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환상구
무룡은 기린산의 비천각 밀실에서 부유도로 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런데 무룡이 알아낸 방법은 시기가 맞물리고 운이 따라줘야 하는 방식이다.
무룡은 독림을 가로지르는 강에서 문서에 적힌 장소를 찾아낸 다음 부유도가 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부유도의 표류 경로는 제멋대로지만, 이 강을 반드시 지난다.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 시간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나 이 장소를 지날 때 평범한 인간의 눈에도 보인다.
추향의 일도 있고 환생환도 되도록 구해야 하기에 무룡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잠도 거부한 채 섬이 어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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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향은 현녀문의 본거지를 찾는 방법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느낄 수 있는 목각 인형을 통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현녀문 제자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목각 인형과 연결이 끊어졌다. 그리고 현녀문 제자들의 흔적도 갑자기 사라졌다.
더 골치가 아픈 건, 목각 인형의 연결이 끊어진 곳과 현녀문 제자들의 흔적이 사라진 곳이 완전히 달랐다.
고민 끝에 추향은 흔적을 계속 찾기보단 목각 인형이 마지막으로 감지된 곳으로 갔다. 자신이 쫓는 흔적보다 목각 인형을 데려간 자들이 본거지로 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여긴 탓이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을 허비하고도 추향은 작은 단서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결국 포기한 추향은 현녀문 제자들이 사라진 곳으로 가서 뭐 없나 살피기로 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작은 흔적을 발견했다.
꼭 현녀문 제자들이 남긴 거라는 보장이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흔적을 따라 강을 거슬렀다.
추향이 향하는 곳엔 무룡이 숨어서 부유도가 나타나길 몇 달째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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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천안은 여전히 고민이 깊었다.
'아직 때가 아니다. 왜지?'
추향과 예두를 함께 잡아서 제단에 올리면 인간은 멸망한다. 그러면 세상은 잠시 혼돈으로 돌아가고, 모든 법칙이 재정립되는 혼돈의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운이 좋아 새로운 법칙이 확립되는 데 개입하기라도 하면 신성을 얻어 사신수처럼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해도 홍균노조처럼 세상을 바꿀 강한 힘을 품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그게 아니어도 새로운 세상에서 지배종이 되어 법칙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조절할 수 있다. 지금처럼 세상의 배척을 받아 수련도 제대로 못 하고, 자칫 발각되면 공격을 받아 소멸할 걱정도 사라진다.
모든 게 완벽한데 속으로 자꾸 꺼려지는 게 있어 추향을 몇 달째 따라다니기만 할 뿐 손을 쓰지 않았다.
'무룡이라는 자가 비관하여 자살한다고 해도 놈이 세상을 멸망하기 전에 혼돈을 불러올 수 있다. 만약 세상이 놈을 못 버텨 멸망하더라도 천계로 피하면 그만이다. 전혀 위험할 일이 없는데 왜 이리도 꺼림직한 건가?'
천수천안이 미처 모르는 부분이 있다. 바로 추영 등이 이미 명해로 가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만약 천수천안이 지금 추향을 잡아가면 소환 계약으로 연결된 까마귀가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천수천안의 소행이고 명해로 잡혀갔다는 것까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무룡이 태산의 구멍을 통해 명해로 갈 개연성은 충분하고, 공간을 어느 정도 터득한 무룡이라면 자하괴독을 이용해 흰고래한테 삼켜지지 않아도 본거지로 갈 수 있다.
거기에서 자하괴독이 풀려나기라도 하면 세상보다 마중구문이 먼저 멸망한다.
높은 경지에 이르고 격도 한없이 높은 천수천안이기에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본능적으로 추향과 예두를 잡아가는 데 거리낌을 느꼈고, 오랜 기간 바라던 숙원 해결의 기회가 왔다고 쉽사리 흥분하지 않고 계속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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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부유도가 미처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무룡은 거대한 존재감을 느꼈다.
'섬이 아니라 고래 같은 커다란 생물이 아닐까?'
그때 갑자기 커다란 뱀을 닮은 머리가 나타나더니 주변의 나무를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지금이다.'
