렵고 흥분되는구나."
같은 떨림이지만, 전해지는 감정이 달랐다.
"좋아. 그래, 좋아. 이제 중심에 왔어. 뭘 물어볼까?"
자하신공을 운기하는 건 아까 이미 했다. 벽에 글자가 나온 걸 빼면 딱히 특이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자하신공을 운기할까?"
자하구가 잠잠했다.
"여기서 뭐 주문이라도 외워야 해? 천방기사처럼?"
천방기사는 겉멋이 대단한 사람이다. 대부분 법술은 손을 몇 번 휘젓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나 가끔 정말 어려운 건 주문을 외웠다.
무룡이 어디 말이냐고 물었을 때 천방기사는 귀신과 요괴들이 즐겨 쓰는 언어라고 대답했다.
그땐 여의주를 만드는 법을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안 배워둔 게 너무 아쉬웠다.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뭐지?"
너무 깊이 골몰했더니 숨이 가쁘고 속이 메스꺼웠다.
'돌아가서 천방기사한테 물을까? 아니면 추영?'
그런데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로는 답을 찾기 어려움을 아는데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답을 알고 있어?"
자하구가 부르르 떨었다.
"혹시 내가 답에 근접한 행동을 한 적 있어?"
자하구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무룡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을 정도로 세게 움직였다.
'내가 뭘 했지?'
무룡은 자하신공을 운용하여 벽에 나타난 글자들을 봤다. 열 개 운기를 동시에 하기도 하고 한두 개를 따로 운기하기도 하며 글자가 달라지나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
'난 멍청하다.'
무룡이 여의주를 못 찾는 자신에게 실망하여 자기비하에 빠진 건 아니다. 무룡은 자신이 잡았으나 미처 깨닫지 못한 단서가 뭔지 열심히 추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하신공 십 단계에 이르렀다.'
자신감을 북돋으려고 자신을 격려하는 것도 아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하동에 들어오고 생긴 일들을 되새기며 뭔가 특이한 부분이 없었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내가 십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기보단 십 단계에 이르러야 했던 거라고 여기는 게 맞겠구나.'
머리가 시원해졌다.
"난 십 단계에 성공하면 안 되는 거였어."
자하구가 부르르 떨었다. 커다란 기쁨과 작은 책망이 섞여 무룡에게 전해졌다.
"구 단계에서 자하신공이 하려던 일을 하면 여의주를 얻는다."
자하구가 무룡의 품에서 툭 떨어져 나와 바닥을 구르며 통통 뛰었다. 원래 주먹 크기였다가 구엽흑혈초를 잘못 먹었을 때 오독교의 늪지에서 찾은 다른 물건들을 먹어 치우고 절반 크기로 줄었었다.
그런데 주의 안 한 사이에 훨씬 작게 줄어들었고 새까만 가운데 별빛이 절로 떠오르는 푸른빛을 품었다.
"그런데 음기를 버리려고 하면 마환기공이 방해할 거야."
심법을 대성해도 기운을 돌리는 경로를 제멋대로 바꾸는 건 위험한 일이다. 심법을 익힌 건 사람이지만, 대성했다고 심법의 고유 성질까지 건드릴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이렇듯 무공을 대성해도 무공 자체의 한계는 그대로다. 검극처럼 무공의 한계를 깨버리는 천재는 드물다.
마환기공도 마찬가지다. 무룡이 아는 지식 범위에서 마환기공은 더 성장할 여지가 없다. 마환기공의 끝을 확실히 봤다고 장담할 정도다. 그리고 마환기공은 무룡을 보호하는 데 추호의 태만도 없이 열성적으로 임한다.
그렇다고 무룡이 음기를 버리려는 시도에 마환기공이 고분고분 따르는 것도 아니다. 마환기공 자체가 최대한 많은 기운을 몸에 품는 성질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 아무리 높은 경지로 익혔다고 해도 거스를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데."
자하구에서 안타까운 감정이 전해졌다.
"그 방법도 내가 아는 거고."
자하구에서 활기찬 느낌이 전해졌다.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야. 멍청한 나도 해낼 정도로 쉬운 일이야."
자하구가 통통 뛰며 무룡의 몸 주변을 맴돌았다.
"그게 뭐지?"
#
무룡은 바닥에 편하게 앉아 자하신공을 운기했다. 십 단계의 운기 말고 구 단계의 운기 행로에 따랐다.
만년 하수오를 먹으며 얻은 음기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양기로 변했다. 버리거나 소멸하려는 게 아니어서 마환기공도 반발하지 않았다.
'너무 느려.'
음기가 너무 많아 어느 세월에 전부 양기로 바뀔지 모른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양기가 많아지며 속도에 박차가 가해지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룡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팔 단계도 해볼까?'
