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신공
밤 벌레도 졸음을 못 이겨 잠든 야심한 시각. 왕유재는 몰래 서재로 향했다.
서재 문을 안에서 잠근 왕유재는 내공을 이문혈과 청궁혈 그리고 청회혈에 보내 순환하게 한 후 한 가닥 더 뽑아서 예풍혈로 보냈다.
귀가 예민해지며 온갖 소리가 들렸다. 의심스러운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왕유재는 내공으로 서고의 책장을 힘껏 밀었다.
작은 마찰음만 내며 느리게 밀린 책장 밑에는 큼직한 구멍이 있었다. 구멍으로 들어간 왕유재는 미리 설치한 기관을 돌렸다. 책장이 느리게 원래 위치로 복귀했다.
은폐를 끝낸 왕유재는 좁은 길을 따라 허리를 숙이고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반 각에 가까운 시간을 걸으니 빗장이 걸린 문 하나 나타났다.
왕유재는 빗장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왕 가주, 오늘은 왜 이리 늦은 거요?"
조형래가 말했다. 조씨 가문의 가주로 욕심이 적은 사람이다. 이 자리로 꼬박꼬박 나오는 건 장문인 자리를 욕심내는 게 아니라 그저 화진악이 싫기 때문이다.
"화진악이 심은 간세가 누군지 찾지 못했소.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
다른 세 가문은 화진악이 보낸 간세의 신분을 확인했는데 왕유재만 꼬리를 잡지 못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 그 여우가 간세를 고작 하나만 보냈다는 보장도 없잖소."
악명청이 말했다. 악씨 가문의 가주로 전대 대사형이다. 장문인 자리를 이제자인 화진악이 차지한 것과 연모하던 초민향을 뺏긴 일 때문에 누구보다 화진악에게 이를 가는 사람이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구결부터 공개합시다."
주만통이 말했다. 주만통 역시 장문인 자리엔 별 관심이 없고 자하신공을 익히려는 욕심 때문에 나온 것이다.
넷은 동시에 자하신공의 구결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오늘은 백팔십한 번째 글자부터 이백 번째 글자까지 대조하는 날이다.
"다른 글자가 세 개나 되는군."
스무 글자 중에서 열입곱 개는 동일했다. 그러나 세 글자는 네 가문 모두 달랐다.
"도대체 자하신공의 구결이 얼마나 어렵길래 같은 비급을 보고도 이렇게 다르게 암기할 수 있단 말이오?"
약 백 년 전에 화씨 가문의 힘이 아주 약해졌을 때 네 가문이 연합하여 겁박했다. 화씨 가문은 장문인 자리를 보전하는 대신 자하동의 문을 열어 네 가문에게 자하신공 비급을 보여주기로 했다.
당시 네 가문은 머리가 가장 총명한 자를 들여보내 비급을 암기하게 했다.
그런데 사흘이나 자하동에 있었던 자들이 나와서 적은 구결로 누구도 자하신공을 익혀내지 못했다.
네 가문이 자하신공을 익히는 데 몰두하는 사이 화씨 가문이 방계를 포용하여 세력을 크게 키웠다. 뒤늦게 판세가 뒤집힌 걸 발견한 네 가문이 힘을 합쳤고, 화씨 가문과 백 년에 가깝게 서로 견제하고 있다.
'조형래의 글자만 참조할 가치가 있다.'
왕유재는 가문에 전해지는 비급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절대 말이 안 되는 세 글자를 일부러 다른 글자로 바꿨다.
그리고 그건 악명청이나 주만통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자를 무턱대고 바꾸진 않았을 테니 바뀐 글자로 원래 글자를 유추한 후 다시 그 글자를 토대로 자하신공 구결을 알아내야 한다.
눈알만 돌려 확인하니 악명청과 주만통이 조형래의 구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조형래가 셋의 구결을 번갈아 보는 걸 확인한 왕유재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소리가 같은 글자, 모양이 비슷한 글자, 같은 의미로 통용되는 글자.'
왕유재가 머리를 빠개질 정도로 굴렸으나 신통한 글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의미 없소."
악명청이 자기가 갖고 온 종이를 북북 찢으며 말했다.
"앞부분이야 비슷한 글자가 많아서 이렇게 찾아낸다고 쳐도 뒷부분은 어떻게 할 거요? 글자 수가 다르고 아예 구결 자체가 다른데."
"자하동의 문을 여는 방법은 화씨 가문만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소?"
주만통이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자하동에 극독이 있다는 게 사실일까?"
왕유재가 중얼거렸다.
"사실일 거요. 내가 알기론 화진악도 자하동에 들어간 적 없소."
백 년 전에 자하동으로 들어가 자하신공 비급을 외운 네 가문의 사람 모두 밖으로 나와서 사흘 후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안 되기에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구결을 적는 데 몰두했기에 누군가가 하독했다고 여기긴 어렵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비밀 하나 털어놓겠소."
조형래가 말했다.
"우리 가문의 조상께선 죽기 전에 자하신공 비급에 관한 얘기도 조금 적어두었소."
남은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조형래의 말을 기다렸다.
"컴컴한 동굴인데 특정 시각에 빛이 들어오면 벽에 글자가 나타나오. 빛이 사라지면 글자도 사라지기에 사흘 동안 실질적으로 구결을 확인한 시간은 무척 짧다고 했소."
그제야 왕유재는 장문인 자리에도 자하신공에도 욕심이 없는 조형래가 왜 여기에 참석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조 가주께서 깊은 뜻이 있는 듯하오."
