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풍파
화무룡이 서신을 적어 신분을 보장한 덕에 순조롭게 장안까지 도착했다.
"황동 주전자요? 불에 쉽게 그슬려 외관이 좋지 않을 텐데요."
무룡은 장안 근처의 야장 마을로 가서 통 크게 주문했다. 황동으로 만든 주전자 다섯 개와 길이 오 척이 되는 스무 근짜리 흑철검을 의뢰했다.
검의 가격만 은자 서른 냥이기에 야장은 상대가 부자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만들기도 어려운 황동 주전자 대신 철이나 은을 선택할 것을 종용했다.
"황동이어야 하오. 크기도 내가 말한 것에서 한 치도 차이가 나면 안 되오."
검만 해도 이문이 톡톡히 남기에 야장은 실랑이를 그만두고 주문을 받았다.
"황동에서 잡기를 빼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약 보름 뒤에 오시면 검은 반드시 준비되고 주전자도 얼추 비슷할 겁니다."
"물건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만들어야 할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정의 대장군들이 쓰는 팔 척 장군검도 다 우리가 만듭니다. 조금 느릴진 몰라도 물건은 마음에 꼭 드실 겁니다."
무룡은 고민 끝에 화산으로 가보기로 했다. 꽤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긴 했지만, 굳이 따지면 화산에서 십일 년을 보냈고 자하동에서 삼 년을 보냈고 추영과 천노에게 감금되어 이년 반을 보냈다.
짧은 도주 생활이 있고 천애고도에서 일 년에 못 미치는 시간을 보냈고 마교에 가서는 대부분 시간을 독무곡에서 보냈다.
우여곡절이 꽤 있은 데 비해 강호 경험은 턱없이 부족해 보름 동안 뭘 하고 지내야 할지 괜찮은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가까이에 장안이 있긴 하지만, 생소한 곳에서 보름이나 보내자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깊은 고민 끝에 화산으로 가기로 한 무룡은 무형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가루를 칠해 볼을 조금 홀쭉하게 만들고 광대는 더 튀어나오게 했다. 그리고 어두운 가루를 미간에 살짝 바르니 자주 얼굴을 맞댄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일곱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 화산에 도착하니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부 시신은 거기 모셨겠지?'
달포 뒤면 노혼의 기일이다.
추영과 천노에게 감금되었을 때도 노혼의 기일에는 먹지 않는 거로 제사를 대신했다. 풀려난 뒤엔 간단히 향을 피우고 화산이 있는 곳으로 절을 했다.
이번엔 어떻게든 직접 무덤을 찾아 절을 올리고 제사도 제대로 치를 작정이다.
화산 제자들이 청명마다 풀을 베고 새 흙을 퍼 올리던 곳을 찾았다. 강호로 나갔다가 불행하게 객사한 사람들도 빈 무덤을 만드는 게 화산의 전통이다.
무룡은 화산의 공동묘지에서 노혼의 무덤을 찾으려 했다.
'어떻게? 화산이 어떻게!'
공동묘지엔 화진악과 초민향을 비롯해 백 개가 넘은 새 무덤이 생겼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노혼의 이름이 적힌 비석은 없었다.
'그래. 사부를 죽인 건 후문영이지만, 지시를 내린 자도 흉수이고 화산도 방조자다.'
살심이 일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대제자를 죽이고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악몽이 끊이지 않았고 심장 근처를 누군가가 손으로 누르는 듯했고 명치에 무거운 돌덩이를 단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무수한 채찍질을 한 가류를 죽이고도 미안함을 느껴 독무곡을 더 낫게 만드는 거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씻으려 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단전을 잃었을 때도, 독무곡에 버려졌을 때도, 추영의 자해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가류의 영문 없는 채찍질에 커다란 고통을 느낄 때도 증오의 마음을 크게 품진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을 찾고 그걸 위해 인내하고 노력했을 뿐, 누구를 미워하는 거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사부를 직접 죽인 후문영을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지만, 후문영이라는 인간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부를 죽인 흉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화산은 내 사문이 아닌 원수다. 내 사부이자 아버지를 죽인 흉수의 방조자다.'
