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산타우
다섯 사람은 찰나의 순간에 각자 속셈을 마쳤다.
"동참하겠소."
노혼이 말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노혼과 무룡뿐이다. 밖의 인기척은 무룡일 수밖에 없고, 무룡이 들은 이상 노혼은 넷을 한꺼번에 죽이든지 이들의 제안을 수락하든지 해야 한다.
제안을 들은 사람이 노혼뿐이라면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맹세로 좋게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나 들은 귀가 둘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네 가주는 노혼의 맹세를 믿어도 무룡은 믿지 않는다. 저들은 무룡의 죽음을 원할 것이고 그건 노혼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넷을 죽일 자신이 생기지 않은 노혼은 반란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밝혀 무룡의 목숨을 살리려 했다.
악명청과 왕유재는 노혼의 앞을 막아섰다. 이들은 밖의 인기척이 무룡이 아닐 가능성도 떠올렸다.
화진악이 노혼에게 감시자를 붙였는데 넷의 방문을 보고 대화를 엿들으러 접근했을 수도 있다. 둘이 노혼을 막은 사이 거리가 가까운 조형래와 주만통이 엿들은 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조치하길 바랐다.
조형래는 주만통의 옷자락을 잡았다. 기척이 들리고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주만통이었다. 주만통이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기척이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날리자 조형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옷자락부터 잡았다.
주만통은 조형래가 옷자락을 잡자 소매에 내공을 실어 휘둘렀다. 옷자락이 잘 벼린 가위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조형래의 방해를 떨친 주만통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훙 소리와 함께 나무를 엮고 찰흙으로 틈을 메운 벽이 허물어졌다.
이 모든 게 채 두 호흡도 안 된 사이에 벌어졌다.
"하하. 이거 주 가주가 노 사제한테 집 한 채 물어주게 생겼구려."
왕유재가 억지로 웃으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주 가주가 화산제일검 앞에서 장법을 자랑하고 싶었나 보오."
조형래가 왕유재의 말을 받았다.
악명청과 주만통은 굳은 얼굴로 노혼의 눈치를 살폈다.
"주 가주 덕분에 당분간 소고기만 먹게 생겼소."
노혼이 안색을 풀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너진 벽 너머에 커다란 소 한 마리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다.
노혼이 무룡을 제자로 들인 걸 축하한다고 전대 장문인이 준 소다. 그때 무룡은 이미 세 살이었지만, 끼니 챙기는 시간을 아끼라고 젖이 잘 나오는 소를 노혼에게 하사했다.
어쩌면 무룡의 덩치가 또래보다 훨씬 크고 힘도 센 것이 이를 갈기 전까지 소젖만 먹은 덕분인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대로 쌀과 천을 보내겠소. 집을 허문 것과 귀한 소를 죽인 것도 있고, 십여 년 동안 화두만 잡고 있던 격산타우를 깨닫게 해준 공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소."
격산타우隔山打牛는 산 너머의 소를 때린다는 뜻으로 격공권의 일종인 관통권이다. 흔한 권법은 아니고 아미파의 절학인 통비권通譬拳이 그나마 유명하다.
제대로 된 격산타우라면 벽이 멀쩡하거나 조금 손상되고 소만 죽어야 한다. 그러나 나무로 된 벽을 때려서 소를 죽인 것만 해도 대단한 성취다. 소가 벽에 기대고 있던 것도 아니고 쓰러진 위치를 보면 거리가 최소 반 장은 되었다.
'주만통의 공력이 예상을 뛰어넘었구나.'
왕유재는 조형래뿐만 아니라 주만통도 경계 대상에 올렸다. 그러다 보니 악명청도 뭔가 꿍꿍이를 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노 사제도 동참하는 거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소. 모든 행사는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고, 노 사제는 그저 화진악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고 훌륭한 장문인이 되시오."
작은 오해 덕분에 노혼의 동참을 쉽게 끌어냈다. 네 가주는 명명 중에 하늘이 도움을 준 것 같아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쇠도 단김에 때리라고. 오늘 기운이 좋은 듯한데 장로들을 설득하러 갑시다."
"각자 가문에서 뒤 봐주는 장로 명단을 서로 공개하는 게 좋겠소."
네 가주는 숨김없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장로 명단을 공개했다. 괜히 별것도 아닌 일을 숨겨 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설득해야 할 대상은 셋뿐이군. 그럼 바로 갑시다."
설득은 쉬웠다. 이름뿐인 장로가 아니라 문파의 일에 어느 정도 결정권을 준다는 말에 셋은 아주 쉽게 넘어왔다.
"저들에게 감시를 붙여야겠소."
설득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조형래가 말했다.
"이상한 낌새가 있었소?"
"아니오. 그래도 혹시 화진악에게 비둘기를 날리지 않는지 지켜봐야겠소."
셋 중에 화진악의 사람이 있다면 장안에 있는 화씨 방계한테 비둘기를 날려 경고할 것이다. 네 가주는 강호행을 끝내고 돌아온 당일 손을 써서 화진악과 화무룡을 죽일 계획이고, 장로들의 마음을 완전히 잡기 위해 계획을 꽤 상세히 누설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각자 믿을 만한 사람으로 감시를 붙입시다."
한편.
네 가주가 떠나자 노혼이 제자를 불렀다.
"무룡아, 그만 나와도 된다."
