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현일선
공원파의 사용으로 무룡은 이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무룡의 원래 계획은 이러했다. 벽력문의 전신뢰를 얻어 자하구를 견제하고, 검룡을 품어 자하구와 짝을 맺어준다.
이 간단한 계획은 실상 위험천만하여 무룡의 죽음은 거의 확실시되고 검룡과 자하구가 맺어질 가능성도 아주 낮다.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무룡은 자하구를 품었던 나무를 찾아 열매를 얻었다. 열매는 자하구와 검룡 사이에 인연을 맺어주는 역할을 맡았고, 꽤 잘 해냈다.
그러나 자하구와 검룡이 짝이 되어 함께 승천한다고 해도 무룡은 살기 어렵다. 검룡의 짝이 된 자하구는 떠날 때 모든 독을 버릴 것이고, 그 독은 무룡이 감당해야 한다.
무룡이 감당하지 못하면 자하괴독과 이룡의 독은 세상에 풀어질 것이고, 섞이면서 더 강해진 두 독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강력한 피독주가 하나 필요하고, 정혈단과 환생환도 필수다.
피독주는 전신뢰와 함께 독을 견제하고 제압하는 용도, 정혈단은 무룡의 몸을 수없이 되살린다. 환생환은 무룡의 원영을 독에서 지켜주는 역할이다.
사실 무룡의 생각대로 진행되더라도 생존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무룡의 저항이 강할수록 세상에 풀려나는 독이 적어지고, 그 독에 추영과 아이가 죽을 가능성이 작아진다.
그런데 일이 초장부터 틀어졌다.
검룡은 무룡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덕분에 열매를 삼킨 다음 자하구와 검룡 사이의 인연의 실이 빠르게 굵어졌다.
인연의 실이 어느 정도 굵어지면 서로 힘껏 당겨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자하구와 검룡은 짝이 되어 함께 무룡을 떠난다.
얼핏 좋은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만큼 무룡이 자신의 생존을 준비할 기간이 줄어드는 문제점이 있다.
다급한 무룡은 가장 가까이 있는 남궁세가의 피독주를 얻기로 했다. 그 피독주가 독고현천의 유물이라는 이유도 있어 다른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피독주를 얻는 과정에 제왕검형의 패왕형에 인연의 실이 끊어지는 바람에 자하구가 폭주했다.
그래도 채 열 개도 안 되는 단어를 질기게 부여잡고 자신이 하려던 일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꼭 필요한 단어 대신 복수라는 화두를 잡은 게 애석하긴 하지만, 그래도 만회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세가 연합이 괴산이노를 데려오는 바람에 그 작은 기회마저 사라졌다.
공원파로 괴산이노를 없애며 모든 기운을 잃은 무룡은 자하구의 난동을 제지할 힘이 없어졌다.
검룡과 피독주 그리고 전신뢰가 원영을 보호하고 중단전과 상단전도 보호한 덕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지를 완전히 잃어 실혼인이 되었다.
"흐압!"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거한이 보기만 해도 무거운 도끼를 들고 뛰어내렸다.
그러나 채 무룡의 몸에 닿기도 전에 거대한 도끼는 물론 사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제를 벗어난 자하구의 독은 무룡의 옷을 다 없애 알몸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검을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녹여 없앴다.
익힌 무공이라곤 검법밖에 없기도 하고, 공원파를 사용한 다음 자하구에게 몸을 뺏기다시피 하여 기운을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는 자를 상대할 무기가 독밖에 없었다.
"괴물이다."
무룡을 죽여 이름을 날리려던 강호 뜨내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강호 전체를 뜨겁게 달군 무룡의 소문을 패배한 정의연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려고 과장해 퍼뜨린 거로 생각한 멍청이들이 무룡을 기습했고, 흔적도 못 남기고 사라졌다.
동시에 무룡도 죽어갔다. 독을 밖으로 내보낼 때마다 몸이 죽어갔고, 혈도에 잔류한 비약의 기운이 몸을 복구했다.
그러나 독은 다시 회수되어 조금도 줄지 않는 반면, 비약의 기운은 쓰는 대로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꼭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는 부류가 있고, 불만 보면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존재가 수두룩하다.
이 두 가지 기질을 동시에 갖춘 멍청이들이 자기 목숨을 버려가며 무룡을 죽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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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전부 소복을 입었다. 항주 본가의 사망자들을 위한 것도 있고, 이틀 전에 숨이 끊어진 대장로를 애도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주변 동료들을 위한 소복이기도 했다.
이들은 오늘 목숨을 버려서 남궁세가를 살려야 한다.
"피 한 방울, 뼈 한 조각 못 남기고 죽는다."
남궁인의 말에 몸을 떠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무언독왕에게 죽으면 삼혼칠백이 사라져서 환생도 못 한다는 소문이 강호에 빠르게 퍼졌다.
강호에서 칼밥 먹는 자라면 일반인보다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 그러나 칼잡이들도 시신이 훼손되거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걸 걱정한다.
