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방해
아무런 조짐도 없이 나타난 흑의인이 침이라기엔 조금 굵고 송곳이라기엔 너무 얇은 탐혈침探穴針으로 무룡의 목덜미를 찔렀다.
가끔 치료를 위해 혈도의 크기와 강함을 측정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데, 탐혈침은 사혈을 찔러도 괜찮을 정도로 안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에 가면을 쓴 흑의인의 탐혈침은 극독을 품어 사혈이 아닌 아무 데나 찍어도 사람이 죽는다.
탐혈침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무룡이 사라졌다. 침을 찌르는 데 모든 신경을 쏟은 흑의인은 누가 밀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후퇴하는 무룡을 피하지 못했다.
철퍽 소리와 함께 흑의인이 고기 반죽으로 변했다. 무룡의 등과 단단한 바위 사이에 껴서 전신의 구멍으로 피를 쏟아내며 생을 마감했다.
'일흔둘.'
무룡은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죽이려다가 자신에게 죽은 자의 숫자를 셌다. 하나하나 기억하기엔 마음에도 시간에도 여유가 너무 없다.
잠시 지체한 사이 놈들이 무룡을 따라잡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짜고짜로 덮쳐오는 그물 때문에 무룡은 또 독을 움직였다.
자하괴독이 무룡의 몸 주변을 맴돌며 자유를 구속하는 그물을 녹여 없앴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놈들은 진형을 갖춰 무룡에게 맹공을 펼쳤다.
이미 일흔두 개 목숨으로 무룡에게 독도 내가 중수법도 보검도 안 먹히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죽이는 대신 산 채로 잡으려고 했다.
돌멩이를 매달아 깊은 바다에 던져도 되고, 펄펄 끓는 용암에 넣어도 되고, 죽이지 못하면 평생 묶어둬도 된다.
그러나 흑의인들이 간과한 게 있다. 무룡이 여태껏 도망만 친 건 시간이 아까워서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일섬逸閃.
편안한 일에 번개처럼 빠른 섬. 언뜻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절검문 문주 서문문검의 부탁으로 오대비문의 하나인 벽력문 문주 화뇌火雷가 만든 이 신법은 가능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듯한 한걸음에 무룡이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이미 흑의인들 사이였다.
무룡은 독룡유의 방식으로 자하괴독을 뽑아내 주변에 살포했다. 자하괴독에 당한 흑의인들은 허공에 칼을 휘두르거나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황홀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자도 있었는데, 동료가 휘두른 칼에 크게 베이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쿨럭.
몸 밖으로 내보낸 독들이 돌아오며 무룡의 몸에 큰 부하를 줬다. 마환기공이 급히 독을 분산하고 독룡유가 암혈로 유도했다.
약 반 각이나 지나서야 무룡의 낯빛이 정상이 되고 사지가 통제에 들어왔다.
자하괴독은 무룡을 좋아한다. 그래서 밖으로 방출해도 알아서 돌아온다. 무룡을 상대하는 자들은 자하괴독의 일부만 상대하지만, 무룡은 한꺼번에 돌아오는 모든 독을 상대한다.
상대가 독에 내성이 강하거나 대단한 피독주를 몸에 지녔다면 무룡이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다.
그래서 여태껏 사용하지 않았는데 핍박이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이 모험했다.
'쉴까?'
잠깐 고민한 무룡은 천방기사가 준 은형산隱形傘을 쓰고 바위에 기댔다. 이름은 은형산인데 모습뿐만 아니라 냄새와 기척까지 숨겨주는 보물이다.
일말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코와 입가의 혈도에 침을 찔러 호흡을 멈추는 거로 아예 숨소리까지 차단한 무룡은 눈을 감고 편히 잠들었다. 약 네 시진 정도를 편하게 잔 무룡은 코와 입의 침을 뽑고 은형산을 거뒀다.
그새 흑의인의 무리가 다녀갔는지 주검이 모두 사라졌고 싸웠던 흔적도 말끔하게 지워졌다.
