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강수
마교와 정의연의 싸움이 뜸해졌다. 마교가 갑자기 수비적으로 나오며 상대가 도발해도 잘 응하지 않은 탓이다.
덕분에 부상자 치료를 위해 전장으로 갔던 제자가 대부분 돌아왔다.
독무곡은 무룡의 지시대로 금창약과 내상약을 대량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어차피 독무곡은 가류라는 뛰어난 의원 하나의 힘으로 돌아가던 곳으로 남은 제자들의 수준은 처참하다.
그나마 부상자 상대로 뭘 해야 할지 알아서 조금 나은 정도지, 목숨을 살릴 수준이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금창약과 내상약을 넉넉하게 납품하는 게 마교를 돕는 일이다.
그렇게 대부분 제자는 금창약과 내상약의 조제에, 대부분 일꾼은 약초와 독초를 재배하는 일에 몰두할 때.
무룡은 흘궁과 일부 믿음직한 제자를 모아 음양강수陰陽强水를 만든 후 말려서 가루로 제작하는 일에 몰두했다.
음양강수는 벽은 물론 바닥과 천장까지 돌로 된 가류의 연공실로 몰래 들어가게 한 독이다. 뼈도 녹이고 나무도 녹이며 심지어 돌까지 녹이는 대단한 놈이다.
항주 서남쪽으로 이백 리 거리에 있는 큰 늪지를 차지한 오독교五毒敎의 제자로 있다가 죄를 짓고 도망친 자가 제작 방법을 독무곡에 팔았다.
가류는 별 흥미를 못 느껴 그냥 서재에 뒀고, 흘궁이 우연히 발견해 음양강수를 만든 다음 연공실까지 굴을 뚫었다.
연공실까지 뚫은 굴은 최대한 조치했으나 자세히 살피면 탄로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가류가 약 만드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 외의 일에 무관심한 덕에 용케 끝까지 안 들켰다.
지금은 굴을 다 무너뜨리고 구멍도 돌로 단단히 막았다. 가류가 진짜로 아끼는 것들이 모두 연공실에 있어 무룡이 자리를 비울 때면 제자 몇 명이 들어가 지키곤 했다.
추영의 서신을 읽은 무룡은 자하동의 문을 음양강수로 뚫을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금창약과 내상약을 핑계로 약초와 독초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곡주. 너무 모험하는 거 아닙니까?"
흘궁은 무룡이 하자는 일에 대체로 따르지만, 늘 반대 의견을 냈다.
"자하동의 비밀을 풀면 괴물을 제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독무곡의 지위가 어찌 될까?"
"마교 전체에서 성화전을 빼면 우리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 놈이 없겠죠. 그런데 너무 불확실한 일 아닙니까? 괴물을 제압할 비밀이 그렇게 쉽게 발견될까요? 그리고 또 얼마나 위험할까요."
무룡이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곡주가 된 이상 독무곡은 달라져야 한다. 재물이 충분히 모이면 너도 서역 상인으로 가장해 장안에 가서 의서를 사고 중원의 의술을 배워와야 한다."
둘의 대화를 듣던 다른 제자들이 크게 감복한 얼굴로 무룡을 쳐다봤다.
"너희도 언젠간 가정을 이루고 자식이 생길 것이다. 너희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으냐? 아이가 밖에 나가서 우리 아버지가 독무곡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게 하고 싶지 않냐고."
좋은 집안 출신이 거의 없기에 무룡의 말에 다들 공감했다. 아이들끼리 모이면 자랑할 게 아버지밖에 없는데, 이들은 그저 남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혹시 곡주께 혼인을 염두에 둔 처자가 생겼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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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수십 근이나 되는 가루를 겹겹이 포장하여 등에 메고 독무곡을 떠났다. 어차피 가류도 독무곡을 자주 비웠기에 핑곗거리는 많았다.
물론, 정의연의 무사를 만날 걸 대비하여 침통 세 개를 준비하고 내상약과 금창약도 꽤 준비했다.
그리고 출발한 지 사흘 되는 날에 정의연의 무리와 마주쳤다.
"어디의 누구며 어디로 가시오?"
"의원이오. 약초 구하러 왔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다른 곳으로 가는 중이오."
"장안에서 왔소?"
"어릴 때 화음현에 살았소."
말투는 못 속인다. 억양은 숨길 수 있어도 말 습관까지 숨기는 건 어렵다. 심계가 깊지 못한 무룡은 괜한 거짓말로 오해를 사기 싫었다.
장안을 실제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화음현에 살았다고 둘러댔다.
"그럼 우리 소맹주랑 아는 사이 아니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비약을 먹기 전이었다면 누구라도 무룡을 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비약으로 한결 '젊어진' 무룡은 약관에 못 이르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덩치가 크긴 한데 피부가 하얗고 오관도 앳된 티가 남아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소맹주가 누구시오?"
"무룡!"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무룡을 덥석 안았다.
살결이 희고 오관은 최고의 장인이 공들여 빚은 듯 정교하다. 그리고 눈동자는 하늘의 별을 따다 박은 것처럼 정기가 넘친다. 그러나 선이 굵은 윤곽과 단단한 입매 덕분에 하나도 여성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무룡을 그러안은 미남자는 바로 현재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화무룡이었다.
"내 오랜 친구요. 단둘이 회포를 풀었으면 하는데 근처에 술잔을 기울일 만한 곳이 있소?"
"풍악산이라고 있는데 정자에서 경치를 구경하면 절로 취합니다."
"고맙소. 이 은자로 여러분도 맛있는 것 좀 드시오."
정의연 무사들은 화무룡이 건넨 은자를 받고 거듭 감사를 표하며 떠났다.