문서에 따르면 부유도는 아주 짧은 기간 모습을 드러내고 바로 사라진다. 무룡은 응비도로 기운을 최대한 멈춘 후 몸을 부유도로 던졌다.
무룡의 존재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관심이 없었는지 뱀을 닮은 길고 커다란 머리는 주변의 나무를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현녀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러나 정체를 모를 괴물과 달리 현녀문은 무룡이 올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법인가?'
무룡은 진법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풍부한 지식과 높은 경지 덕분에 진법의 유무를 알아채는 데는 누구보다 낫지만, 진법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용도를 가늠하는 일엔 전혀 재능이 없다.
그래서 현녀문 제자들이 진법을 펼치고 있는지 확실히 판단하지 못했다. 부유도라는 이름의 섬에 있는 진법인지 방위를 정해서 정렬한 현녀문 제자들이 펼친 진법인지 구분할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 알고 왜 왔는지도 아는 눈치구나."
무룡은 아직 추향이 현녀문에 잡혔다는 확신이 없다. 부유도로 바로 온 건 환생환을 얻기 위함이 있고, 여기에 잡히지만 않으면 추향이 안전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럼요. 무언독왕이고 우리가 모셔 둔 귀한 아가씨의 부친이라는 것도 알지요."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군."
환생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향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말하라."
현녀문 문주는 무룡의 위엄 가득한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행히 무룡을 속이려는 게 아니라 그저 천수천안이 시킨 대로 하는 것이기에 계획을 망치진 않았다.
만약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방금 무룡이 기운을 실어 한 말 때문에 진실을 토하고 말았을 것이다.
"속에 품을 걸 놓아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요구에 무룡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자하괴독이 세상에 나오는 걸 원하는 자들이 있다. 나는 그게 마중구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구나.'
사실 마중구문은 구성이 복잡하고 생각도 제각각이다. 자하괴독을 세상에 풀려는 존재들 역시 마중구문의 일원이 맞다.
이들은 자하괴독이 세상을 멸망하는 과정에 천계로 가는 문이 열릴 것이고, 그 틈에 승천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계가 혼돈으로 돌아가건 멸망하건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하괴독이 풀리는 걸 방해하는 자들 역시 마중구문 소속이다. 이들은 자하괴독이 하계뿐이 아니라 천계도 소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무룡은 오판했다. 그래서 현녀문의 요구가 못 들어줄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자하괴독을 올려보내는 데 현녀문의 환생환과 독림의 기물이 필요하다. 그걸 어떻게 얻어내나 고민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기다니.'
게다가 추향도 구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믿는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무룡의 위엄에 눌린 현녀문 문주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다짐했다. 그러나 최근 격이 급히 오르는 바람에 절제가 안 되는 무룡의 기운이 강하게 압박한 탓에 현녀문의 누구도 굴욕으로 생각지 않았다.
"환생환 그리고 독림에 있는 모든 독을 해독한다는 기물이 필요하다."
무룡은 마치 자신이 맡겨둔 물건을 요구하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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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기사를 불러야 합니다."
벽력문과 절검문은 마중구문에 속한 세력들을 정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마중구문의 하수인은 마교와 당백호를 따르던 제국의 잔여 세력들이 했고, 아미파는 점창파를 비롯한 친분이 깊은 문파들과 함께 명황성을 청소하는 일에 몰두했다.
당연히 태산에서 결계를 파괴하는 일은 추영이 책임졌다.
그러나 모든 인맥을 통해 긁어모은 술사들이 입을 모아 천방기사를 언급했다.
"그자는 도대체 뭐가 뛰어납니까?"
추영은 천방기사가 사고를 치는 모습만 봐왔다. 추향의 사부이고 또 무룡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한 적이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호감이지만, 함께 뭔가를 도모하기엔 너무 불안했다.
"진법과 결계에 관해선 일인자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특히 근래에 기운을 다루는 솜씨도 심상치 않아 이 일에 적격입니다."
술사들은 너무 이성적인 게 탈이다. 태산에 모인 술사 중 태반이 천방기사와 악연이지만, 그렇다고 천방기사의 뛰어남을 깎아내리진 않았다.
'왠지 불안한데?'
