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다 뒈졌어."
천방기사는 흥분하여 콧김을 씩씩 뿜었다. 그러나 허신도가 있는 장안을 코앞에 두고도 선뜻 다가가진 못했다.
붉은 부리의 까마귀가 출현하자 천방기사를 노리는 자들이 단체로 몰려왔다. 개중에는 같은 가문의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원수 손에 잡히면 목숨을 잃고 가문 사람에게 잡히면 자유를 잃는다. 쫓겨나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천방기사를 가문은 봉인해서 영원히 가둘 것이다.
그때 까마귀가 나타났다.
천방기사와 같은 날 태어난 붉은 부리의 까마귀는 천방기사보다 훨씬 똑똑하다. 인간이 아닌 까마귀로 태어난 탓에 격이 너무 낮아 겨우 영물에 머문 거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어마어마하게 강한 신선이 되었다.
"사고 치러 왔구나."
"도와줘."
"무자천서는 사라졌다. 허신도를 노리는 거겠지?"
무자천서는 인연이 생기면 세상에 나타나고 인연이 끝나면 사라진다. 사실 허신도보다는 가장 필요한 걸 알려주는 무자천서가 훨씬 낫긴 하지만, 천방기사는 괜찮았다.
허신도만 익히면 중원에서 두려운 상대가 채 열도 안 된다.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그리고 맘 편히 나들이할 수 있다.
"조심해서 따라와."
까마귀는 천방기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길을 안내했다. 둘은 비영이 안내했던 것과 다른 입구로 들어가서 다른 경로로 움직였다.
"잠깐. 이거 진법인데?"
"허튼짓하지 마."
말린다고 말을 들으면 천방기사가 아니다. 까마귀 뒤를 따라 걸으면서 감각을 넓혀 지하에 통로로 구축된 역천진을 은밀히 탐색했다.
'봉인소환진? 이 무슨 개떡 같은 진법이야?'
차라리 천방기사가 역천진을 자세히 읽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진법 효과를 확인한 천방기사의 호기심은 전에 없이 드높아졌다.
다행히 역천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허신도를 향한 간절함이 훨씬 절실하기에 천방기사는 고분고분 까마귀 뒤를 따라 황궁 비고로 갔다.
"아우, 제자. 보고 싶었다."
무룡과 추향은 누가 봐도 안 보고 싶은 얼굴이지만, 천방기사는 개의치 않았다. 남의 눈치랑 기분을 살필 재주가 있었으면 사고뭉치가 되진 않았을 거다.
"오호. 외혈外穴이라니. 이거 참 대단한 구상이야."
천방기사는 단번에 허신도의 핵심을 알아챘다. 미처 혈도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시기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부에 혈도를 만들어 외부의 기운을 움직이는 법을 찾아낸 것이다.
'참 부러운 재능이야.'
무룡은 물론 추향도 천방기사의 넘치는 재능이 부러웠다. 둘이 사흘 연구해서 겨우 알아낸 걸 천방기사는 고작 절반만 읽고 눈치챘다.
"이래서 이름이 허신도구나. 외부에 내 몸과 비슷한 걸 만들어 외부의 기운을 쉽게 움직이는 방법. 가끔은 무지가 걸작을 낳을 때가 있는 법이지."
내부의 기운마저 움직이는 게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외부의 기운에도 눈을 돌렸고, 허신도라는 어마어마한 운기법이 탄생했다.
처음부터 단전을 알고 몸의 모든 혈도를 알아 심법이 발달했다면 외부의 기운을 움직일 생각을 아예 안 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내공만으로 강한 힘을 낼 수 있고 익히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우니 누구도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천방기사는 반나절도 안 되어 허신도를 완벽히 익혀버렸다. 이제 초입인 추향이나 아직 입문을 망설이는 무룡에겐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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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영과 당백호가 동궁을 선택한 건, 비밀 통로가 동궁으로만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하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는 추영과 당백호다. 그러니 비밀 통로를 가까이 두고 언제든 피신할 궁리를 하기보다 비밀 통로가 없어 수비가 용이한 동궁을 고르는 게 답이었다.
