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도형로
사마영이 말한 시기가 다가왔다.
"이건 도철공饕餮功의 비급이다. 외우고 없애라."
무룡은 삐뚤삐뚤한 글자로 가득한 천을 받아 빠르게 읽었다. 못난 글씨가 부끄러웠는지 사마영이 몸을 반쯤 돌린 채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심법입니까?"
"글쎄다. 마교에 전해지는 무공 중에 가장 난해한 거라고 할까? 나도 가볍게 익히긴 했는데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구나."
"혹시 길이 위험합니까?"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걷다가 갑자기 몸이 이동된다. 우리 둘이 겹쳐서 걷을 순 없으니 가는 중에 흩어질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걸어야 합니까?"
"몸이 이동됐을 때 벽이 보이면 앞으로 걸어라. 만약 벽이 아니면 오른손 쪽으로 걸어라. 주의할 점은 몸을 돌려서 걷는 게 아니라 옆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무룡은 도철공을 한 번 더 읽어 확실히 기억했는지 점검한 후, 손으로 천을 비벼 가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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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영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졌다.
'숨기는 게 있어.'
무룡은 여전히 사마영을 믿지 않았다. 우선 사마영이 무룡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보장이 없고, 한발 양보해서 믿는다고 쳐도 무룡에게 친근감을 반드시 느껴야 하는 건 아니다.
'걷는 방법이 더 있을 거야.'
사마영이 알려준 대로 걸으면 사마영이 원하는 곳에 이른다. 무룡은 가만히 서서 한참 고민했다.
'날 이용하면 했지 일부러 해치려고 하진 않을 거야.'
무룡은 깊은 고민 끝에 사마영이 알려준 대로 걷기로 했다. 확실치도 않은 추론으로 제멋대로 움직이면 모든 게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마영의 계산 대로 움직여주고, 함정이면 그때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
결심을 내린 무룡은 옆걸음으로 걸었다. 세 걸음 걷자 주변 환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내가 옮겨진 게 아니라 주변이 변했다.'
컴컴한 지하지만, 무룡은 방위를 정확히 감지하고 남화교 중심부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사이에 또 몸이 옮겨졌다.
이번엔 벽이 보여 앞으로 걸었다. 몇 걸음 걷자 주변 환경이 또 달라졌다. 무룡은 다시 방위를 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옮겨지기를 몇 번 반복하니 진법 속에서 걷는 게 제법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위기를 불렀다.
'어떻게?'
벽을 확인하고 앞으로 걷는 무룡을 누군가가 등 뒤에서 기습했다. 그리고 무룡의 극에 달한 마환기공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놈, 탈출 방법을 대라."
무룡의 팔다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밧줄에 꼼꼼하게 묶였다. 머리만 빼고 촘촘히 묶인 무룡의 모습은 누에고치를 방불케 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노괴물을 죽이고 들어왔다는 거짓말은 할 생각도 말아라. 이미 그 노괴물과 한 번 만났으니까."
"내상을 입으셨소?"
무룡의 질문에 비천각주가 울컥 피를 토했다. 무룡의 입가에 걸친 희미한 미소가 비천각주의 심기를 건드린 탓이다.
"네가 대단한 외공을 익힌 것 같다만, 내 응비심법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그러니 곧이곧대로 아는 바를 다 토해라."
그제야 무룡은 마환기공이 무용지물이 된 이유를 알았다. 비천각주는 응비도로 기운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채 공격했다. 마환기공은 그냥 일상적인 접촉이라고 여겨 비천각주의 은밀한 공격에 대응하지 않은 거다.
"이렇게 합시다."
무룡은 말투를 바꾸는 거로 비천각주가 완전한 우위를 점했다고 여기게 했다.
"당신이 여기 왜 왔는지 알려주면 나도 걷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비천각주는 사마영을 기습하려다가 호되게 당한 탓에 몸뿐이 아니라 마음에도 타격이 컸다. 자신이 아는 노괴물이 진정한 마교 교주인 사마영임을 모르기에 기척이 들킨 거로 큰 충격을 받은 탓이다.
그래서 무룡의 같잖은 수작에 쉽게 넘어갔다.
"응비심법과 함께 익히면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대단한 물건이 여기 있다고 해서 들어왔다.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속곳도 훔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비천각주다. 사마영이 심계를 부려 밖으로 퍼지게 한 소문에 속아 깊은 생각 없이 그냥 훔치러 들어왔다.
'폐쇄한 곳인데 어떻게 소문이 밖으로 나가지? 사마영이 성화령을 찾으려고 모둘 속인 건가?'
음식이랑 물도 안으로 보내야 하고, 가끔 수인을 끄집어내 심문해야 한다. 그러니 사마영이 판 땅굴을 빼고도 뇌옥을 나가는 방법이 최소 하나는 더 있다.
"혈교 사람들도 출입할 거 아닙니까? 왜 굳이 이 땅굴로 움직이려 하는 겁니까?"
"내가 들어온 다음부터 혈교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무룡은 사마영의 수단에 탄복했다. 아무래도 비천각주가 도망 못 치게 수작을 부려 뇌옥을 봉쇄해버린 모양이다.
'비천각주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것도 비급 덕분이겠지.'
다른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지만, 비천각주는 비급 때문에 공격 대신 소매치기 기술을 펼쳤다.
"좋습니다. 몸이 옮겨졌을 때 벽이 보이면 앞으로, 벽이 안 보이면 옆걸음으로 오른쪽으로 걸으면 됩니다."
무룡이 순순하게 얘기하자 비천각주는 오히려 의심했다.
