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관두
무룡은 현재 무언독왕이 되어 정신이 나간 상태로 움직일 때보다 품은 기운이 오히려 적다. 대신 기운의 순도나 응집력은 훨씬 뛰어나 더 강한 위력을 발현하고 오랜 기간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다.
문제는 딱 하나다. 공원파를 펼침에 있어 예전보다 나아진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
망가진 물건이 빠르게 회복하는 절검문의 구중진 덕분에 공원파를 원 없이 수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공원파를 수련한 적이 없다.
괴물을 죽인 다음 꽤 오랜 기간 독과 싸우며 꼼짝달싹을 못 했고, 정신을 반쯤 잃고 돌아다닐 땐 수련할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엔 오랜 기간 내공이 없는 상태로 무공을 완전히 놓고 살았으며 최근에야 내공을 회복했다.
설사 시간이 어느 정도 있었더라도 사물의 핵심을 파괴하여 소멸로 몰아가는 공원파를 마음껏 수련할 환경이 없다. 절검문에는 제정신이 아닐 때 은원을 모두 잊는다고 했지만, 사람인 이상 앙금이 전혀 안 남을 수 없어 부탁하기도 꺼려졌다.
그래서 예전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강해졌지만, 공원파를 펼친 후 일시적으로 무력한 상태가 되는 건 여전했다.
어쩌면 경지가 올라 공원파를 더 확실히 펼치는 바람에 기운의 소진이 더 철저한지도 모를 지경이다.
'마환기공을 믿어야지.'
내공을 대부분 소진한다고 마환기공이 무용지물이 된다면 외공이 아닌 내공으로 불렸을 것이다.
무릇 외공은 육체 본연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게 목적이며, 내공과 결합한 외공도 본연의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공원파를 펼친 바람에 움직일 기운이 거의 없지만, 무룡의 몸은 마환기공 덕분에 여전히 금강불괴를 유지하고 있다.
푹.
무룡의 예상을 벗어나 비수가 배에 아주 쉽게 꽂혔다.
"뭐야?"
무룡은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경악을 질렀다.
"언제부터 칼로 살을 가르는 게 그리 놀랄 일이었는가?"
불사혈괴가 큭큭 웃으며 가른 부위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그러나 무룡은 정혈단을 흡수한 거지 삼킨 게 아니다. 배에 손을 넣고 백날 찾아봐야 정혈단의 그림자도 못 건드린다.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다. 혈단은 어디에 숨겼느냐?"
"내가 먹었다.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롄가? 어떻게 외공을 무시하고 내 배를 갈랐지?"
"내가 대답해주면 다음 질문에도 솔직히 대답하는가?"
"약속한다."
불사혈괴는 무룡의 말을 믿었다. 무인이라는 종자는 자신이 익힌 무공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이유를 알고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미쳐버린다.
아주 자신하던 외공이 와해하였는데도 제정신이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우린 정혈단의 힘이 미치는 공간 어디에든 있다. 네 뱃속도 예외는 아니지."
"제길."
불사혈괴의 말에 고생스럽게 익힌 마환기공이 무너졌다.
고심해서 쓴 시가 반박이 어려울 정도로 철저한 비판을 받으면 선비는 다시 붓을 잡지 못한다. 마음에 진 응어리를 풀지 못하면 아예 절필할 수도 있다.
무인 역시 마찬가지로, 고심해서 익힌 초식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다신 그 초식을 못 펼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룡은 마환기공에 거의 절대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응비도를 익힌 비천각주한테 한 번 당하고 불사혈괴의 비수에 또 당하니 그 믿음이 깨졌다.
무룡이 현재 보유한 지식으로 마환기공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무공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환서고에서 온갖 지식을 섭렵한 탓에 오히려 마환기공의 태생적 한계임을 느끼고 더 확실히 포기해 버렸다.
차라리 경지라도 낮았으면 심마나 주화입마에 잠깐 시달리고 말았을 텐데, 마음이 훨씬 중요한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에 마환기공이 사라져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왔다.
"그래. 아무리 강인한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면 온갖 실수를 저지르고 갖은 추한 모습을 보였지. 그게 싫어서 영생을 추구했고 혈단을 소유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내 꿈이 이뤄지는구나."
"날 살려라."
무룡의 당당한 요구에 불사혈괴는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질문할 차례다."
"그냥 내가 알려주마. 내가 죽으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럼 네 영생도 전혀 소용이 없다."
불사혈괴는 인간이 아니다. 비록 인간이 바탕이지만, 영생을 위해 버린 게 한둘이 아니다. 불사혈괴들이 하나같이 덩치가 작은 건 인간과 달리 몸에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다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가리는 등 요상한 재주가 많다.
