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무우
도덕경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대방무우大方無隅
큰 네모에는 귀퉁이가 없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더디 찬다.
대음희성大音希聲
큰 소리는 안 들린다.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모양은 형체가 없다.
노혼은 아주 확실하지는 않지만, 노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무한의 세계에서 네모는 결국 원이다. 큰 그릇은 하나만 담을 수 없기에 채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큰 소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귀에 들리지 않는다. 너무 크면 모양은 의미가 없다.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은 너무 거대하여 노혼이 배운 글자와 문장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고, 그 깨달음을 반 톨이라도 전할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심장이라도 무룡에게 뽑아주겠지만, 자하신공 구 단계의 깨달음은 획 하나도 알려줄 수 없다.
온몸이 뜨거워지며 눈에선 눈물이, 코에선 콧물이, 입에선 침이 줄줄 흘렀다. 알몸으로 지내지 않으려고 기껏 준비한 가죽 바지가 똥오줌으로 더럽혀졌다.
자하신공을 수련하며 점점 탱탱해지는 피부와 달리 흰색이 늘던 머리가 쑥쑥 뽑혔다.
몸이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다.
벽파공으로 모은 내공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었다. 양이 넷이고 음이 여섯이던 공력이 수련이 깊어지며 양의 성질이 점점 강해지더니 이젠 양이 아홉이고 음이 하나인 내공이 되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무룡에겐 찰나로, 직접 겪은 노혼에겐 영원으로 느껴진 시간이 끝났다. 육체는 다시 노혼의 통제에 들어왔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이고 기는 벌써 필요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정기신이 하나처럼 움직이고 심지체의 구분이 사라졌다.
'부질없구나.'
노혼은 복수를 포기하기로 했다. 왠지 화진악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도 화진악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화진악에게 편지를 남기고 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보고 싶구나.'
아는 게 적어서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덮친 깨달음은 노혼이 뭘 모르는지 한가득 알려줬다. 그것들을 빨리 알아내지 않으면 은혜롭게 찾아온 깨달음이 성질을 부려 떠날 것 같았다.
"무룡아. 이만 떠나자."
"아버지. 여긴 우리 집입니다. 어딜 간다는 말씀입니까?"
비록 자하신공의 구 단계를 완성했지만, 깨달음이 명확하지 않아 삼화취정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 그러나 대성에 이른 자하신공의 위력이 만만치 않아 예전엔 엄두도 못 내던 일을 쉽게 성사시켰다.
노혼은 공력을 십 성 움직여 무룡의 몸에서 독을 쫓아냈다.
환각이 사라지자 무룡이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환각을 느끼는 사이 아버지라도 있어서 행복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여전히 천애고아였다.
"아들. 아버지와 함께 강호를 유람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대협객이 되자꾸나."
노혼의 다정한 말투에 무룡이 더 통곡했다. 사부의 말이 너무 기뻤고, 기뻐서 슬펐다. 노혼 역시 온갖 달고 쓰고 짜고 신 맛이 느껴져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만 떠나자꾸나. 대신 떠나기 전에 보여줄 게 있다."
노혼은 자하신공 일 단계의 방식으로 운기 했다. 벽에 수십 개 글자가 나타났다. 이 단계로 바꾸자 글자가 바뀌고 숫자는 늘었다. 그렇게 계속 단계를 높여가니 글자가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구 단계 방식으로 운기 하니 글자가 여덟 개만 남았다.
대공고성大功告成
대공을 이루었으니
호령천하號令天下
천하를 호령하라.
크고 밝은 글자에 마력이 깃든 듯 보고 있노라면 호연지기가 치솟았다.
"천하를 돌며 견문을 넓히고 무공을 수련한다. 내 비록 자하신공을 대성했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구만리다. 그리고 너도 어서 벽파공을 대성하고 걸음마를 떼야지 않겠느냐."
둘은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자하동을 떠났다.
밖에 나간 둘은 가장 먼저 남은 자하단을 단지에 밀봉해 깊이 묻었다.
자하단을 처리한 둘은 가까운 계곡에 몸을 푹 담그고 묵은 때부터 벗겼다. 무룡이야 당연히 때투성이였고 노혼 역시 정기적으로 외출했으나 수련 시간이 아까워 목욕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네가 수련을 열심히 하면 단전이 강해져서 자하신공 일 단계에 성공할 수도 있고, 내가 삼화취정의 경지에 이르면 추궁과혈로 네 단전을 단련할 수 있다. 너는 단전 빼고 모든 부분이 나보다 우월하니 이립이 되기 전에 자하신공을 대성하여 천하에 명성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화진악이 우릴 가만히 둘까요?"
"안 그래도 가서 직접 담판을 하든지 편지를 남기든지 할 생각이다. 내가 자하신공을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로 익힌 걸 알면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무룡은 밀어도 계속 생기는 때가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몸을 문질렀다.
"아들, 아버지가 등 밀어주마."
바닥을 더듬어 표면이 조금 거친 돌을 찾은 노혼이 무룡의 등을 돌로 밀었다. 살짝 따가우면서 엄청 시원한 감각에 무룡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늘 이렇게 돌로 등을 밀어줬다."
"저도 밀어드리겠습니다."
