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비검
화산 옥녀봉의 연무장에선 대결이 한창이었다.
날 길이 삼 척 사 푼. 누가 봐도 보검으로 보이는 서슬 푸른 검이 뙤약볕에 늘어진 버들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그러나 검을 상대하는 소년은 물이 바짝 오른 가을 독사의 대가리를 상대하듯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저러다 땅에 떨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힘없는 움직임을 보이던 검이 갑자기 빛살처럼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선이 굵고 체격이 건장한 소년이 양손으로 잡은 검을 힘껏 휘둘렀다.
날 길이 오 척. 꽤 잘 만들었으나 빛깔이 거무칙칙한 것이 보검으로 보이진 않는다. 강하고 단순하게 휘둘러진 장검이 푸른 빛깔을 고르게 두른 보검을 때렸다.
찌르던 검이 어느새 회수되고 장검은 허공을 갈랐다.
[뭘 망설이는 것이냐?]
선이 굵은 소년의 귀에 전음이 울렸다.
소년의 사부는 화산제일검으로 불리는 벽파검碧波劍 노혼魯混이다. 벽파검법은 변화와 속도 그리고 공수의 균형을 중시하는 화산파의 검법과 궤를 달리하는 공격 일변도의 연환검법이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상대를 덮친다고 하여 벽파검법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노혼의 유일한 제자인 소년은 수비로 일관하고 있다.
낫으로 땅을 파고 호미로 꼴을 베는 셈이다.
사부의 꾸중을 들은 소년은 두 걸음 물러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노혼이 유일하게 제자로 들인 소년의 이름은 무룡霧龍. 보검을 들고 무룡과 대결하는 소년은 화산파 장문인의 외동아들 화무룡華武龍이다.
'아직 초식 수발이 자유롭지 못한데.'
무룡은 아직 익숙지 않은 초식으로 화무룡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다. 근골이 잘 잡히고 내공 성취가 높으며 인품도 뛰어난 화무룡은 약관에 이르기 한참 전인데도 차기 장문인으로 손색이 없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려 육신이 품은 힘 차이를 내공으로 만회하지 못한다. 무룡이 제대로 공격하면 화무룡이 내공을 바닥까지 끌어다 써도 밀릴 것이다.
'나랑 동갑인데 어떻게 저렇게 자랐지?'
화무룡 역시 무룡에게 경외심을 품었다. 체구가 거대한 상대는 내공 성취가 형편없어서 육신의 힘으로만 싸우고 있다. 그런데도 내공을 이용한 공격에 빠르게 반응하고 힘으로 맞서 화무룡을 물러나게 했다.
[언제까지 내 얼굴에 먹칠할 셈이냐!]
화무룡의 귀에 전음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아버지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을 거란 걸 알 수 있다.
화산파 장문인 화진악華震岳은 자하신공을 익혔다. 검을 휘두를 때 붉은 놀이 몸 주변을 감싼다고 강호에서 적하검赤霞劍으로 불린다.
그러나 평생 노혼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야 했다. 대부분 강호인은 화산 하면 적하검보다 벽파검을 먼저 입에 올린다.
아버지의 재촉에 화무룡은 내공을 거두고 옥녀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기수식은 실전에 전혀 쓸모없는 자세다. 기습이 허용되지 않는 대결에선 상대에게 자신이 어떤 검법을 쓸지를 미리 알려줘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게 기수식이다.
그에 맞서 무룡도 벽파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어차피 익힌 검법이라곤 벽파검법밖에 없기에 굳이 기수식을 취하지 않아도 되지만, 화무룡에게 제대로 할 거라는 신호를 전하려는 의도였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채 마주 선 무룡과 화무룡이 검에 기세를 실어 상대를 압박했다. 실력도 경험도 부족하여 기세를 다루는 솜씨가 서투르지만, 겨우 열넷의 나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왜 화무룡이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고, 고고하기 짝이 없는 노혼이 무룡을 제자로 들였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합!"
기세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한 무룡이 장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공격이 길어질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검에 더 큰 힘이 실리는 벽파검법의 특성을 아는 화무룡은 물러나지 않고 검 끝으로 장검을 살짝살짝 건드렸다.
옥녀검은 심산장교옥深山藏巧玉을 화두로 삼은 검법이다. 언뜻 대충 펼친 것 같은 초식에 정교한 계산을 심어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이다.
내공이나 초식 숙련보다는 검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화무룡이 굳이 옥녀검을 꺼내든 건 자신의 성취를 알려 아버지를 흡족게 하려는 목적이다.
과연, 화무룡이 옥녀검을 높은 수준으로 펼치자 화진악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노혼은 평소와 똑같은 냉담한 얼굴로 대결을 지켜봤다. 제자 무룡은 근골도 훌륭하고 수련도 열심히 하는데 마음이 너무 여리다.
지금도 힘을 삼 할 정도 빼고 느린 공격을 펼치고 있다. 전력을 다해 쉴 틈 없이 몰아쳐야 하는데 무룡은 연환검을 쪼개서 하나씩 펼치는 중이다.
'저것도 용한 재주긴 한데.'
연환검을 쪼개서 펼치는 건 검법을 웬만한 수준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재주다.
"제가 잠깐 짬을 내 가르친 옥녀검이 경지에 이르렀군요."
화무룡의 어머니 옥녀검玉女劍 초민향楚玟珦이 짐짓 소리 내어 말했다. 노혼 상대로 자격지심을 느끼는 화진악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의도도 있고, 화무룡을 칭찬하는 거로 대결 상대인 무룡을 자극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과연, 초민향의 말이 끝나고 무룡의 검이 한층 빨라졌다.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건 저 여자를 따를 수 없구나.'