지붕 위에서 무룡이 내려왔다. 기척이 들킨 순간 바닥을 굴렀고, 넷의 주의력이 노혼한테 집중된 틈을 타 벽을 잡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가르친 적도 없는데 기척은 참 잘 숨기는구나."
왕유재처럼 내공을 특별한 혈도로 보내 청력을 극대화하여 심장 박동 혹은 호흡으로 기척을 찾는 방법이 있고, 기감을 살려 강하게 뭉치거나 강하게 흐르는 기운을 감지하는 수도 있다.
코를 영민하게 바꿔 냄새로 찾는 방식도 있고 바닥에 귀를 대고 진동을 느껴 움직임을 감지하는 재주도 있다.
"저들이 하려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무룡은 심장이 느리게 뛰고 호흡 역시 느리고 깊다. 거기에 내공 성취가 낮아 몸에 뭉친 기운이나 강하게 흐르는 기운도 없다. 그래서 네 가주에게 들키지 않고 끝까지 지붕에 안전하게 숨었다.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냐?"
"장문인에게 사실 그대로 알리고 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그럼 화진악이 저들은 물론 저들 혈족까지 다 죽일 거다."
무룡은 말문이 막혔다. 저들이 하려는 일도 나쁘지만, 반란을 고발함으로써 일어날 일도 옳지 않다.
"모두에게 좋은 해결책이 없을까요?"
"네가 갑자기 백 년 내공을 얻어 전부 제압하고 화산 장문인이 되면 누구도 죽지 않는다."
"제자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십시오."
노혼은 이런 제자가 답답하면서도 흡족했다.
"고수의 싸움은 매미 날개만큼 얇은 차이로 생사가 갈린다. 내가 화산제일검으로 불리는 건 내 검법이 사람 죽이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화산에서 나만큼 많이 죽였고 잘 죽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혼은 자신의 무력이나 명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확실히 못 박았다.
"그래서 지금은 선택해야 한다. 반란을 일으켜 화진악과 화무룡만 죽이고 내가 장문인이 되든지. 아니면 화진악한테 계획을 누설하고 네 개 가문의 백 넘은 사람이 죽거나 노예가 되게 하든지. 너라면 어느 걸 선택하겠느냐?"
"화무룡도 죽여요?"
무룡이 깜짝 놀랐다. 아까 나눈 대화에는 화무룡이 언급된 적이 없었다.
"현재 화씨 가문의 힘이 제일 세다. 화진악만 죽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화무룡을 장문인 자리에 앉힐 거다. 저들은 당연히 화진악과 화무룡을 함께 죽일 생각이다."
"제자는 장문인에게 반란 계획을 알리는 게 더 바른길이라고 믿습니다."
무룡에게 화무룡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화무룡을 쉽게 깨지는 빙옥氷玉처럼 아끼는 초민향이 있고 엄하나 든든하게 지켜주는 화진악이 있다.
그래선지 화진악은 늘 친절하고 웃음이 밝으며 틀을 차리지 않는다.
노혼 역시 무룡을 아끼지만, 무공 수련에 푹 빠져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살가운 성격도 아니어서 초민향처럼 따뜻하게 품어준 적이 없다.
무룡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고 마음이 그늘져 있으며 고고한 사부를 닮아 무리를 짓는 걸 싫어한다.
그러나 비검대회를 마친 다음 날 새벽의 대화로 둘은 서로에게 친근한 마음이 생겼고 매일 폭포에서 만나 검을 맞대며 우정을 두텁게 다졌다.
'비검대회 전이었다면 둘만 죽는 게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겠지.'
예전엔 화무룡을 질투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쌓으며 말끔히 사라졌다. 화무룡도 나름대로 불행을 느끼는 부분이 있고, 자신에게도 화무룡이 부러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음을 안 덕분이다.
"비검대회에서 네 우승을 뺏고 강호행 기회도 뺏었는데 밉지 않으냐?"
"비검대회 우승자라는 허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초식을 펼친 것도 사실이고요. 성장이 끝난 저와 달리 화무룡의 몸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실전이었다면 네가 살고 화무룡이 죽어야 했다. 그런데 초민향의 개입으로 네가 죽고 화무룡이 살았다. 이래도 안 억울해?"
"그날 실전이었다면 초민향이 개입하기 전에 화무룡이 죽었을 겁니다."
노혼은 무룡의 단단한 얼굴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똥오줌 받아 가며 키운 이 제자는 자신의 답답한 부분들만 꼭 빼닮았다. 그게 싫으면서도 또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
"사부의 엄명이다. 이 일은 전적으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분명히 어딘가에 우릴 감시하는 눈을 붙일 거니까 함부로 행동해 화를 자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제자 그 정도 분별력은 있습니다."
"그럼 어서 유모를 나무에 매달아 피를 최대한 빼고 가죽을 벗겨라. 빨리 훈제해서 움에 저장하지 않으면 개미와 파리한테 다 뺏긴다."
"사부, 유모를 먹을 겁니까?"
"분별력이 있다면서? 살았을 땐 가족이지만 죽으면 그저 고기와 가죽이다."
무룡은 죽은 암소를 나무에 거꾸로 매단 후 여기저기 칼집을 내서 피를 최대한 뺐다.
"고기를 최대한 얇게 썰어야 한다. 두께도 일정해야 하고."
무룡은 모든 정신을 고기를 써는 칼에 모았다.
- 작가의말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소를 죽인 건 깔깔 유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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