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술사
"신의, 제 아들이 산에서 따온 싱싱한 열매입니다."
잘 말린 참나무를 정교하게 깎은 다음 옻칠을 열 번이나 한 나무 다리. 발바닥 역할을 하는 부위를 둥그스름하게 잘 깎아 진짜 다리가 새로 자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가체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는지 사내는 약간씩 절뚝였다.
"돼지 열 마리 키워도 되겠소. 그러니 좀 그만 갖고 오시오."
무룡의 방엔 난치병을 치료받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가체를 붙여 두 번째 생명을 얻은 환자들이 보낸 물건으로 가득했다.
재화의 개념이 희박한 남화교이고 또 대부분이 가난한 자여서 주로 음식이 많았다.
"이건 귀한 겁니다. 저런 흔한 것들이랑 같이 취급하시면 제가 섭섭하죠."
가문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다리가 잘려 무인의 생명이 끝난 사내. 그러나 무룡이 준 가체 덕분에 실력은 조금 깎여도 무사의 삶은 이어갈 수 있었다.
"알았으니까 더는 가져오지 마시오."
사내는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서야 무룡이 있는 별채를 떠났다. 사내가 떠나자 난청응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노 선생 덕분에 우리 가문의 명성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공치사하시려거든 오독교의 난 교주한테 하시오."
"그럼요. 이모한테도 귀한 선물을 보내드릴 작정입니다."
말을 마친 난청응은 자기병 세 개를 꺼내 무룡에게 건넸다. 세 병에는 다른 가문 사람의 피가 들었다.
'매번 소량인 걸 보면 죽인 게 아니라 전투 도중 흘린 피를 모아왔다는 뜻인데. 그 정도 실력이면 남화교를 주무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죽이거나 납치해서 피를 뽑는 게 오히려 쉽다. 난전 상황에서 상대 가문의 직계 몸에 상처를 내고 흐른 피를 모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진전은 좀 있습니까?"
"해독할 자신이 있습니다."
무룡의 말에 난청응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꿈틀댔다.
"그런데 소가주가 말한 저주가 걸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소위 저주는 독이 세를 불려 주인을 해치는 걸 막기도 하지만, 주인이 독을 해치지 못하게 보호하기도 합니다."
난청응은 무룡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저주를 먼저 사라지게 해야겠군요. 그 방법은 독을 촉발하는 주문을 외우는 거고요."
"맞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저주는 술사들이 부리는 법술의 한 종료입니다. 그게 있다면 제가 생각한 방식으로 해독할 수 없습니다."
난청응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잠깐. 독이 발작한 후에야 치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 치료에 실패하면 죽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반드시 해독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무룡은 아직 혈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피를 얻어달라는 요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하루에도 사상자가 수십에서 수백 명씩 생기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때 번뜩이는 생각이 무룡의 뇌리를 쳤다.
'독이 발작하면 해결할 수 있다.'
발작한 독은 무룡이 흡수하여 마환기공과 독룡유로 해결하면 된다. 해약 따위는 만들 수 없지만, 해독은 할 수 있다.
괜찮은 생각이라고 판단했지만, 섣불리 말해 또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게 아닌지 이틀 정도 고민하고 오늘에야 난청응에게 말을 꺼냈다.
"그럼 신의를 믿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뭘 하시려고요?"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담판의 장을 마련해야죠."
#
전쟁이 갑자기 멈추고 각 가문의 가주들이 교주가 기거하는 남화전에 모여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가 없이 일어난 전쟁이어서 모두가 만족하는 해결책을 찾기 어려웠다.
별 수확 없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난청응은 심복들과 계획 변경에 관해 상의했다.
"확실하지?"
"주문을 복구하지 못한 게 확실합니다."
난청응은 일부러 교주를 맡은 미씨 가문을 거듭 도발했다. 만약 저들이 주문을 복구했으면 난청응에게 쓰지 않고 못 배길 정도로 심하게 했다.
그런데도 미씨 가문은 노발대발 온갖 저주가 섞인 욕을 퍼부으면서도 난청응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소가주. 근본도 모르는 의원 말을 믿고 하기엔 너무 큰 모험입니다."
나청응의 심복 대부분은 무룡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난청응이 가주가 되고 교주가 되면 부귀영화가 보장된다. 특히 중원에서 들어오는 온갖 진귀한 물건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의원 나부랭이가 소가주와 무척 가깝게 지내니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적은 없어. 뭔가 숨기는 게 있지만, 독이 발작하면 해독할 수 있다는 건 진짜야."
"그럼 뭘 바꾸자는 말입니까?"
분명히 계획을 변경하자고 말을 꺼낸 건 난청응인데, 무룡에 대한 믿음은 그대로였다.
"이렇게 도발해도 반응이 없으니 이젠 주문을 훔쳐서 복구할 궁리를 해야지."
"미씨 가문이 백 년도 넘게 못 한 일을 우리가 단기간에 해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귀한 분을 모셨다. 태산파의 압정도인이시다."
밀실 가운데 느닷없이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심복들은 화들짝 놀라며 품이나 소매에 손을 넣고 언제든지 암기를 던질 준비를 했다.
"태산파 장로 압정이다."