화진악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린 제자들이 죽지 않았을 거고, 노혼이 나서서 목숨을 잃을 일도 없었다.
물론, 화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화무룡의 가출로 화진악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무룡은 체질이 자하신공과 맞지 않아 태청심법을 익혔다. 화진악은 어떻게든 살아서 손주가 자하신공을 익히는 걸 도와야 하고, 화무룡에게 미처 말해주지 못한 가문의 비밀도 꼭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화진악의 사정이고, 무룡이 거기까지 고려하여 화진악의 입장을 배려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 죽이는 건 아니다. 무고한 제자들도 있다.'
무룡은 노혼의 죽음에 관계된 자들을 모두 죽이고, 노혼이 화산의 공동묘지에 못 묻히게 한 자들도 모두 죽이기로 했다.
그렇게 자신을 위한 복수를 끝낸 다음, 화산을 바로잡아 노혼을 위한 복수를 하기로 했다.
다섯 가문의 권력 암투에 진절머리가 나서 일부러 눈과 귀를 닫고 살았던 노혼이다. 화산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지만,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외면해야 했다.
노혼이 사랑한 화산을 정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복수를 완성하기로 단단히 다짐했다.
옥녀봉 서남쪽의 공동묘지를 떠난 무룡은 조양봉으로 갔다. 사부의 묘지가 없으니 함께 살던 모옥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작정이다.
"제자야. 고집 그만 부리고 옥허심법玉虛心法을 익히거라."
"계속 그러면 나 사부 제자 안 합니다."
무룡과 노혼이 살던 조양봉의 모옥에는 새 주인이 생겼다.
사부로 보이는 자는 얼굴이 청수하고 몸 선이 부드러웠다. 얼핏 보면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백면서생으로 보이지만, 자세가 무척 안정적이고 몸에 자연스러운 기세가 흘러 꽤 고수로 보였다.
제자로 보이는 소년은 무룡보다는 못해도 평범하지 않은 덩치였다. 어깨가 넓고 가슴이 두꺼워 힘깨나 쓰게 생겼다. 기둥 같은 두 다리로 단단히 뿌리를 내린 채 손에 든 죽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어허, 이 기사멸조를 지나가는 동네에서 마주친 똥개처럼 생각하는 불손한 놈 같으니라고."
"그 똥개가 저기 옥녀봉에 있는 머저리들보다 백 배는 낫습니다."
떠난 지 꽤 되었지만, 근처의 지형은 여전히 손바닥처럼 환하다. 무룡은 큰 나무에 몸을 숨기고 사부와 제자로 보이는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니. 네가 무슨 불세출의 천재라고 그날 사부가 마교 장로와 싸울 때 펼친 초식만 보고 벽파검법을 복원한다는 말이냐. 게다가 넌 벽파심법도 모르잖느냐."
"흥. 난 화산의 벽파검이 아니라 사조의 벽파검법을 익히려는 겁니다. 그러니 화산의 벽파심법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초식에 따라 내가 심법을 만들 겁니다."
'누구지?'
무룡보다 한 배분 낮은 이십사 대 제자라면 노혼을 사조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노혼을 사부라고 부르는 이립을 넘은 장년은 얼굴이 조금 익긴 한데 누군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새로운 기척이 들렸다. 전신 혈도에 내공을 품은 무룡은 굳이 운기하지 않아도 눈과 귀와 코 모두 대부분 사람보다 예민하고 원체 정교하던 손놀림도 더 정밀해졌다.
책만 보고 처음 펼친 금침회혼법에 성공한 것도 비약을 먹고 커다란 내공을 몸에 품으며 감각이 예민해진 덕분이다.
사부로 보이는 장년이 무룡보다 열 호흡 정도 늦게 방문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약관을 몇 년 앞둔 것 같은 소년은 상대가 시야에 드러나고서야 발견했다.
"저 개새끼들이."
소년이 손에 든 목검을 휘휘 휘두르며 욕을 뱉었다.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오늘도 교류 차원에서 계혼 사제와 비검하러 왔습니다."