기지개를 쭉 켠 무룡은 은형산을 등에 메고 방향을 가늠했다. 놈들도 무룡의 목적지를 아는 듯하니 안타깝지만 조금은 돌아가야 한다.
"내가 여기 있다고 했잖아."
옷은 서생 차림인데 머리엔 도사들이 쓰는 도관을 얹었다. 그리고 발에는 생뚱맞게도 말을 탈 때 신는 바닥에 철을 댄 가죽 군화를 신었다.
옷차림만 괴이한 게 아니라 생긴 것도 이상했다. 눈이 가운데로 심하게 몰렸는데 볼이 넓어 다람쥐가 연상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왼손엔 주판을, 오른손엔 점쟁이들이 쓰는 괘卦자를 적은 천을 매단 장대를 들었다.
"그래, 잘났다."
다람쥐를 닮은 사내 곁에는 허리가 대장원의 물독보다 더 굵은 곰을 닮은 사내가 있었다. 커다란 몸엔 낡은 갑옷을 걸쳤고 머리엔 얼굴을 다 드러내는 투구를 썼다.
맨발인 걸 보니 왠지 자기 신발을 다람쥐 사내한테 뺏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구나.'
덩치만 보면 백 근짜리 대도를 휘두를 법한 사내의 무기는 허리에 찬 짧은 비수로 보였다. 근접전을 즐기는 놈이라면 파고들 틈이 적다. 시간 여유가 부족한 무룡에겐 정말 최악의 상대였다.
"급한 건 그쪽 같으니까 우린 여유 있게 자기소개부터 하지."
다람쥐 사내가 주판을 흔들어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말했다.
'주판으로 주의를 끄는 걸 보면 장대가 무기인 모양이구나.'
한 번 더 꼬아 주판이 주 무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룡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목숨을 건 싸움에 있어 진실을 찾는 것보다 자신을 믿는 게 더 중요하다.
"난 무공 서열 천하 오위고 여긴 삼위다."
곰 사내가 버럭댔다.
"나 이위는 될 것 같은데."
"검극이랑 사마영司馬盈중에 누굴 이긴다는 말이야?"
"둘 중 약한 놈을 이긴다."
"나는 몇 위입니까?"
"보자, 너는 대충."
그때 무룡이 일섬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땐 절검문이 무룡을 위해 만든 연환격 질풍약영疾風掠影으로 다람쥐 사내의 겨드랑이를 공격하고 있었다.
질풍약영은 너무 빨라 그림자도 훔친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웬만한 자는 세 걸음 안에 피를 토하고 쓰러질 정도로 몸에 부담이 큰 무공인데, 마환기공으로 더없이 튼튼하고 내공의 양만은 천하에서 다섯에 당당히 낄 수 있는 무룡이기에 별 무리 없이 소화했다.
물론, 별 무리가 없다는 건 무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제길."
겨드랑이의 소요혈笑腰穴을 찔린 다람쥐 사내가 몸을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무룡은 소요혈을 통해 기운을 상대 심장으로 침투 시켜 죽일 작정이었지만, 다람쥐 사내는 고강한 무공으로 침투경을 건드려 심장을 비껴가게 했다.
그러나 웃음을 못 멈추게 하는 소요혈과 전신을 압박하는 통증이 겹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책상머리에 앉아 주둥이만 나불대는 놈들이 항상 일을 그르치지."
곰 사내가 비수로 잠깐 경직한 무룡의 눈을 공격했다. 허리에 찬 비수가 무려 일곱 개인데 하나만 휘두르는 걸 보면 무룡을 얕보는 것으로 여겨졌다.
무룡은 피하는 대신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나아갔다. 원래 눈을 노리던 비수는 뜻밖의 선택에 반응하지 못하고 이마를 찔렀다.
눈이나 가랑이 사이에 달린 물건을 노리면 막는 게 첫 반응이고 피하는 게 두 번째 반응이다. 무룡처럼 눈을 뜬 채 마중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외공이 경지다."