무룡이 자존심이 무척 강한 성격이라는 건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노혼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무룡과 일 년에 열 번도 마주치기 힘든 초민향이 무룡의 성향을 파악하고 말로 자극했다.
어머니의 칭찬을 듣고 기쁜 마음이 들었던 화무룡은 갑자기 빨라진 무룡의 검에 화들짝 놀랐다.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무룡의 벽파검법은 속도와 힘의 균형 그리고 연속성이 뛰어났다. 화무룡처럼 잡다한 검법을 익히지 않은 이유도 있고, 무룡의 거대한 체구와 강한 힘이 벽파검법과 상성이 좋은 것도 있다.
'내공이 잘 안 쌓이는 체질이어서 다행이다.'
무룡의 검법에 노혼의 그림자가 짙은 걸 확인한 화진악이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체 조건이 노혼보다 나은 무룡이 내공까지 잘 쌓였으면 아들 화무룡 역시 평생 무룡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노혼이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초민향의 말에 자극받은 무룡은 현재 일심의 상태에 진입했다.
아까 화무룡을 다치게 할까 봐 머뭇거리던 무룡이 아니다. 지금은 오직 눈앞의 상대를 이기고 죽이려는 무룡밖에 없다.
흡족한 미소를 짓던 화진악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갔다. 화무룡이 옥녀검으로 벽파검범을 잘 수비하고 있지만, 힘의 차이 때문에 점차 밀리는 양상이다.
"노도박안怒濤撲岸!"
공격하다 흥이 난 무룡이 크게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옥녀검을 펼치던 화무룡이 깜짝 놀라며 멈칫했다.
무룡이 공격을 제대로 펼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심령이 조금씩 제압당한 탓에 초식 이름을 높이 외치자 몸이 살짝 굳은 것이다.
장검이 벼랑을 강하게 두드리는 거센 파도가 되어 화무룡을 덮쳤다. 동등한 경지의 무인은 노도박안의 초식을 흘리거나 피해야 한다. 검에 실리는 힘을 최대화하는 초식이기에 동등한 경지라는 전제하에 이 초식을 막을 사람은 없다.
화무룡은 다양한 검법을 익히고 검에 대한 이해도 무룡보다 높으나 힘과 내공을 합쳐도 무룡의 힘에 안 된다. 그러니 무조건 피하거나 흘려야 하는데 몸이 살짝 굳으며 기회를 놓쳤다.
챙, 챙챙.
어느새 경공으로 둘 사이에 끼어든 초민향이 무룡의 검을 막았다. 검이 막히자 정신을 차린 무룡은 갑자기 바뀐 대결 상대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쳤다.
"이거 이거, 큰일이네."
화산파는 다섯 가문이 지탱한다. 이미 오랜 기간 화씨 가문이 장문인 자리를 독점했지만, 남은 네 가문의 힘도 무시할 바가 아니다.
"규칙대로 하면 무룡이 화산비검 우승자가 되는 건데."
왕씨 가문의 가주 왕유재가 손가락으로 수염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 네 가문의 힘을 합치면 화씨 가문보다 강하지만, 장문인 화진악을 따르는 제자가 많아 전체적으론 네 가문이 열세다.
"소매小妹는 왕 사형과 생각이 다릅니다."
초민향은 자신을 여동생으로 칭하고 왕유재를 사형으로 부름으로써 화무룡의 어머니나 장문인의 부인이 아닌 화산 제자로서 발언함을 암시했다.
"화산비검에선 살초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노도박안은 엄밀히 말하면 살초입니다. 그리고 무룡 사질이 노도박안의 초식을 중간에 회수할 능력이 없다고 감히 장담하죠."
"노 사제의 생각이 궁금하군."
나이는 노혼이 몇 살 많지만, 다섯 가문의 자식은 어린 나이에 제자가 되기에 왕유재가 사형이다.
"틀린 말은 아니오."
노혼의 대답에 네 가문의 가주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노혼이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해 화진악과 맞서기를 바랐는데, 노혼은 고지식한 성격으로 거짓말을 못 했다.
"그럼 당사자한테 물어보지. 무룡 사질, 네가 대결의 패자라는 데 대해 반론이 있는가?"
화진악의 몸에서 은밀한 기세가 일어나 무룡을 덮쳤다. 아까 많은 제자를 감탄하게 했던 화무룡과 무룡의 기세 싸움은 소꿉장난에도 못 낄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대단한 수법이었다.
노혼에게 화산제일검 자리를 내줬다곤 하나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가문의 후광으로만 얻은 건 아니다. 은밀한 기세에 심령이 제압당한 무룡은 땀을 뚝뚝 흘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가슴이 느끼는 대로 말해 보아라."
언제 움직였는지 노혼이 무룡의 곁에 나타나 어깨에 손을 걸치고 말했다.
견정혈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세 가닥 들어와 무룡의 몸을 헤집었다. 화진악의 기세로 굳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장문 사백께 아룁니다. 제자는 패배를 인정합니다."
왕유재 등이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노혼의 얼굴 역시 티 나게 구겨졌다.
'검을 잡기엔 마음이 여전히 여리구나.'
- 작가의말
3권 분량의 비축분을 쌓은 스포츠 소설과 1권 분량만 쌓은 이 소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무협을 먼저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매일 점심 12시에 올리며 천재지변과 일신상의 변고만 아니면 일일연재를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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