시신이 고향의 땅에 온전히 묻혀야 좋게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에 묻히지 못한다고 두려워 마라. 우리는 죽어서 남궁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체념하는 자도 있고 초탈한 듯 웃는 자도 있다. 그리고 검을 잡고 비분강개한 자들도 있었다.
"장로, 저놈들을 먼저 죽여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소주와 양주 분가의 모든 무사가 모여 무언독왕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얼핏 잡아도 수백 명은 되는 구경꾼이 몰렸다.
무언독왕이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자들이 귀한 구경거리를 놓치기 싫어서 모여든 것이다.
자긍심 높은 남궁가의 무사들은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저들은 우리 죽음을 보고 천하에 알릴 눈이고 입이다."
그러니 잘 죽어야 한다.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된다.
"누구 탓도 아니다. 오늘 우리는 죽어야 하기에 죽을 뿐이다. 남궁의 기개에 먹칠하는 놈은 후손들의 지탄을 받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남궁인의 말에 무사들의 기세가 정연해졌다.
"어차피 죽을 건데, 남궁인 장로께서 가주가 되시는 건 어떻습니까?"
"가주를 뵙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모든 무사가 무릎을 꿇으며 남궁인에게 가주의 예를 올렸다.
"좋다. 그러면 오늘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리고 최근 장안 최대의 화제인 무언독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흙탕물에서 며칠 뒹굴고 나온 것처럼 몸도 얼굴도 더러웠다. 칙칙한 눈에서 눈동자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가랑이 사이에 흉측한 물건이 덜렁거리지만, 누구 하나 비웃지 못했다.
알몸을 하고도 너무나 당당했기 때문이다.
남궁인은 검을 뽑은 후 대연검의 기수식을 했다. 대련이 아니기에 굳이 기수식을 할 순 없지만, 죽으러 가는 마당에 진중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창공호연蒼空浩然."
가장 강한 초식은 아니지만, 대연검에서 가장 펼치기 어려운 초식이다. 대연검의 성취를 평가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초식으로, 남궁가 전체에서도 이 초식을 제대로 펼치는 사람이 몇 명 없다.
필사의 각오를 다져서인지 남궁인의 손에서 더없이 완벽한 창공호연 초식이 피어났다.
"엇!"
남궁가 무사들은 물론, 구경꾼들까지 놀라움에 소리를 참지 못했다.
"하하, 내가 안 죽은 게 그리 놀랄 일인가?"
남궁인은 뒤로 물러나며 실소했다. 강호에 대단한 위명을 떨친 고수는 아니지만, 남궁가에서 열 명은 몰라도 스무 명에는 들 자신이 있다.
그런 자신이 아무런 방비 태세도 안 갖춘 자를 공격하고 몸 성히 물러났다고 사람들이 놀라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오기가 치밀었다.
"너는."
무룡의 말은 성격 급한 사람은 속 터져서 죽을 정도로 느렸다.
"살아."
"나를 아시오?"
남궁인이 무룡을 견준 검을 거두며 질문했다.
"좋은 사람."
무룡의 기억에 남은 남궁인은 좋은 사람이었다. 용혈이라는 신분을 이용하려고 접근했을지는 몰라도 무룡을 아끼는 마음은 가식이 아니었다.
무룡의 수련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조언도 종종 건넸다. 가끔 너 같은 아들 있으면 참 좋겠다는 진심 섞인 농담도 던졌었다.
세세한 것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며 여러 번 되새겨봐도 남궁인은 무룡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이다."
무언독왕이 입을 열었다는 놀라움에 숨 쉬는 것조차 잊었던 구경꾼들은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분분히 고개를 쳐들었다.
부리만 빨간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다.
"멍청이야, 서둘러."
까마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법이 쳐졌다.
"이게 무슨?"
진법 안에는 무룡과 남궁인 그리고 천방기사와 묘령의 소녀가 있었다.
"네가 천하를 살렸다."
천방기사가 남궁인의 어깨를 치며 공치사했다.
"무슨 꿍꿍이요?"
"저놈이 이성을 잃었는데 그걸 깨워줄 사람이 너밖에 없었다."
무룡은 소주 남궁가에 복수하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 추영이 와도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다행히 남궁인이 있었다. 소주 남궁가와 연관이 있고 무룡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사람. 무룡에게 소주 남궁가 빼고 다른 생각을 떠올릴 여지를 만들 유일한 사람.
남궁인은 존재 차제만으로 소중했다.
"추영?"
무룡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아빠, 나 추향秋香이야."
무룡이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부끄러운 부위를 가린 채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소녀를 주시했다.
"아빠, 나 믿지?"
무룡의 고개가 달팽이가 한숨을 쉴 정도로 느리게 끄덕여졌다.
"이거 먹어."
