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강호
화무룡과 무룡은 매일 밤 폭포에서 만나 대화했다.
짧은 평생을 화산에서만 보낸 둘에게 얘깃거리라곤 검밖에 없었다. 큰 틀을 만든 후 안에 세세한 부분을 채우는 화무룡과 지엽적인 부분을 통해 전체를 더듬는 무룡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당분간 못 보겠구나."
화무룡이 아쉬운 말투로 작별을 입에 올렸다.
드디어 강호행의 시간이다. 장문인 부부는 물론 은퇴한 장로들까지 대거 참여한 이번 강호행은 화산의 정기 행사 중 하나다.
최근 강호의 정세가 불안하고 황실에도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인원을 평소보다 배로 늘린 것.
예전의 강호행보다 방문할 문파나 세가가 세 배나 된다는 것.
이 둘만 빼면 특별한 부분이 없다.
"네 행보에 무운이 깃들길. 내일 배웅하러 안 간다."
무룡과 작별하고 방으로 돌아간 화무룡은 기대로 두근거리는 심장과 미지에 대한 걱정으로 숭숭한 마음 때문에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행히 출발은 점심 이후였다. 동화산과 삼십 리 떨어진 화음현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에 출발해 삼백 리 떨어진 장안으로 간다.
장안에서 화산파와 친분이 두터운 인사들을 만나 교분을 나누며 며칠을 보낸 후 배를 타고 정식 강호행을 시작한다.
태어나서 화산을 처음 벗어난 화무룡에겐 화음현마저 별천지였고 장안에 도착한 후엔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높은 성벽과 엄정한 기세의 병사들. 크고 무거워서 저러다 무너지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 황궁. 말 여덟 필이 끄는 화려한 마차.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엉덩이와 허리를 요란하게 흔들며 걷는 처자들.
"누추한 곳에 모셔서 참으로 송구합니다."
화무룡은 절대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화산파의 어떤 건물보다 아름답게 지어진 장원은 하나도 누추하지 않았다.
"아룡, 어머니랑 시장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초민향의 말에 화무룡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말을 달리느라 먼지가 쌓인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모자는 장원 밖으로 나갔다.
장안의 시장은 동시장과 서시장으로 나뉜다.
동시장은 주로 사냥꾼이나 농사꾼들이 고기와 가죽 그리고 곡식이나 채소를 들고 와서 사고 파는곳이다. 서시장은 필묵과 노리개를 비롯해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는 사람을 상대로 장사했다.
모자의 목적지는 당연히 서시장이었다. 동서남북으로 반듯하게 닦인 길 덕분에 전혀 헤매지 않고 찾은 서시장에선 코가 크고 눈알이 파란 자들이 어설픈 중원 말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초민향은 마음에 드는 노리개 몇 개를 고르고 하얗고 빨간 가루도 조금 샀다.
"아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
화무룡은 눈알이 파란 서역인이 파는 비수가 욕심났다. 흰 날이 완만하게 휜 비수는 무게가 적당하고 자루가 손에 착착 감겼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고 구경도 실컷 한 모자는 다루라는 곳에 가서 차를 마시기도 했다. 쓰기만 한 화산의 차와 달리 다루에서 파는 푸른 빛깔의 차는 끝 맛이 달고 입안에 향이 오래 남았다.
"아들이 어서 성장해 장문인이 돼야 어머니와 아버지도 은퇴하고 장안의 고상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단다."
새 장문인보다 배분이 높은 제자는 당연히 은퇴한다. 무공 수련에 미련이 남은 사람은 장로 직함을 받아 화산에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장안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긴다.
신기한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니 장원에는 벌써 잔칫상이 차려졌다. 수십 명이나 되는 시종과 시녀들이 부엌과 연회청을 들락날락하며 술과 음식을 날랐다.
처음 겪은 화려한 향락 세계에 정신이 혼미해진 화무룡은 장로와 처음 보는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거절치 않고 받아먹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술이 약하구나."
정신을 차리니 강물을 따라 흐르는 배 위였다. 화무룡은 처음 보는 커다란 배에 신기한 마음이 들어서 벌떡 일어나다가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에 입을 틀어막았다.
"무인이 멀미를 해? 어서 운기 하여 속을 다스리지 못할까!"
아버지의 호통에 화무룡은 숨을 깊고 느리게 쉬면서 내공을 돌렸다.
정식으로 심법을 펼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공을 움직이는 것이기에 배가 세게 흔들리는데도 어렵지 않게 해냈다.
메스껍던 속이 안정되고 띵 하던 머리도 시원해졌다. 기운을 계속 돌려 숙취를 해소한 화무룡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불초자식이 곡주에 정신이 홀려 인사가 늦었습니다. 밤새 기체안강하셨습니다."
"강호에 나와 처음 본 사람이 주는 술을 넙죽 받아먹다니. 네 정신머리가 궁금하구나."
"다 아는 분 아니었습니까?"