노혼은 손에 든 돌을 무룡에게 넘긴 후 돌아앉았다. 무룡이 돌을 들고 노혼의 등을 살랑살랑 문질렀다.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소심하냐. 빡빡 세게 문질러야지."
무룡은 돌을 든 손에 조금씩 힘을 더했다. 무룡 생각으론 꽤 아플 것 같을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고서야 노혼의 입에서 시원하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까지 깨끗이 씻은 둘은 손으로 문질러 물기를 재빨리 제거한 다음 가죽 바지와 조끼를 입었다. 거기에 신발까지 신으니 무슨 진령의 밀림에 사는 사냥꾼 같은 모습이었다.
"여긴 오는 사람이 없으니 가만히 숨어 있거라. 난 가서 화진악을 만나고 오겠다."
"아버지.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조금 고민하던 노혼이 조양봉을 가리켰다.
"저기에 숨으면 들킬 염려도 없고 정기관도 잘 보일 것이다. 어떠냐?"
노혼이 가리킨 곳에서 정기관까지 직선거리가 일 리는 넘는다. 그러나 그간 내공이 꽤 쌓여 눈에 공력을 집중하면 백 보 밖처럼 또렷이 볼 수 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무룡은 내공이 전혀 없을 때도 가파른 조양봉을 마음껏 올랐다. 이젠 내공까지 생겼으니 그야말로 평지처럼 걸었다.
노혼은 무룡이 눈에 잘 안 띄는 곳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걸 확인한 후 옥녀봉으로 향했다.
'뭐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은밀히 움직여 옥녀봉으로 향하던 노혼이 정상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발걸음을 늦췄다.
'너무 조용하다.'
노혼은 뭐가 이상한지 금세 알아챘다. 화진악이 화산을 자주 비운다곤 하지만, 무룡보다 한 배분 낮은 어린 제자와 그들을 가르칠 교두까지 데리고 나가진 않는다.
음기가 사라지고 양기가 강해지는 오시에 가까운 시각이 다가오는데 그 흔한 기합 소리 하나 안 들리는 건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노혼은 한결 신중하게 움직였다.
정기관에 도착하고 나니 바로 뭐가 문젠지 알았다.
"자, 화진악의 행방을 빨리 불어라. 대답하지 않으면 이 아이는 머리와 몸통이 따로 묻힐 것이다."
열 살 혹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제자의 주검이 여럿 뒹굴고 있었다.
'장로들은 어디 갔지?'
"화진악은 심복들을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목숨이 아까워 도주하는 자가 자기 행방을 알려주겠습니까? 강호에서 칼날 위를 걷는 똑같은 처지인데 숨 쉴 구멍 하나는 남겨줍시다."
약관이 갓 넘은 제자다. 백 명이 넘은 무룡과 같은 배분의 제자 중에서도 꽤 두각을 드러낸 청년이다. 노혼이 원체 무관심한 성격이어서 이름까지 기억하진 못했으나 얼굴과 목소리는 확실히 인상이 있었다.
"그 말을 우리더러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
"어떻게 하면 믿겠습니까?"
"내 칼을 세 번 받고 살아남으면 믿겠다."
"세 칼 받으면 우릴 모두 놔주는 건 어떻습니까?"
"손목 하나씩 두고 간다면 목숨은 살려줄 수 있지."
그때 너무 낮아 음침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혁 장로. 화진악의 행방은 본교의 흥망성쇠와 관계되오. 그러니 감당 못 할 말은 함부로 뱉지 마시오."
"이들은 화진악이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도주한 방향이라도 알아내야 우리도 움직일 수 있소. 그러니 혁 장로는 어서 작은 단서 하나라도 캐내시오."
'어떻게 할까?'
노혼은 전대 장문에게 꽤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화산의 제자여서 화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통이다. 다소 냉담한 성격이긴 하나 화산에 느끼는 정이 얕은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강호에서 감히 화산의 본산에서 큰소리치며 '본교'라고 칭할 단체는 마교밖에 없다.
백가쟁명 시기에 살아남은 건 유가와 법가와 묵가를 비롯해 채 열도 되지 않는다. 그중 유가와 법가를 제외한 유파들은 서서히 몰락하여 변방으로 쫓겨났는데, 묵가를 중심으로 천축의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유파가 되었다.
현재는 법가마저 몰락하고 유가가 독주하는 형세인데, 유가와 상반되는 사상을 펼치는 자들은 마교로 불리며 황실과 강호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큰 반란이 한 번 있고부터 중원은 마교를 견제할 힘을 잃었다. 중원뿐 아니라 서역과도 교역하는 마교는 짧은 기간에 빠르게 강성해져 강호는 물론 황실까지 위협할 정도다.
교도는 수백 만이고 무사만 십만이 넘는데 교주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자가 기수부지다.
"대화산의 제자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냥 죽이거라."
아직 여린 목소리가 힘껏 외쳤다. 두 마교 무사의 손에 팔을 잡힌 채 무릎을 꿇은 어린 제자였다.
비웃음이 터졌고, 마교 무사들의 비웃음이 노혼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난 화산제일검이다.'
- 작가의말
도덕경을 공부했는데 약 30% 정도에서 멈췄습니다. 주해랑 여러 해석을 봐도 더럽게 어렵네요. 그래도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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