덕분에 그간 폐황태후가 보낸 자객을 잘 막아냈지만, 지금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폐천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황제 자리를 넘길 테니 우리 도주를 도와라. 추영이 폐황태후에게 던진 제안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거절당했다.
이는 용혈이 계속 남으면 두고두고 후환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대신들이 사십구일제를 반대하는 걸 본 폐황태후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제국에 더 충성하는 대신들 때문에 원망이 생겼고, 그걸 애꿎은 당백호한테 화풀이했다.
정의연은 가두려 하고 폐황태후는 죽이려 한다. 폐황태후와 손을 잡고 정의연을 상대하며 몸만 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어쩔 수 없구나. 수부守父가 다녀오거라."
수부는 당백호의 아명이다. 아버지를 지키라는 뜻으로, 무룡이 무사하길 바라는 추영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는 이름이다.
그때 동궁 밖에서 병장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황태후가 보낸 자객이라면 죽으면 죽었지 동궁을 지키는 정의연 청룡대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시녀들이 바로 지붕 위로 뛰어올라 상황을 확인했다.
"태상太上과 공주십니다."
황제가 살아서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면 태상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룡은 황제가 된 적 없기에 그냥 태상이라고 불렀다.
"밖으로 나간다."
추영의 명령에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미 황궁을 떠날 준비를 했기에 짐은 다 싸뒀다. 찾아서 들고나오면 되기에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모친, 저라도 남아서 제국을 지키겠습니다."
당백호의 말에 추영이 피식 웃었다.
"제국과 백성은 너 혼자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제국의 운세가 다했으니 어서 새 주인이 생기는 게 천하창생을 위한 길이다."
제국 초기엔 인구가 사천만 정도였는데 지금은 일억이 넘었다. 많아진 인구에 따라 제도가 변하고 운영 방식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큰 변화는 제국이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제국이 무너진 다음 황제가 되고픈 야심가들이 백성 한 명이라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수를 쓸 것이고, 좋은 수는 누구나 따라 한다. 그렇게 세상에 알맞은 제도가 자리를 잡게 되고, 그중 하나가 황제가 되어 천하를 새롭게 다스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백성을 위하는 길이다.
"마교도 황궁도 탐욕스럽지 않은 자가 드물었습니다. 과연 그런 자들을 믿고 천하를 맡겨도 될는지요?"
"탐욕이야말로 세상을 만드는 힘이다. 넌 아빠를 닮아 성격이 담백하니 황제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당백호는 여전히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정 그러면 황궁을 탈출한 다음 네 힘으로 사람을 모아 군대를 만들어 다시 장안을 되찾아라. 그 과정에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게 될 것이다."
밖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격렬해지자 당백호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모친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무룡과 추향이 등을 붙이고 청룡대의 공격에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오 대주. 제국은 이미 끝났다. 우릴 곱게 보내주면 그 정을 잊지 않겠다."
추영은 은혜라는 말 대신 정이라는 말을 썼다. 이는 힘으로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줬다.
"구실을 만들어 주십시오."
오지열 역시 뭔가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정의연에서 가장 위세가 강한 청룡대 대주 자리를 지키려면 부득이하면서도 합당한 핑계가 필요하다.
"붉은 부리의 까마귀가 나타나서 재앙을 예고했다. 곧 천방지축이 날뛸 것이고, 어쩌면 장안이 이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미 시작됐다."
추영의 말을 추향이 받았다.
"장안 전체를 감싸는 진법이 발동했다. 어떤 일이 터질지는 아직 모른다."
"무기를 거둬라."
오지열의 명에 청룡대 대원들이 바로 뒤로 물러났다. 추영과 추향의 말을 믿은 것도 있지만, 무룡을 향해 사지는 물론 이마까지 바닥에 바싹 붙인 시녀들의 모습을 보고 뭔가 깨달았다.
"안전한 곳까지 동행하는 건 어떻습니까?"