그러나 추영에게도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수족이 잘리고 눈이 막히고 몸통을 난도질당하는 걸 마중구문이라고 모를 수 없다.
왜 여태껏 가만히 당하고 있었는진 모르지만, 늦지 않게 결계를 파괴해 놈들을 끌어내야 한다.
놈들이 결계 안에 숨어서 다시 수족을 만들면 마교를 위수로 하는 연합은 영원히 마중구문을 이길 수 없다.
"어쩔 수 없군요. 천방기사를 부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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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걸 빙염가氷炎歌(얼음과 불의 노래)로 명명하겠다."
"그만해. 도대체 이름을 몇 번 바꾸는 거야?"
"얼음과 불의 기운이 충돌하는 소리가 노래 같지 않아?"
"내겐 안 들려."
사마귀가 멈칫했다.
"진짜?"
"응. 마누라 걸고 진짜."
"노래가 멈추면 결계가 파괴되지 않을까?"
처음 명해에 도착한 섬에서 어렵게 결계를 찾은 둘은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방법도 힘이 부족해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힘을 증폭해야 했고, 아는 무공이 적은 사마귀가 화무룡한테서 검술을 배웠다.
그러나 검술만으로 부족해 결국 태청심법에 자하신공까지 알려줬고, 그것들을 토대로 염천공과 빙천공의 기운을 하나로 합치는 시도를 하다가 반발력이 엄청남을 발견했고, 온갖 심법과 검의를 결합해 둘을 안정적으로 충돌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러나 뭐가 부족한지 여전히 결계를 뚫는 데 실패했다.
사마귀는 새로운 무공의 이름에 문제가 있다고 우기며 작명에 열중했고, 결국 빙염가라는 이름을 통해 개선점을 찾아냈다.
"해봐."
화무룡은 사마귀의 천재성에 질투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살공을 품었을 땐 그저 거친 맹수처럼 느껴졌는데, 오살공을 잃고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얼음과 불의 기운이 충돌했다. 사마귀는 강한 얼음과 강한 불, 약한 얼음과 약한 불을 충돌시켰었다. 그러나 이번엔 강한 얼음과 약한 불, 약한 얼음과 강한 불을 충돌했다.
얼음의 승리와 불의 승리가 규칙적으로 맞물렸다. 결계가 오랜 나무 의자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파삭.
짧은 기다림 끝에 결계가 얇은 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봤지. 나 천재야."
사마귀가 환호했다.
"봤지. 나 천재라니까."
그런데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추영아."
"오라버니가 여기 계셨군요."
당연한 수순으로, 천방기사와 사마귀는 서로 결계를 부순 사람이 자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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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왔다.'
천수천안은 환희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영문은 모르지만, 지금이 최적의 시기다. 그리고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끝이다.
배수진을 펼친 상황에 확실한 승기를 잡은 셈이다. 반란군에 쫓겨 벼랑 끝에 몰린 왕이 구명의 동아줄이 아니라 모든 걸 되돌릴 절대의 힘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다.
"누구야!"
무룡이 머물던 자리에서 흔적을 찾던 추향이 천수천안의 기척을 느꼈다.
"다보도인의 제자인 천수천안이라고 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금빛 그물이 추향과 예두를 감쌌다. 추향이 아무리 애쓰고 예두가 아직 날카롭지 않은 이빨로 아무리 물어뜯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죽기엔 아까운 아이구나.'
무룡은 그릇이 크지만 술사로서 재능이 부족하다. 천방기사는 재능이 넘치지만 그릇이 너무 작다.
추향은 그릇이 무룡에 못 미치고 재능이 천방기사보다 조금 부족하지만, 종합적으론 둘보다 훨씬 낫다.
수천 년을 산 천수천안도 처음 보는 훌륭한 재목이어서 저도 모르게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 어느 계파야?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사부 천방기사야."
웬만한 술사는 천방기사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마를 찌푸리며 추향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천수천안은 천방기사가 누군지도 모른다.
하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대단한 술사이고 사고 유발로는 으뜸이지만, 천수천안의 귀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 작가의말
環環相扣 - 고리에 고리를 물다.
천방기사와 사마귀 중 도대체 누가 결계를 깼을까요? 전 얼불노에 한 표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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