"처음 본 사람이 아니라 아는 얼굴이 술을 권해도 한 번은 의심해야 하는 게 강호다. 인피면구도 있고 내공으로 얼굴 근육과 뼈를 움직이는 방법도 있고. 특히 방문좌도의 화면공化面功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속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한다."
"명심하고 재범하지 않겠습니다."
화진악은 눈을 감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화무룡. 넌 내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해주는지 궁금하지 않아?"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한 화무룡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간 길든 대로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던졌다.
"마음이 나뉘면 안 된다고 꼭 알아야 할 것만 말씀해주셨잖습니까. 아마 제가 다른 곳에 마음을 나눠도 될 정도로 경지가 올랐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거로 생각합니다."
화진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자다. 요즘 황실이 뒤숭숭하니 강호도 혼잡하게 변하는구나. 우리 화산엔 후계자가 너밖에 없기에 이런 난세에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말씀 명심하고 처신을 바르게 하겠습니다."
화진악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눈을 감고 명상했다. 화무룡은 어머니가 건네는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눈곱도 꼼꼼하게 뗐다.
"멋을 부리는 걸 보니 우리 아들 벌써 장가갈 때가 되었구나."
여염집 자식은 열여섯 이전에 장가를 드는 게 일반적이다. 성현의 말씀을 배우는 선비나 무공을 익히는 무인은 스물을 전후하여 혼인한다.
약관이 지나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둔해진다. 평생 농사나 사냥으로 입에 풀칠할 게 아니라면 약관이 되기 전에 열심히 배우고 수련해야 한다.
배는 강물을 따라 빠르게 흐르다 어느 작은 나루터에 멈췄다.
"천검산장에 관해 아는 만큼 말해 보아라."
화무룡은 화산에 있을 때 외운 지식을 떠올려 정리했다.
"천검산장은 서문세가를 일컫는 말입니다.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문검西門問劍은 십삼 년 전에 혈혈단신으로 황하의 수적 무리를 소탕한 것으로 강호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전대 가주 서문진후가 황실 호위대장으로 지낸 적 있어 관의 세력과도 친분이 깊습니다."
"잘 얘기했다. 관과 무림이 서로 소 닭 보듯 한다지만, 세상에 서로 얽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
화진악이 손으로 수염을 쓸며 말했다.
"관, 군, 무림 모두 강한 힘을 품은 세력이다. 그런 세력끼리 아무 접점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서문세가는 관과 무림에 발을 담근 세가로 강호 활동이 적지만 그 중요성은 절대 작지 않다."
"천검산장을 첫 목적지로 삼은 건 관과 무림이 연루된 어떤 혼란이 있을 거로 추측하기 때문입니까?"
"서문문검의 딸이 재능과 외모를 겸비하고 무공도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좋은 인상을 남기거라."
화진악이 대답하진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은 건 긍정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는 강호행에 참가할 게 아니라 열심히 검을 수련하여 언젠간 닥칠 난세를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어리석구나."
화진악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넌 나도 부인도 안 닮았구나."
"가르침을 청합니다."
"세상에는 무공보다 강한 게 많다. 당장 장안의 황궁에 있는 황제만 해도 닭 모가지 비틀 힘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황제의 한 마디에 백만의 군사가 움직여 나라를 빼앗고 왕을 죽이고 백성을 노예로 만든다."
"무공만으로 난세를 버티기 어렵다는 겁니까?"
"그렇다. 세상은 돈과 이익으로 움직인다. 힘은 돈과 이익을 얻거나 지키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강호행으로 화산의 위세를 과시하고 강한 세력들과 친분을 쌓는 것 역시 무력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그럼 세상에는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겁니까?"
"있지. 늘 있었지. 그러나 강호는 냉정하고 세상도 마찬가지다.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성공했을 땐, 그 사람의 신념이 대단한 게 아니라 가진바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대화하는 사이 모든 화산 제자와 장로들이 내리고 화진악 부자만 남았다.
"가장 마지막에 내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안 내리면 누구도 출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거다. 이런 방식으로 누가 화산파의 일인자이고 누가 실질적으로 화산을 이끄는 사람인지 알려주는 거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수염이 허연 장로들부터 태양혈이 불거지고 팔다리에 힘이 넘치는 장년 제자들까지 모두 화진악이 배에서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강호행에 너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거다. 듣기 싫은 말도 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도 있겠지. 그러나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보고 듣고 느낀 걸 뼈에 새겨야 한다."
"저는 그저 검을 익히고 싶습니다. 장문인 자리에 관심 없습니다."
갑자기 거세게 인 반항심으로 화무룡은 속마음을 불쑥 말해버렸다.
"넌 장문인이 되지 못하면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다. 화씨 가문이 수백 년 동안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지키며 깨끗하게만 살았을 것 같으냐? 장문인 자리에서 쫓겨나는 순간 우리 화씨 가문은 방계까지 모조리 몰살당할 것이다."
화창하던 강호행에 짙은 먹구름이 꼈다.
- 작가의말
아들은 수학여행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대기업 신입 연수를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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