추향은 무룡이 작게 벌린 입에 수십 개 알약을 밀어 넣었다. 일부는 극양의 기운을 품은 영약이어서 무룡의 혈도들에 순양에 가까운 기운을 공급했다.
기운이 생기자 순양공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벽파공의 도움을 받은 순양공은 극양에 가까운 기운을 빠르게 순양으로 바꿨다.
기운이 어느 정도 모이자 면면불식의 호흡이 회복되었다. 주변의 기운이 격렬하게 무룡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빠, 이건 멸화장이야. 단전 대신 암혈을 공격할 거야. 저항하면 안 돼."
무룡의 고개가 아까보다는 조금 빠르게 끄덕여졌다.
"실패하면 아빠를 죽일 거야. 이해하지?"
어차피 이대로는 얼마 못 버티고 죽을 목숨이다. 무룡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얼굴이 말을 안 들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은 소녀가 두 팔을 복잡하게 흔들었다. 무룡은 소녀의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목란을 떠올렸다.
"저항하지 마."
노파심이 일었는지 천방기사가 간곡하게 말했다. 동시에 자신을 추향이라고 소개한 소녀가 멸화장을 펼쳤다.
"사부, 빨리."
무룡에게 멸화장을 펼친 소녀는 뒤로 물러나며 해독단을 연신 삼켰다. 멸화장이 격공장이긴 한데, 단전이 아닌 암혈을 노리려면 무룡의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항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독이 몰려왔다.
"아우, 빨리 정신 차려서 저 독을 회수해야 한다. 아니면 네 딸이 죽어."
무룡의 눈이 순식간에 총기를 회복했다.
억지로 멈췄던 마환기공과 순양공 그리고 벽파공을 운기했다.
'암혈이 봉인되었다.'
극성에 달한 멸화장의 효과다. 멸화장은 단전의 내공을 흩어서 뭉치지 못하게 하는 거로 상대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하는 장법이다.
경지가 높고 내공이 많은 상대한테도 효과를 보여 고수들도 경계하는 무공이다.
그러나 극성에 달하면 내공을 흩어버리는 대신 단전과 주변 혈도의 연결을 끊어 봉인하는 효과를 보인다.
소녀의 멸화장은 독룡담을 무룡의 몸과 분리하여 봉인해 버렸다.
'해볼 만하다.'
무룡의 몸에도 독이 조금 남았다. 격이 높은 독이어서 양과 상관없이 치명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룡은 대처할 방법이 있다.
무룡은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잡았다. 소녀의 몸에서 날뛰던 독이 무룡에게 순식간에 빨려갔다.
"쯧. 자기 안위부터 챙길 것이지."
천방기사가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무룡을 책망했다. 먼저 자기 몸을 수습하고 소녀의 몸에 있는 독을 회수하는 게 안전한 방법이다.
아직 자기 독도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 밖에서 독을 들이는 건 절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마음이 편해야 잘 싸울 수 있는 거야. 사부."
소녀가 사부를 나무랐다.
속에 걸리는 게 있으면 집중할 수 없다. 무룡이 소녀의 독부터 해결한 건 언뜻 무모한 짓으로 보이지만, 사실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끼어들 틈을 못 찾아 침묵하던 남궁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린 세상을 구했어. 그런데 밖으론 다르게 얘기해야 할 거야."
"가르침을 주십시오."
"남궁인이 천방기사의 도움을 받아 무언독왕을 죽였어. 무언독왕은 죽을 때 자기 독에 녹아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어."
항주 본가를 잃는 바람에 남궁세가는 풍전등화의 처지다. 이럴 때 무언독왕을 죽였다는 허명은 정말 쓸모가 크다.
"양심에 걸릴 것도 없어. 무언독왕이 살아있다고 하면 계속 추격에 시달릴 테니까. 당신도 좋고 우리도 좋은 일이야."
"부끄럽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무언독왕의 정체는 모르는 거야."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남궁인은 몸이 살짝 떨렸다.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내공도 그렇고 무공도 그렇고. 내가 쳐다보기도 아득한 수준이다.'
- 작가의말
命懸一線
목숨이 실 한 가닥에 달리다. 그러니까 높은 곳에 매달렸는데 잡은 게 가는 실 한 가닥이란 뜻입니다. 옛날 실은 또 별로 질기지도 않았죠.
글 진행이 아닌 사이트 접속으로 스트레스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렵게 VPN 연결해서 접속해도 페이지가 안 열리는 등, 문제가 많습니다.
이 글은 일단 1부 마감한 후 쉬겠습니다. 스토리는 이미 2부 중반까지 짜 놨으니 전개가 막힌 건 아닙니다. 사이트 접속이 원활하지 않고 페이지 넘어갈 때 동그라미가 뱅뱅 도니 스트레스를 받아 글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가끔 글을 올리면 페이지가 하얗게 변해 아무 반응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론 대충 마무리할 것 같아서 1부 완결 후 당분간 쉬기로 했습니다. 2부는 사이트 접속이 해결되면 이어서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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