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문검
벽력진이 사라지면서 낸 굉음은 보행으로 하루거리의 전장까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갓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산이 몇 개 허물어진 사고가 있었기에 양측 모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산사태 때문에 무기를 원하는 곳에 설치하지 못했지만, 산사태 덕분에 괴물의 동태가 바로 들키지 않은 이점도 생긴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마교와 정의연이 무사를 물렸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무룡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또 다른 희소식은 양측이 약속한 전투를 하루 미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거듭 일어나는 산사태가 혹시 지진의 전조라면 대규모 전투는 위험하다. 하루 정도 더 지켜보는 게 양측 모두에게 좋고, 마교와 정의연의 손을 모두 빌려야 하는 무룡에게 더도 없는 희소식이었다.
현재 마교와 정의연이 피를 튀기며 싸우곤 있지만, 누구도 양패구상은 원치 않는다. 현재 황태자비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수를 쓰고 있는데 가장 께름직한 두 세력인 마교와 정의연이 동시에 사라지면 바로 실행에 옮길 것이다.
입신양명 내지는 황제를 꿈꾸는 정의연과 남궁가의 입장에선 마교를 최소한의 피해로 이기고 용혈을 빼앗는 게 유일한 출로다.
마교 역시 약해지면 안 된다. 슬슬 괴물이 깰 시기도 가까워져 오고, 제국 최초의 여황제가 되려는 황태자비가 약해진 마교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둘이 양패구상하면 아마 정의연은 흡수하고 마교는 씨를 말려 강한 세력 둘을 뿌리 뽑는 동시에 명분을 쌓을 것이다.
천하에 해악을 끼치는 마교를 토벌해 물리쳤다는 명분까지 있으면 공식적으로 용혈이 사라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고 대신과 권문세가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황태자비가 황제 자리에 앉는 것이 마냥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직접 싸우는 건 마교와 정의연이지만, 실질적으론 삼파전인 셈이다.
대부분 사람은 몸이 뜨겁고 머리가 달아오르면 자기 몸을 보전하기보다 상대를 죽이는 데 더 열중한다.
그런 상황에 지진이 덮치면 직접 피해로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이고, 여느 전투와는 달리 다친 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상황과 이유로 마교와 정의연은 전투를 망설였고, 무룡은 다람쥐 사내 일행의 방해로 조금 지체되었음에도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괴물과 함께 전장에 도착했다.
"어제 정찰을 보내지 말자고 주장했던 장로들."
교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절검문의 졸개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지 미리 생각해 둬."
놀기 좋아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는 교주지만, 괜히 교주가 아니어서 무룡과 독 안개를 보자마자 전후 사정을 알아챘다.
절검문의 성향과 지향하는 바를 잘 알기에 정찰을 반대한 장로 중 절검문의 제자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했다.
의심하는 건 정의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마교 교주 사마영처럼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씩 키우는 늙은 여우들은 서로 상대 세력이 외부와 결탁했다고 의심했다.
남궁세가를 위수로 하는 세가연합은 화무룡 등이 제삼의 세력과 손잡았다고 의심했고, 그건 소맹주 화무룡을 옹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실을 아는 건 화무룡을 비롯한 몇 명의 절검문 제자뿐이었다.
"일반 무사는 물려야겠다."
검극이 입을 열었다.
"만부당한 일입니다."
화무룡의 반발에 검극이 고개를 저었다.
"소맹주는 저 안개에 가려진 강자가 느껴지지 않는가?"
"물러나더라도 마교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가뜩이나 물도 음식도 부족한 메마른 곳이다. 배불리 먹지 못하고 씻지 못하는 것까진 그렇다고 치겠는데, 사시장철 바람이 잦지 않는다.
원정군인 정의연의 사기가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신앙으로 무장한 마교보다 부족할 게 뻔하다.
그래도 황태자비가 가끔 변경을 지키는 군대를 시켜 군량미를 하사하고, 큰 공을 세운 자들에게 벼슬이나 재물을 내리면서 그럭저럭 유지해 왔다.
그런데 마교를 앞두고 먼저 물러난다면 어렵게 지탱하던 무리가 벼락을 본 원숭이처럼 순식간에 흩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 목숨이 중하거늘."
"오늘 물러섬으로 마교가 득세하면 훨씬 많은 목숨이 사라집니다."
검극은 무공이 고강할 뿐 말주변은 없는 편이다. 대꾸할 말이 궁색하여지자 세가연합, 정확히는 남궁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가연합에선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세가연합이 후퇴를 주장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남궁가주가 대맹주 자리를 화무룡에게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세가연합과 대치점에 있는 문파연합은 화무룡을 대맹주로 밀어줄 의지가 충분하다. 개인 무력만 강하고 뒤를 받치는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하기에 모두의 구미에 맞는 인선이다. 화무룡과 관련이 있는 화산파는 손청우가 장문인이 되었고, 그게 아니어도 현재의 화산파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 약하다.
"제길, 내가 이래서 무리 짓는 걸 싫어했는데."
검극의 말에 몇몇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대부분은 딴 데를 쳐다보며 안색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마교가 무사를 물리면 우리도 물립니다. 마교가 먼저 물러났다는 걸 무사들에게 확실히 알리면서 말입니다."
화무룡의 말에 늘 반대만 하던 세가연합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교가 안 물리면?"
검극의 시비 거는 듯한 말투에도 화무룡은 침착을 유지했다.
"만백성과 황실을 위해 우리도 버텨야죠."
화무룡의 속셈은 간단했다. 마교가 수백 년 동안 원한이 쌓인 괴물을 두고 도망가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사람 일은 예단하기 어렵다. 특히 마교 교주가 즉흥적인 성격이어서 확신은 금물이다.