상대가 뭔가를 안다는 생각에 오지열은 동행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다.
"폐천도 그렇고, 우릴 노리는 자가 많다. 차라리 빨리 도망치는 게 나은 길이다."
오지열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청룡대를 수습해 황궁에서 도망쳤다. 위급한 순간엔 신중하기보단 과감해야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크다.
옳은 결정도 늦게 내리면 악수가 되고, 틀린 결정도 빨리 내리면 구명의 수단이 된다.
"통로로는 못 움직여. 황궁을 나가서 장안성 성벽을 넘어야 해."
통로는 그새 못 참고 진법을 발동한 천방기사 때문에 이용할 수 없다.
"딸."
추영이 경공을 펼쳐 추향을 안았다.
"엄마,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
냉정한 딸의 대응에 추영은 섭섭하면서도 기특했다. 서로 먼발치에서라도 본 적이 없는데 딸은 자신의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쏙 빼닮았다.
"그래. 회포는 나가서 풀자."
그때 무룡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추영의 손을 잡았다. 추영은 콧등이 시큰한 걸 억지로 참으며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장안성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역천진이 있소. 천방기사가 소환봉인진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누구도 모르오. 봉인된 놈을 소환하는 건지 소환된 놈을 봉인하는 건지. 어쨌든 진법의 크기나 힘을 보아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니 빨리 장안을 벗어나야 하오."
그러나 청룡대라는 큰 산을 하나 넘었다고 대로가 평탄하게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 어느새 폐황태후가 부른 군대와 무인이 동궁을 향해 달려왔다.
괜히 협상한답시고 시녀를 보내 장안을 떠날 생각이 있음을 알린 게 패착이었다.
"내가 나서지."
무룡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너희는 제국의 신하가 아니더냐? 어찌 황궁에서 그 흉험한 쇠붙이를 들고 날뛰는 것이냐?"
호세도로 기세를 북돋고 허신도로 소리를 울리게 했다. 원래 키나 덩치가 범상치 않은 무룡이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장수 같았다.
"저자가 정의연이 만든 가짜 용혈이라는 투서가 있었소. 데려다가 용혈이 맞는지 검증하고, 맞으면 우리 목숨으로 사죄하겠소."
정삼품의 복식을 입은 젊은 대신이 외쳤다.
"내가 바로 황제의 아버지이자 장공주와 독고현천의 아들 무룡이다. 용혈의 이름으로 말한다. 폐황태후를 복위하고 제국의 새 주인으로 인정한다. 우리 부자는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늙은 대신들이 황급히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달려왔다.
"어허, 재상의 외모를 그대로 닮았구먼."
"뭣들 하는 건가. 어서 무릎을 꿇지 않고."
대신들이 무릎을 꿇고 무룡에게 예를 올렸다. 제국이 다 무너져가는 마당에 반란을 획책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황실의 법도를 지켰다.
늙은 대신들이 무릎을 꿇자 젊은 대신과 장수들도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렸고, 군사들도 장수를 따라 바닥에 엎드렸다.
"오늘부터 박릉 최씨가 제국의 주인이다. 사천 당씨의 모든 권력을 박릉 최씨한테 양도한다는 문서다."
옥새와 당백호의 수인이 찍힌 문서였다. 옥새를 찍은 적도 없고 수인을 한 적도 없는 당백호는 커다래진 눈으로 추영을 봤다.
"네 누나 짓일 거야."
모든 일이 좋게 마무리될 것 같은 분위기인 그때, 피 칠갑을 한 오지열과 채 열 명도 안 되는 청룡대가 돌아왔다.
그 뒤엔 낭패한 모습이 역력한 온갖 괴이한 복식의 인간이 따라왔다.
"동궁, 동궁이 안전해. 동궁으로 가라."
- 작가의말
코난이 나타난 곳에선 반드시 사람이 죽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누구도 못 막죠. 마찬가지로 천방기사가 나타나면 사고가 터질 확률이 높습니다. 이것 역시 누구도 못 막습니다. 막을수록 사고가 더 커지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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