곰 사내의 말에 다람쥐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곰 사내의 말은 무룡의 외공이 천하에서 수위를 다투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한참 어린놈인데."
"이립을 넘으면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니지."
'내가 서른을 넘었나?'
그간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곰 사내의 크고 투박한 손에 잡힌 비수는 으스러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양증맞았다. 그러나 무식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사내의 비수는 여인의 자수침처럼 가볍고 영활했다.
'정직하게 간다.'
자하괴독을 풀어 곰 사내를 처리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무룡은 굳건한 의지로 눌러버렸다. 자하괴독으로 곰 사내를 반드시 해결한다는 보장도 없고, 곰 사내를 죽이거나 무력화한다고 해도 다람쥐 사내가 있다.
지금은 소요혈을 차지한 무룡의 기운과 심장을 터뜨리러 들어갔다가 목적을 잃고 날뛰는 기운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지만, 곰 사내가 처단되면 무리해서라도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외공만 익힌 놈이군."
천검산장에서 오백 일 정도 머물며 질풍약영은 물론 벽파검법까지 능숙하게 익혔다. 그러나 배운 게 고작 두 가지 무공이어서 전체에 대한 이해가 옹달샘처럼 얕다.
초식과 검법 이해는 높은 덕분에 어디에 가도 고수 소리를 듣겠지만, 자기들끼리 천하에서 삼위이니 오위이니 하는 천외천의 고수들이 보기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크게 모자란 놈은 아주 뛰어나기 마련이지."
다람쥐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안정되었다. 조급함이 다시 무룡을 다그쳤지만, 자하괴독을 사용하고 싶은 충동을 또 한 번 꾹 눌렀다.
"야, 난 안 되겠다. 이놈은 기교가 아니라 힘으로 제압해야 해."
곰 사내는 비수로 상대 요해를 찌르는 기교파고 다람쥐 사내가 힘으로 제압하는 역량파였다.
무룡의 마환기공은 흑의인들이 수십 명의 목숨을 버려가며 파문破門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할 정도로 약점이 없다.
곰 사내는 비수로 알려진 외공의 파문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일일이 찌르고 벴지만, 전혀 효과가 없자 빠르게 포기했다.
"그럼 서열 바꾸자."
"아니지. 그럼 사위가 싫어할걸?"
곰 사내는 사위를 가볍게 이기고, 사위는 다람쥐 사내를 가볍게 이긴다. 곰 사내와 다람쥐 사내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래서 셋의 서열 논란은 한 번도 종식된 적이 없다.
둘이 느긋하게 대화하는 사이 무룡은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공원파는 안 돼.'
무룡이 천검산장에서 질풍약영과 벽파검법을 극성에 달하도록 익힌 건 공원파를 한 번 쓰면 최소 반나절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표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공원파는 펼치는 자에게도 몹시 가혹하여 마환기공이 극에 달한 무룡조차 하루에 두 번 이상은 무리였다.
연속으로 두 번 펼치는 건 절대 안 되는 일이어서 무룡이 쳐다보기도 힘든 고수 둘을 상대로 펼칠 엄두가 전혀 안 났다.
'머리를 써. 넌 둔하지 않아.'
천검산장에서 서문세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
화산에선 사부하고만 살면서 또래들하고도 어울리지 않았고 마교에선 거의 밑바닥 취급을 받는 독무곡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런 무룡에게 수백 년 전통의 세문세가는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오랜 기간 축적된 강호와 무공에 관한 지식은 무룡에게 푸짐한 비료가 되었다.
'말이 많은 자는 틈도 많다.'
좋은 생각을 떠올린 무룡은 옅은 미소를 띠며 독룡유로 자하괴독을 움직였다.
- 작가의말
업그레이드와 패치를 완성한 무룡입니다. 어차피 괴물과 싸우면서 배운 걸 탈탈 털어낼 것이기에 수련 과정은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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