무룡은 구 단계의 운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팔 단계의 운기를 추가했다.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의 싸움을 말리느라 벽파공을 전력으로 운기하다가 벽해청공의 경지에 들었다. 덕분에 같은 혈도로 두 갈래 운기가 동시에 진행되어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팔 단계의 운기는 구 단계보다 살짝 부족했으나 음기를 양기로 전환하는 데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운기가 안정적으로 변하자 무룡은 칠 단계 운기도 추가했다. 그렇게 일 단계 운기까지 다 추가하니 음기가 양기로 전환되는 속도가 세 배 이상 빨라졌다.
'이것도 느려.'
무룡은 십 단계 운기도 추가했다. 그러나 십 단계 운기는 양기만 선별하여 움직이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운기의 양기를 빼앗는 바람에 방해가 되기나 했다.
- 벽파공은 자하신공의 성취를 몇 배로 빠르게 해준다. 당장 자하신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벽파공을 먼저 대성하는 것이 진정한 지름길이다.
계곡에서 무룡의 등을 밀어주며 노혼이 했던 말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말인데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역시 난 멍청해.'
무룡은 십 단계의 운기를 멈춘 대신 벽파공을 운용했다. 고급심법에 끼지도 못하는 벽파공의 운기는 거칠고 투박했다.
그러나 벽파공의 거센 흐름 덕분에 자하신공의 운기가 몇 배나 빨라지며 음기가 양기로 전환하는 속도 역시 몇 배 증가했다.
'이대로면 반년 걸린다. 그러나 양기의 양이 증가할수록 속도가 빨라질 것이기에 길어야 석 달이다.'
자하신공과 벽파공의 조합은 무룡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채 두 달이 차기도 전에 무룡은 몸의 모든 음기는 물론이고, 독에 저항하며 얻은 온갖 잡스러운 기운도 모두 양기로 전환했다.
양기가 아홉이고 음기가 하나던 자하신공이 아닌 열 모두 양기인 극양의 자하신공이 되었다. 그에 따라 무룡의 몸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환골탈태역근세수비약을 먹을 당시 무룡의 몸은 비약의 기운에 저항했다. 비약에는 독과 약의 성질이 함께 깃들었는데, 당시 경지가 부족했던 마환기공은 무조건 배척하고 제압하려 들었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긴 했으나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비약의 효과를 훨씬 많이 받았을 것이다.
자하신공이 십 성에 이르고 양기만 남은 덕분에 그때 채 이루지 못했던 일부 변화가 뒤늦게 찾아왔다.
음기를 배제한 탓에 완벽하진 않지만, 무룡의 몸이 훨씬 튼튼해졌고 혈도들도 더 강해졌다.
몇 갑자나 되는 순수한 양기를 품으며 무룡은 강호에서 열 손가락은 몰라도 백 손가락에는 넉넉히 들 정도의 고수가 되었다.
물론, 벽파검법만 익혔고 그마저도 이해만 뛰어나고 초식은 조금 어설프다. 그러나 극성에 달한 마환기공과 십 단계에 이른 자하신공, 단전을 통한 운기보다는 투박하나 꽤 쓸 만한 맹룡도 덕분에 웬만한 고수 상대로 질 염려는 없다.
그리고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이 결합한 덕분에 변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해진 혈도 덕분에 자하신공의 운기가 더 빠르고 부드러워졌다. 벽파공 때문에 거칠어진 흐름이 부드러워짐에 따라 마환기공도 화합하여 운기 경로 주변의 혈도들에 안정적으로 기운을 공급했다.
운기 경로에 포함되지 않은 혈도들이 기운이 세차게 흐르는 혈도들로부터 기운을 받고, 그 기운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면서 자하신공의 운기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렇게 자하신공의 운기에 포함된 혈도가 점점 많아지더니 끝내 무룡의 몸이 하얀빛에 휩싸였다.
빛이 강해짐에 따라 무룡의 머리 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맑고 투명한 구체가 하나 나타났다.
자하구가 힘차게 뛰어 구체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뭔가에 막힌 것처럼 멈췄다.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이 여과 없이 무룡에게 전해졌으나, 무룡은 자하구의 기분을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내민 무룡의 손에 말랑말랑한 뭔가가 잡혔다.
'이제 어떻게 해야지?'
여의주를 손에 잡은 무룡은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토록 갈망하던 여의주를 손에 잡았지만, 무슨 수단으로 자하동 밖으로 갖고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 정성이 갸륵하구나.
갑자기 손에 잡힌 여의주가 딴딴해지더니 강한 흡력을 발휘하여 자하동에 가득한 자하괴독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비록 손에 잡힌 감촉이 확실했으나 이 세상 물건 같지가 않던 여의주가 점점 생동하고 선명하게 변했다.
무룡은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오매불망 그리던 여의주가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 작가의말
무룡아, 넌 독왕이 되어야 한단다. 그러니 자꾸 무공이 강해지면 안 돼.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