"진짜야?"
"어차피 당신이 날 업고 나갈 거 아닙니까. 괜히 거짓말해서 같이 여기서 죽을 일 있습니까?"
"좋아."
비천각주는 무룡의 머리에 헝겊으로 기운 주머니를 씌운 후, 등에 업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이동했다.
"노괴물이랑 어떻게 흩어졌지?"
"누구도 상대를 업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천하제일로 거론되던 마교 교주, 그런 마교 교주보다 경지가 더 높다고 주장하는 무룡.
상대를 완전히 믿는 상황이어도 등에 업는 건 부담되는 일이다. 이는 무인의 본능 같은 거여서 무룡도 사마영도 상대를 업거나 상대에게 업히는 일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하긴."
비천각주는 무룡이 알려준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확 변하는 걸 보고 쾌재를 불렀다.
"좋구나."
'이놈도 따로 노리는 게 있구나.'
깜깜한 땅굴이어도 높은 경지를 이룬 자에겐 방위를 감지하는 게 어렵지 않다. 무룡은 비천각주가 밖이 아닌 안으로 걷는 걸 보고 뭔가 노림수가 있음을 짐작했다.
"좋아."
쭉 무룡이 말한 대로 움직였는데 아무런 위험이 없었다. 비천각주는 드디어 무룡의 말이 진짜임을 믿었다.
"나한텐 안 좋은 것 같군."
"내상 때문에 직접 죽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말을 마친 비천각주는 무룡을 멀리 던진 후 옆걸음을 걸었다. 세 걸음이 지나자 비천각주가 사라지고 무룡만 남았다.
그리고 진법이 틀린 방위로 움직인 무룡을 공격했다. 비천각주도 버틴 공격이건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무룡으로선 답답할 뿐이었다.
'차라리 확 불이라도 지르지.'
사흘 정도 숨을 안 쉬어도 아무 지장이 없는 무룡이다. 차라리 불로 공격하면 밧줄이 타서 자유의 몸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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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영은 원하는 곳에 도착한 후 기척을 기다렸다. 그러나 목적을 이룬 사람치곤 표정이 안 좋았다.
'빗나갔다.'
비천각주의 기척을 어렵게 느끼고 기습에 반격했다. 그런데 죽이려고 펼친 초식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다.
'몸이 약해진 건가? 아니면 응비도를 잘못 익힌 건가?'
전성기 시절이었으면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털어버렸을 일이다. 그러나 단전도 없이 뇌옥에 수십 년 갇혀 지내다 보니 몸은 물론 마음도 약해졌다.
더구나 추영의 부군이라고 주장하는 무룡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 미끼로 쓴 것이 속에 걸려 마음이 꽤 불편했다.
'난 마교의 죄인이다.'
둘째 손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려고 혼자 괴물을 찾아갔고 실패했다. 둘째 손녀는 그때 제물로 바쳐졌고, 추영만 남았을 때 마교는 수십만 목숨을 희생해 괴물을 재웠다.
사마영은 수십만 교도의 죽음이 온전한 자기 죄업이라고 생각했다.
'지혜의 불이시여, 앞을 밝혀주소서.'
그때 기다리던 소란이 일었다. 사마영을 괴롭히던 우수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동지섣달 새벽의 추위와 같은 냉혹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잘하고 있다.'
소란이 조금씩 커지는 걸 보면 무룡이 잘 버티고 있는 듯했다. 전성기 시절의 자신에는 조금 못 미치나, 그때 검극보다는 나은 무룡이다.
그러니 성화령을 찾고 도우러 갈 때까지 죽진 않으리라.
사마영은 천장에 등을 대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이는 날개가 달린 새도 못 하는 재주다. 벽호공을 극에 달하게 익혔다면 쉽게 펼치겠지만, 사마영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해내는 건 또 무리다.
혈교 교주의 방에 들어간 사마영은 허공에서 춤추듯 복잡하게 움직였다. 혈교 교주의 방은 바닥과 벽뿐이 아니라 허공에도 진법이 펼쳐져 있어 함부로 움직이면 바로 들킨다.
'몰랐군.'
사마영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벼루를 조심스럽게 잡아 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손으로 꼭 잡았다.
수많은 천을 덧대 기운 너덜너덜한 옷이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호법장로가 성화령이랍시고 건넬 땐 날 싫어해서라고 생각했지.'
은자는커녕 엽전 스무 닢도 안 할 것 같은 벼루가 바로 성화령이었다. 아마 사마영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니었으면 혈교 교주가 벌써 버렸을지도 모른다.
'무룡을 구하자.'
목적을 이룬 사마영은 바로 천장에 붙어 혈교 교주의 방을 떠났다. 원래는 자신의 단전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내려 했는데, 미끼로 던진 무룡 생각에 포기했다.
그러나 몰래 도착한 대청의 상황은 사마영이 생각했던 것과 딴판이었다. 걱정했던 무룡 대신 생각지도 않은 비천각주가 수십 명 고수를 꽁무니에 달고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저딴 놈한테 당한 건가?'
이를 갈던 사마영은 바로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천멸장도 버틴 놈이 죽었을 리 없다. 진법 어딘가에 갇혔겠지.'
사마영은 진법을 잘 모른다. 지금 이 모든 건 와행도를 가르친 자가 알려준 거다.
'마교로 돌아가 성화령을 각성한 다음 혈교와 전쟁을 벌인다.'
무룡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작가의말
暗道荊路
암도는 땅굴, 형로는 가시밭길.
무룡 : 비밀이 많은 곳이라... 이번엔 또 어떤 기연이 날 기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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