말을 마친 압정도인은 난청응의 의자 뒤에 가서 섰다.
의자 뒤의 자리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한테만 내준다. 난청응은 이러한 행동으로 심복들에게 압정도인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렸다. 무룡은 귀한 인재긴 해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 없기에 심복들이 헐뜯어도 가만히 놔뒀지만, 압정도인은 자신을 크게 도울 사람이어서 위계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도인을 뵙습니다."
약삭빠른 자들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크게 숙여 압정도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눈치가 있는 자들도 잽싸게 일어나 인사를 올렸지만, 일부 속이 뒤틀린 자들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압정도인을 무시했다.
"압정도인은 망가진 물건을 복원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그러니 훼손된 양피지만 찾으면 된다. 내일 회의가 열리기 전에 우리가 키운 최고의 혈영살수를 투입하여 양피지를 훔친다."
"그럼 다른 두 가문을 이간질해서 마찰을 빚게 하면 좋겠습니다."
심복 하나가 꾀를 냈다.
"그래도 우릴 의심하겠지만,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렵겠지. 좋은 생각이다. 책임지고 실행해."
#
침으로 치료하는 덴 시간이 걸린다.
약으로 치료하는 건 약물의 농도나 양을 조절하는 거로 치료 속도를 빠르거나 느리게 할 수 있지만, 침은 아니다.
침은 환자가 병을 이기도록 돕는 것으로, 의원의 솜씨도 중요하나 환자의 의지 그리고 체질이 중요하다.
물론, 무룡처럼 침을 통해 기운을 주입하는 수준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다. 그러나 자신이 내공을 다룰 수 있음을 숨겨야 하는 무룡이기에 일반 의원과 마찬가지로 침술로 치료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실 교주 가문은 이미 몰락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 시간에 무룡은 환자와 대화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해주는 의원 상대로 거리낄 게 없는 환자들은 대부분 아는대로 다 털어놓았다.
"남은 가문들이 합심해서 견제하지 않았다면 교주가 바뀐 지가 오랬겠죠. 우리 가문 혼자서도 남은 가문과 해볼 만하니깐요."
"여기가 그렇게 강합니까?"
"그럼요."
무사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있던 가문이 아니라 중도에 오독교에서 영입된 가문이어서 문제죠. 막 싸우다가도 교주 자리가 우리 가문에 넘어올 것 같으면 기존 가문들이 힘을 합칩니다. 번번이 그런 식으로 미씨 가문이 교주 자리를 지켜냈죠."
"그런데 오독교에서 왜 여길 왔습니까?"
등에 침을 가득 꽂은 환자는 외할머니가 난씨다. 난씨의 피가 섞인 덕분에 꽤 많은 편의를 얻었고, 본인도 난씨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여기 가문들이 애걸해서 왔습니다. 주문이 훼손되고 독이 발작할까 봐 겁이 나서 우리한테 도움을 청한 거죠."
난씨 가문은 정혈단이 망가지고 주문이 훼손되기 전에 남화교에 왔다. 그러나 이렇게 큰 가문이 된 건 갑작스러운 변고로 남화교의 주요 가문들이 혈독의 발작을 두려워하면서부터다.
그때 많은 사람이 오독교에서 넘어와 난씨 가문의 일원이 되어 세력을 급속도로 불린 것이다.
오독교에서 남자의 지위는 정말 낮다. 아마 그 이유로 수많은 남자가 오독교에서 남화교로 옮겼을 것이다.
웃긴 건, 그렇게 남자가 귀해진 덕분에 현재 남성의 지위가 많이 올랐다는 것이다. 아직도 여자보단 못 하지만, 사람대접은 받는다.
"강한 자가 가장 높이 서지 못하면 문제가 끊이지 않겠는데요."
"다 가주께서 자비롭기 때문이죠. 정도만 걸으려 하시고 순리를 지키려 하시는 참된 분입니다."
'그런 참된 분이 난청응 같은 요사한 놈을 키웠을 리가. 뭔가 모르는 비밀이 분명히 있다.'
그간 다수의 환자와 잡담을 나누며 수집한 내용을 종합하면, 무력 자체는 난씨 가문이 남은 가문을 합친 것과 비등할 정도로 보유했다.
그러나 교도들의 지지는 별로 받지 못했다. 약 몇 년 전부터 젊은 교도 사이에서 꽤 지지를 얻긴 했지만, 젊은 교도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할 힘이 부족하다.
'도대체 이번 일의 배후는 난씨인가 미씨인가. 아니면 다른 야심에 찬 가문인가?'
가문마다 따로 혈영살수를 키우기에 판단이 어려웠다.
무룡은 내심 난씨 가문은 배제했다. 그간 봐온 난청응은 아직 눈길을 남화교 밖으로 돌리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 가주를 본 적 없어서 또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도 없었다.
'가주를 만나 대화하면 두서가 잡힐 텐데.'
무룡의 염원은 당일 이뤄졌다.
"노 선생. 주문을 얻어서 복원했습니다. 가주께서 가장 먼저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십니다."
난청응이 긴장과 흥분이 역력한 얼굴로 찾아왔다.
- 작가의말
양성평등 정책 도입이 시급한 오독교입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