그래서 정의연 무사들을 그대로 두는 것으로 마교를 압박한다. 마교가 먼저 물러나면 사기가 꺾일 게 뻔하고, 정의연도 마교가 물러난 다음 후퇴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마교는 명분도 잃고 실리도 못 챙기는 상황이 된다.
'천하를 위해 어쩔 수 없지.'
사정을 모르는 자들의 목숨을 도박판의 판돈으로 올린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미리 입수한 정보대로라면 여기서 도망쳐봤자 목숨을 며칠 부지하지 못한다.
차라리 죽을 각오로 덤비는 편이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그때 마교 진영에서 붉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와 허공에 멈췄다.
"검극, 얘기 좀 하자."
교주의 외침은 메아리가 없었다. 소리를 원하는 거리까지만 보낸 탓에 산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마교 교도들이 환호했다.
얼굴을 잠깐 씰룩인 검극이 허리의 검을 뽑아 허공에 던진 후 날아 올랐다.
"답검비행踏劍飛行!"
검극을 태운 검이 날아가자 정의연 사람들이 경탄을 질렀다. 정의연 무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고취했다.
그러나 일반 무사들의 기대와 달리 마교 교주와 검극은 경천동지의 싸움을 벌이는 대신 대화를 시작했다.
"힘을 합치자. 용혈을 내주마."
검극은 무인이다. 그래서 이러한 협상에 익숙지 않다.
"소맹주, 이리 오시게."
평소엔 화무룡한테 편하게 하대했지만, 적군의 수장 앞에서 체면을 살려줄 필요가 있다.
화무룡이 허공을 세 번 디뎌 두 사람 근처까지 온 다음 땅을 밟았다. 화산파의 경공 중 최고로 치는 연자삼비燕子三飛로, 공중에서 회전을 통해 허공답보와 비슷한 효과를 얻는 대단한 신법이다.
"교주께서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용혈을 양보할 테니 저 괴물을 함께 죽이자."
"화산의 원수는 어떡합니까?"
"그건 계속해. 오늘부로 안 싸우자는 게 아니고 힘을 합쳐 괴물을 처치하면 용혈을 내준다는 말이다."
"성녀도 원합니다."
"그래."
화무룡의 예상을 벗어난 전개였다. 용혈은 몰라도 성녀는 절대 안 내줄 거라고 여겼는데, 교주의 대답엔 망설임이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때, 회색 인영 하나가 희끗거리며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화무룡은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마 선배, 검극, 오랜만이오."
나타난 자는 검총아劍寵亞 서문문검이었다.
세 살 때부터 젓가락보다 검을 더 편하게 쓴 서문문검이다. 검의 총애를 받고 태어난 자라고 하여 검총아로 불렸는데 강호 활동을 일절 안 하는 바람에 이미 오래전에 잊힌 별명이다.
"절검문주야 서문가주야?"
서문문검이 절검문의 문주이고 천검산장이 절검문의 본진인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절검문주요."
그러나 천년도 넘게 절검문이 유지되고 서문세가도 수백 년 동안 무탈하게 지내온 걸 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
"절검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리고 서문문주와 절검문주는 하나야 둘이야?"
"시간이 없으니 본론을 말하겠소."
서문문검이 무시하는데도 교주는 전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싱글벙글 신나게 웃어댔다.
"그래, 본론 좋지. 저 괴물 때문에 온 거겠지?"
"그렇소. 괴물은 심장이 일곱인데 이미 둘이 사라졌소."
마교 교주가 흠칫 놀라면서 감각을 점점 가까게 다가오는 독 안개에 집중했다.
"누구 짓이지?"
"난 아니오."
서문문검의 말에 마교 교주가 희색을 비췄다.
"절검문주가 하나, 검극이 하나, 내가 하나. 그럼 둘만 남는군."
심장이 재생하기 전에 남은 둘마저 없애면 괴물은 영원히 사라진다. 마교의 숙원이 오늘부로 해결될 수 있다.
"남은 둘은?"
검극이 무뚝뚝하게 질문했다.
"우리가 수십 년 준비한 무기가 있다. 놈을 며칠 잡아둘 수 있으니 먼저 회복한 사람이 해치우는 게 어때?"
"놈의 심장이 먼저 회복할 가능성은?"
서문문검의 말에 교주가 이를 악물었다. 지난번에 혼자서 괴물을 죽인다고 찾아갔을 때 심장을 하나 터뜨렸는데 사흘 만에 회복했다. 교주는 그때까지 회복하지 못해 결국 제물을 바쳐 난동을 부리는 괴물을 잠재웠다.
"내가 부순 심장은 사흘 만에 회복했다. 그러나 현재 화후가 더 깊어 나흘까지 기대할 만하다."
"난 닷새."
호승심이 발동한 검극이 닷새를 장담했다.
"난 열흘이오."
이룡이 해악을 끼친 수백 년 동안 마교만 놈을 상대한 게 아니다. 비록 검극도 서문문검도 괴물을 직접 상대한 적은 없지만, 괴물의 위용을 들은 적 있기에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그럼 난 심장 두 개를 책임지지."
자존심이 상한 교주가 밑장을 깠다. 검극도 서문문검도 교주의 선언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강한 공격을 단기간에 두 번 한다고 더 강한 건 아니다. 그러나 승패를 제치고 무공의 경지만 보면 교주가 우위를 점한 셈이다.
교주의 나이가 백 살이 넘었다고 해도 천재의 드높은 자존심은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내가 어떻게든 사흘 안에 회복하여 마지막 심장을 부수지."
검극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 작가의말
남자가 여자보다 빨리 죽는 이유 :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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