"청웅 사제의 제자들이군. 머리가 나쁜지 호칭이 늘 틀리는 걸 보니 검으로 머리를 쪼개 두부라도 좀 넣어줘야 할 것 같네."
"예전엔 청우 사숙이 사형이었지만, 지금은 저희 사부가 화산파의 대사형입니다. 당연히 사백이 아닌 사숙으로 칭해야죠."
"화산의 대사형은 화무룡이야. 정의연 소맹주 화무룡. 설마, 조씨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오줌싸개 청웅 사제가 화무룡의 자리를 넘보는 건 아니겠지?"
무룡은 그제야 기억났다. 이름에 청자가 들어간 제자는 모두 고아 출신이거나 돈에 팔려 온 아이들이다.
화산이 돈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자질이 괜찮은 아이들로 고를 것이고, 청우는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자였다.
그리고 청웅은 무룡보다 무려 열 살이 많은 제자다. 무룡의 나이가 두 살 많게 알려졌으니 실질적으론 열두 살 차이가 난다.
제자 중에서 덩치가 가장 컸던 청웅은 빠르게 성장하는 무룡을 경계하여 자주 도발해 구타했다.
'그놈 덕분에 벽파검법을 깨우쳤지.'
심약했던 무룡이 살인 검법인 벽파검에 제대로 입문한 계기가 청웅이었다. 청웅의 도를 넘은 괴롭힘에 악이 받친 무룡이 물과 기름처럼 겉돌던 벽파검법을 몸에 새길 수 있었다.
'내가 청웅을 이기고 돌아온 날 사부께서 술을 두 단지나 마셨지.'
노혼을 떠올리자 또 코끝이 찡했다.
"와라. 화산제일검의 독문절기 벽파검법이다."
"큭. 그럼 노계혼 사제의 절세검법을 한 번 받아 보겠다."
반전은 없었다. 비검이 아닌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한 청웅의 제자들은 죽검으로 노계혼을 흠씬 두들겨 팼다.
노계혼의 힘이 훨씬 강하지만, 제대로 된 초식을 익히지 못해 검을 휘두름에 있어 군더더기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상대는 적게나마 내공을 품은 덕분에 검을 연속으로 휘두르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심법을 아예 안 익힌 노계혼은 검을 휘두르다 자주 호흡이 끊겨 상대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다.
같은 배분의 제자들끼리 죽검으로 하는 비무여서 청우도 전혀 개입하지 못하고 제자가 몰매를 맞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다행히 공격은 형편없어도 얻어맞는 건 이골이 나서 뼈나 근육을 다치는 중한 상처는 입지 않았다.
노계혼을 실컷 팬 청웅의 제자들이 의기양양해 청우한테 인사를 올리고 옥녀봉으로 돌아갔다.
"이 모자란 놈. 옥허심법을 익혀서 내공을 쌓으면 이길 수 있잖아."
"사부. 이 노계혼은 벽파검법만 익히고 화산의 다른 무공은 일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럼 이름이라도 바꿔. 사부의 의기를 잇겠다는 놈이 맨날 처맞고서야 되겠느냐? 내 사부 얼굴에 먹칠할 생각이 아니라면 노계혼이라는 이름부터 고쳐라."
노계혼魯繼混. 노혼의 계승자.
무룡은 더는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들은 누구시오?"
"화산의 땅에 와서 화산 제자한테 누구냐니? 너무 방자한 것 아니오?"
얼굴을 변장한 무룡을 손청우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사부. 우린 화산 제자가 아닙니다. 화산은 이미 죽었습니다."
노계혼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내가 누구냐고?"
무룡은 터벅터벅 걸어가 죽검 중 가장 긴 놈으로 들었다.
"내가 누군지 잘 봐라."
벽파연연, 만경벽파, 추도작랑, 경풍노도, 노도박안, 암도흉용, 도도부절.
벽파검법의 초식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 작가의말
노혼이 마교 장로들과 싸울 때 등장했던 손청우입니다. 노계혼은 마교 무사의 손에 잡혀 악을 바락바락 쓰던 그 소년입니다.
출연료를 자진 삭감한 덕분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자본주의식 승리의 한 형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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