화무룡은 빠르게 술과 안주를 챙긴 다음 무룡을 끌고 풍악산의 정자로 갔다.
"넌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이 모습은 뭐고 왜 내공이 하나도 없는데?"
술이 채 석 잔도 돌기 전에 화무룡이 성급하게 물었다.
"너부터 얘기해야지."
"아니, 너부터야. 너 때문에 내가 가출했거든."
무룡은 어쩔 수 없이 자하동에 갇혀 몇 년 지냈던 일을 얘기했다. 딱히 숨길 것도 없기에 노혼이 자하신공의 구 단계를 이루고 마교 장로들을 물리친 것까지 얘기했다.
"난 사부 생각이 자꾸 나서 화산에 계속 있기 싫었다. 그래서 화산을 떠났고, 단전을 상해 내공을 다 잃었다. 의원이 된 건 단전을 복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다."
무룡의 이야기가 끝나자 화무룡은 술을 단지째 들고 꿀꺽꿀꺽 삼켰다.
"그때 사흘이 됐는데도 화진악은 자하동 문을 열려 하지 않았다."
화무룡은 아버지를 이름으로 호칭했다.
"차라리 그땐 너처럼 동굴에 갇혀서 모른 채 있는 게 나았다. 악씨와 왕씨와 주씨 가문의 백이 넘은 혈족이 무참하게 화산 제자들 검에 죽었다."
갑자기 벌어진 살육으로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즐거운 강호행을 마치고 돌아온 화무룡 역시 생각지 못한 반란과 반란 제압 그리고 살육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던 친구인 무룡을 아버지가 자하동에서 꺼낼 생각을 않자 눈알이 홱 돌아버렸다.
아버지와 대판 싸운 화무룡은 부자 관계를 청산한다는 글을 남기고 화산을 떠났다.
"객기를 부려 은자도 안 갖고 가출했다. 그렇게 며칠 굶으니 후회되더라. 그래서 몰래 화산으로 돌아갔지. 그리고 그때 화진악의 진면목을 보았다."
화무룡이 본 건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화진악이었다.
화산 장문인이자 자신이 싫어하면서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비굴한 모습을 본 화무룡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래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결연히 화산을 떠났다.
"풀뿌리를 씹으며 장안까지 가서 검을 팔았다."
검을 팔아 노잣돈을 마련한 화무룡은 배를 타고 천검산장으로 갔다.
"서문 가주가 날 받아주셨고 사위로 들였다."
무룡이 깊은 곳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설마 서문춘영이라는 강호 제일의 재녀하고?"
화무룡이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응. 그리고 무공도 배웠지. 무공 이름은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데, 얼마 전에 마교 소교주도 이겼다. 아, 그리고 그때 우리 객잔에서 봤는데."
"언제?"
"네가 어떤 면사 모자를 쓴 여자랑 국수를 먹고 있었잖아."
"그 절검문?"
화무룡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 어떻게 알았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절검문의 복수 어쩌고 하면서."
무룡이 화진악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가출한 화무룡이다. 후에 노혼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무룡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내심 무룡이 죽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객잔에서 마주쳤다.
살이 훨씬 찌고 피부도 하얘졌지만, 화무룡은 무룡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래서 반가운 나머지 자신이 절검문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비밀 지켜줄 거지?"
"응. 근데 절검문인 걸 왜 비밀로 하지?"
무룡은 전전긍긍하는 화무룡의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어차피 추영이 단번에 네 정체를 알아봤어.'
"전문적으로 절검문 사람을 찾아서 죽이는 놈들이 있어. 그게 아니어도 원래 절검문은 정체를 숨기고 살아."
"이름이 왜 절검문인데? 이것도 비밀이야?"
"절검문의 제자가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해. 최소 하나의 검술을 높은 수준으로 익혀내야 하거든. 그러나 절검문에 들어가면 검을 버리고 다른 무기를 사용해."
"그때 유성추처럼 생긴 게 네 새 무기야?"
"응. 절검문의 삼대 신기 중 하나인 견신犬神이거든. 남은 둘은 아직도 주인이 없어."
"근데 지금은 왜?"
"지금은 화산 제자 화무룡이니까. 검을 써야 사람들이 의심 안 하지."
무룡과 화무룡은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다.
"무룡아. 왠지 네가 예전하고 많이 달라진 느낌이야."
"당연하지. 넌 정의연 소맹주에 절검문 제자인데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거 말고. 예전의 넌 감탄할 정도로 냉철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었어. 네가 내 형이면 화진악의 괴롭힘을 안 받았을 텐데 생각하며 늘 아쉬웠지."
벽파검법은 살인 검법이다. 검법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무룡은 어려서부터 냉정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 참을성을 키웠다. 사부인 노혼의 성정에 영향받아 약간 냉소적인 면도 있어서 세상과 한 발 떨어져 방관했다.
덕분에 남들보다 더 정확히 볼 수 있었고 냉소적인 성격답게 쉽게 꺼내기 힘든 말도 마음껏 뱉었다.
냉소적인 태도와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당시의 무룡은 꽤 대단해 보였다.
"지금 이게 내 진짜 모습이야. 난 그때 사부 흉내나 내는 꼬맹이였거든."
노혼을 떠나보내고 꽤 시간이 흐른 덕분에 무룡은 노혼을 따라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무룡이 크게 성장하는 바람에 열네 살 때 대단하게 느끼던 무룡이 이젠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우린 친구야. 평생 친구 한다고 약속했잖아."
"그럼. 정의연 소맹주 친구를 누가 거부하겠어."
- 작가의말
화산으로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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