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성공
제국의 군대 중 가장 강한 데가 어디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표항군剽亢軍을 지목할 것이다.
기병과 궁병 그리고 보병의 조합으로 이뤄진 표항군은 제국 북부의 안전을 책임진 일등 공신이다.
심지어 제국 황실이 무너진 지금도 굳건히 변방을 지켜 유목민족들이 중원을 약탈하는 걸 막아냈다.
머리가 둘이고 꼬리가 셋인 사자를 깃발에 새긴 표항군. 표항군의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만 들어도 새외의 아이들이 울음을 그친다는 전설 같은 소문이 있다.
그 깃발이 지금 사시나무 떨듯 와들거렸다.
"성지에 거역하는 것이냐?"
마차 안에서 준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위엄이 가득하여 웬만큼 대가 세지 않고서는 거역할 엄두도 안 났다.
"우린 제국의 군대이지 황실의 군대가 아니다. 성지의 뜻에 따를 이유가 없다."
끽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끄는 말도 없고 드는 사람도 없이 허공에 떠 있던 마차에서 곤룡포를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말한다. 성지를 받들어 나를 따르라."
끄는 말도 없고 드는 사람도 없는 마차가 허공을 둥실둥실 날아서 나타날 때도 다들 볼을 꼬집을 정도로 경악했다.
마차 안에서 옥새가 찍힌 성지가 둥실둥실 떠서 올 때도 더는 놀랄 여지가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그러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표항군을 이끄는 장수 항언은 더없이 놀랐다.
"어떻게. 재상은 분명히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니지. 살았더라도 지금은 환갑이 넘은 나이어야 하는데."
무룡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항언의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그 재상이 독고현천이라면, 내 선부 되신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당백호가 내 자식이다."
항언은 독고현천의 측근 중 목숨을 부지한 몇 안 되는 인사다. 그러나 나이가 환갑에 가까운데도 여전히 표항군에서 칠품에 해당하는 표장彪將에 머물러 있으며 은퇴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장안에서 일이 터졌고, 항언을 진심으로 따르던 자들이 다른 장수들의 목을 베고 강제로 항언을 군수軍帥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항언 역시 고집이 보통이 아니어서 중원으로 진출해 나라를 세워 왕이 되라는 수하 장수들의 청을 여태껏 거절하고 있었다.
"제위를 되찾으시려는 겁니까?"
항언의 눈에서 한이 가득 맺힌 눈물이 흘렀다.
"아니다. 세상을 좀먹는 악의 무리를 징치하려는 것뿐이다. 곤룡포는 무고한 죽음을 줄이고자 입었다."
"따르겠습니다."
항언의 말에 표항군의 병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오랜 기간 교체가 없어 다들 나이가 삼십이 넘어 육체적으로 하락기에 접어들었지만, 오랜 기간 변방을 지킨 경험으로 어떤 군대보다 잘 싸울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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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 무서운 소문이 돌았다.
첫 번째는 무언독왕의 복귀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무언독왕은 우선 혈교를 도와 마교를 물리쳤다. 백만 군세의 마교가 무언독왕이 두려워서 혈교와 벌이던 싸움을 멈추고 세세겁화봉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소문은 첫 번째와 연관이 있다. 무언독왕 손에 마교 교주가 죽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검극이 교주가 되었다.
마교에 저항해 중원을 지킨 영웅으로 추앙받던 검극이 순식간에 마교 교주가 되자 강호는 물론 중원 전체가 경악에 잠겼다.
세 번째 소문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용혈이 나타나서 표항군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표항군은 군세가 채 일만도 안 되지만, 중원의 군벌들이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연일 들려오는 소문에 허둥거리는 중원과 달리, 마교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갑십칠이 을삼과 연락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기존에도 교류가 적지 않은 걸 보면 딱히 의심스럽지 않습니다."
"예의주시하도록. 한 명도 놓쳐서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갑십삼과 을구는 평소 교류가 전혀 없었는데 요즘 서신 왕래가 빈번합니다. 최소 둘 중 하나는 암중 세력의 주구로 보입니다."
"서신 내용을 확보해 분석해라. 하나만 죽여도 되는지 둘 다 죽여도 되는지 빨리 판단하여 보고하라."
마중구문은 왕을 통해 중원을 비롯한 세상을 그물처럼 연결했다. 크고 질긴 그물이어서 일부만 훼손하는 거론 마중구문에 타격을 줄 수 없다.
현재 무룡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그물코를 찾아 모조리 자르고, 결국엔 그물 줄을 잡은 자가 그물코를 고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표항군을 움직인 건 군벌 중 마중구문과 확실히 연결된 자들을 가리기 위함이다. 과연, 추영의 예상대로 표항군이 움직이자 군벌들 사이에 교류가 잦아졌고 그 과정에 하나둘 마각을 드러냈다.
"이는 중원 무림의 인사들을 정리한 겁니다. 이쪽은 확실한 암중 세력의 주구이고, 이쪽은 의심은 있으나 확증이 없는 자 중 죄가 깊은 놈들입니다. 이쪽은 의심은 있으나 지은 죄가 경미한 자들입니다."
확실한 놈들은 반드시 죽이고 죄가 깊으나 확증이 없는 놈들은 최대한 죽인다. 의심은 가나 지은 죄가 적은 자들은 최대한 지켜보며 상황에 따라 판단하기로 했다.
"표국 쪽 정보는 아직인가?"
"뻐꾸기가 보낸 자료가 많아서 정리하는 중입니다."