왕유재의 말에 조형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까지 여러분이 자하신공을 익히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기다렸소. 오늘 드디어 악 가주가 인정했으니 내 생각을 밝힐 때가 된 것 같소."
"얘기해 보시오."
"반란이오."
네 가문이 오랜 세월 공을 들여 판 밀실에 정적만 맴돌았다.
"자세히 얘기하시오."
"화진악과 화무룡을 죽이고 노혼을 장문인으로 추대하오. 난 화씨 가문의 전답을 원하오."
"난 자하신공 비급을 원하오."
주만통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밝힘으로써 반란에 동참할 것을 암시했다.
"난 다음 장문인 자리를 내 아들이 차지했으면 하오."
악명청 역시 자하신공에 걸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자 반란밖에 남은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거 참. 나한테 차려진 몫은 없구먼."
왕유재가 말했다.
"화씨 방계가 차지한 장안의 장원과 주루를 모두 왕 가주 앞으로 돌리지."
조형래가 고민도 없이 바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꿍꿍이를 품었던 듯하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악명청이 아닌 조형래였구나.'
속으론 한껏 경계하면서도 겉으로는 기쁜 기색을 꾸몄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오."
조형래의 주도하에 네 가주는 어떻게 화진악과 화무룡을 죽이고 화산을 장악할지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갔다.
"내일 노혼을 찾아가서 설득하는 게 급선무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간 네 가주 모두 자지 못했다. 흥분과 기대, 초조와 불안, 불신과 욕망이 마구 뒤섞여 마음도 머리도 복잡한 탓이었다.
"다들 일찍 깨셨군."
날이 밝기 무섭게 의관을 정제하고 각자 출발해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노혼이 넘어오면 화산에 남은 장로들 차례요. 찬밥 신세니 우리 제안을 마다하진 않을 거요."
은퇴할 때 화산에 남은 장로는 뒷배가 부족하고 무공도 별로인 제자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자들은 이번에 화진악의 강호행에 동참했다.
강호행에도 끼지 못한 장로들은 대우가 형편없어 네 가주의 꼬드김에 넘어올 가능성이 크다.
넷은 보는 사람이 없나 조심하며 자하동으로 갔다.
자하동에서 약 백 장 거리에 허름한 목옥이 몇 채 있었다. 나무가 썩은 자리에 새 나무판자를 더덕더덕 덧붙인 탓에 외관이 꽤 흉물스러웠다.
"노 사제 계신가?"
그나마 노혼과 자주 얼굴을 보는 조형래가 외쳤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노혼이 밖으로 나왔다. 연공 하는 중이라 기척을 듣고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드시오."
다른 용건이었다면 밖에서 말하고 바로 떠났겠지만, 오늘은 노혼에게 부탁하러 온 거다. 장문인 자리에 앉아달라는 게 부탁이라고 하면 강호인 모두 웃겠지만, 고고하고 담백한 노혼이어서 부탁하고 설득해야 한다.
"좀처럼 손님이 찾지 않는 곳이라 변변치 않소."
노혼은 이파리가 두꺼운 차를 우려 대접에 부어 권했다. 네 가주는 차를 살짝 입에 대는 시늉만 하고 마시지 않았다.
"사형들께서 한꺼번에 웬일이오?"
"노 사제. 자네 제자 무룡이 말이야. 성취가 어디까지 이를 것 같은가?"
"마음이 여려 살초를 잘 펼치지 못하나 근골이 뛰어나서 내공만 받쳐주면 날 능가할 것 같소."
이들의 꿍꿍이를 모르는 노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화무룡하고 비교하면 어떠시오?"
"묻는 의도를 모르겠소."
"화무룡에게 위협이 되는 무룡을 화진악이 지켜만 보고 있을지 걱정되어서 그러오."
노혼이 세상과 한 발 떨어져 산다고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귀가 멀쩡해 오가며 듣는 얘기도 있고, 화진악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안다.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소. 내가 있는 한 화진악은 무룡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오."
네 가주는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노혼은 화진악을 장문이라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호칭했다. 이는 마음속에 화진악에 대한 존경심이 희미하거나 없다는 뜻이다.
"노 사제는 아마 평생 벽파검만 익혔지?"
"제대로 익힌 무공은 벽파검밖에 없소."
노혼은 장안의 고서점에서 주인 없이 뒹구는 무공 서적들을 사들여 공부하고 연구했다. 그러나 그렇게 나뒹구는 무공서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식으로 익힌 무공은 화산파의 벽파검법 뿐이다.
"열 개가 넘은 화산의 검법을 다 배워보고 싶지 않으시오?"
"사형들도 옥녀검이나 자하검법은 모르는 거로 알고 있소."
"태청검법까지 해서 장문인한테만 비급이 전해지는 무공이지. 그래서 익힐 마음이 있는 것이오?"
노혼은 그제야 이들의 방문 목적을 알았다.
"화진악을 끌어내리고 날 허수아비로 앉히겠다는 뜻이오? 나야 어찌 돼도 좋지만, 화진악을 끌어내릴 명분이나 힘은 있으시오?"
"주검은 장문인 자리를 지킬 수 없지."
부스럭 기척이 들렸다.
- 작가의말
시대 배경이 가상입니다. 명, 송, 당 등 시대의 특징을 적당히 결합했습니다. 그리고 자하신공은 김용 선생님이 자세한 설정은 안 했기에 과감히 건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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