덕구와 노계혼은 상왕의 신임을 얻어 많은 일을 맡았다. 술이나 여자 혹은 돈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다른 자들과 달리 둘은 임무에 실패한 적은 있어도 실수한 적이 없다.
덕분에 상왕의 세력에 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는데 둘 다 이쪽으로 소질이 없다 보니 그저 보고 들은 걸 최대한 상세하게, 그리고 두서없이 적어서 보냈다.
"놈들이 연락을 주고받는 수단으로 기루를 꼽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기루의 문을 닫아버렸는데 놈들의 연락 속도가 여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표국처럼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는 무리가 없는지 찾아."
정보를 수집하는 자, 정보를 정리하는 자, 정보를 분석하는 자, 정보로 판단하는 자, 판단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자.
마치 정교한 기관처럼 모두가 착착 맞물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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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천수는 요괴다.
사부인 다보도인의 총애를 받아 수많은 법보를 하사받았고, 덕분에 본신 실력이 부족함에도 마중구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천안천수보다 훨씬 강한 자들도 결국 못 버티고 그림자가 되었는데, 천안천수만 여전히 버티는 것도 다보도인이 물려준 수많은 법보 덕분이다.
"서둘러라."
처음엔 오행의 기운을 품은 짐승 하나하나를 다룸에 있어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백 마리가 넘으니 눈을 감고 해도 전혀 실수가 없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끝났습니다."
천안천수는 수하가 처리한 짐승을 확인했다. 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퍼부은 덕분에 사마귀의 몸에 있는 오행수가 안 넘어오고 못 배길 정도로 훌륭한 놈이 되었다.
'그래봤자 전에 실패했던 놈들도 다 이 수준이었지.'
지금까지 준비한 짐승 중 사마귀보다 못한 건 없었다. 사마귀가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는 건 아니고, 오행수가 자기 힘을 발휘하기엔 사마귀의 육신이 부족함이 많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오행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안천수는 그걸 사마귀의 강한 의지가 오행수를 잡아둔 탓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거듭 실패했음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인간의 정신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고, 사마귀가 무너지는 순간 천안천수와 마중구문의 수많은 수련자가 꿈꾸던 시각이 온다.
'그게 왠지 오늘일 것 같고.'
처리한 짐승을 상자에 넣고 봉인한 다음 네 사내에게 들게 했다. 이들은 소양과 노양, 소음과 노음의 기운을 품은 자들로, 간격만 맞추면 자연스럽게 사상진을 만든다.
오행의 기운에 영향을 가장 적게 주는 음양에서 출발한 사상으로 짐승을 움직여 성공 가능성을 한 톨이라도 높이려는 천안천수의 눈물 나는 노력이다.
"이 지랄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지?"
"네가 포기하면."
말을 마친 천안천수는 손을 저어 사마귀를 재웠다. 그리고 상자를 제단에 올린 다음 법사를 시작했다.
법사가 시작되자 수많은 재물을 쏟아부은 상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제단 위에 하얀 병아리가 나타났다.
법사는 평소와 똑같이 진행됐다. 천안천수가 '이번에도 실패인가' 하며 다음에 제단에 올릴 짐승을 고민할 때, 갑자기 사마귀의 몸이 세게 떨렸다.
천안천수는 황급히 소매에서 황보탑晃補塔을 꺼내 진법에 던졌다. 전투에는 전혀 쓸모가 없지만, 진법을 안정하는 데는 하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법보다.
황보탑에서 나온 하얀 기운이 진법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사마귀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예감이 맞은 건가?'
천안천수는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원신을 드러낼 뻔했다.
'역시. 내가 싫은 걸 해야 원하는 걸 얻는구나.'
지네 요괴인 천안천수는 천적인 닭을 싫어한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하얀 병아리를 선택했는데, 느닷없이 성공의 문턱까지 왔다.
"내 친우가 위험하지 않소?"
화무룡의 질문에 천안천수는 처음으로 대답했다.
"위험하지 않다. 이 진법은 저놈의 목숨을 절대적으로 보호한다."
천안천수의 대답에도 화무룡은 안절부절못했다.
"어!"
감탄을 터뜨린 건 화무룡이 아닌 천안천수였다. 수천 년을 살면서 웬만해선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마귀의 몸에서 오행수가 분리되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오행수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가루 반죽에서 작게 한 움큼 뜯어내듯이 사마귀의 몸에서 떨어졌다.
사마귀의 몸에서 떨어진 오행수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갈팡질팡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진법의 힘과 오행의 기운을 품은 짐승의 유혹으로 사마귀의 몸에서 나오긴 했지만, 결국 어디에 깃드느냐는 오행수 마음이다.
'멍청하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천안천수는 품에서 오행단을 꺼냈다. 오행의 기운을 품은 법보로, 만들 순 없고 운 좋게 찾아내야 하는 아주 희귀한 물건이다.
그러나 염원하던 일이 곧 이뤄진다는 생각에 아까운 마음을 다잡고 과감히 투자했다.
오행의 기운을 품은 짐승에 오행단까지 더해지자 오행수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병아리 몸으로 들어갔다.
오살공이 사라지자 사마귀가 잦은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강한 힘을 잃은 탓에 사마귀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기세가 약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천안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마귀가 오살공을 품었을 땐 어쩔 수 없이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야 했지만, 이젠 아니다.
"이놈이 진짜 가버렸네. 그럼 우리 계획을 시작하지."
사마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안천수가 상상도 못 한 이변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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