"어떻게?"
불사혈괴는 무룡의 배에서 꺼낸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고민했다. 상대가 진실을 숨기는 것까지 못 잡아내지만, 상대가 거짓말을 하면 모를 리 없는 불사혈괴다.
비천각주 역시 혈교로 온 이유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 차라리 뭔가 숨기더라도 거짓을 섞지 않았다면 목숨은 잃었어도 고통은 덜 받았을 것이다.
"내 몸에 극독을 품은 여의주가 있다. 내가 죽으면 그게 세상에 풀려나고, 세상이 모두 망한다. 그 독은 숨 쉬고 움직이는 것만 죽이는 게 아니라 모든 의미가 있는 존재를 지운다."
"제길."
무룡의 말이 진실인지는 불사혈괴도 알 방법이 없다. 오래 살았다곤 하지만, 최근 수백 년은 극히 제한된 공간으로만 움직일 수 있어서 정보의 획득이 어려웠다.
그러나 무룡 자신은 뱉은 말을 진실로 믿어 의심치 않음을 확인했기에 뭔가 꺼림직한 게 있었다.
"아니지. 어차피 정혈단이 사라지면 우린 바로 소멸한다. 네가 죽으면 세상이 망한다는 건 확실치 않지만, 정혈단이 없으면 내가 죽는 건 확실하다."
두 상충하는 정보 중 하나가 확실하다면 당연히 그걸 따라야 한다. 불사혈괴는 바로 마음을 다잡고 비수로 무룡의 가슴을 갈랐다.
"심장 안에 숨겼니?"
"아니다.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롄가?"
불사혈괴는 불현듯 무룡에게 호감이 생겼다. 본인 역시 죽기 두려워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었고, 오랜 기간 죽음과 거리를 좁힌 인간들이 보이는 온갖 추태를 봐왔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자가 드물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오기나 객기로 버티는 거지 무룡처럼 침착하고 여유 넘치는 놈은 없었다.
"정혈단은 누구의 내단인가?"
"곡 진실어어야 할 필욘 없겠지? 내가 알기론 검은 원숭이의 내단이다."
'희망이 있다.'
여동빈이 성공한 것도 삼킨 게 구렁이나 지네 따위가 아닌 백원의 내단이기 때문이다. 무룡이 삼킨 정혈단도 인간과 가장 가까운 원숭이의 것이니 다른 영물의 내단보다는 훨씬 승산이 크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마환기공을 잃어 약해진 무룡의 몸은 정혈단의 공격에 쉽게 무너졌다.
"협상하자. 난 지금 정혈단과 싸우고 있다. 내가 이기나 지나 정혈단은 사라진다. 그리고 내가 이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말해. 뭘 해야 할지."
오래 산 보람도 없이 불사혈괴는 당황한 나머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저들의 피를 내 몸에 부어라. 그러면 혹시 정혈단을 쫓아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짓말."
무룡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실을 말하마. 이대로는 내가 진다. 저 피에 품은 독이 들어오면 내 승산이 조금이라도 커진다.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이대로는 네게 희망이 전혀 없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생긴다."
불사혈괴는 오랜 기간 잊고 지냈던 짜증이라는 감정이 확 치밀었다.
'반드시 죽느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생기느냐의 차이구나.'
웬만한 사람이면 이 상황에 될 대로 되라고 심술을 부리며 무룡의 말을 거절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불사혈괴는 오랜 기간 살면서 그 세월에 부합하는 지혜와 의지를 얻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살려는 강한 욕망을 품고 있다.
"좋아. 이번엔 내 차례다.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지?"
이미 죽은 네 불사혈괴의 피는 물론이고, 무룡에게 핵이 깨지고 사라졌던 저주받은 피도 어느새 나타나 무룡의 몸에 쏟아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약속을 어길 셈인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성실히 대답하는 게 왜 약속을 어긴 거지?"
퉁명스럽게 대꾸한 무룡은 불사혈괴를 무시하고 내면에 집중했다.
마환기공마저 사라진 무룡의 몸은 불사혈괴의 피는 제쳐두고 저주의 병사를 만들어내던 저주의 피마저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룡의 몸이 죽음의 기로에 놓이자 독룡담에 있던 자하괴독도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이대로 무룡이 죽으면 자하괴독은 자아를 잃고 그저 무한히 증식하는 독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자하괴독을 품은 여의주 역시 마찬가지로 황당했다. 세상의 정점이나 다름없는 여의주에서 격이 수십 개나 떨어지는 셈인데, 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자하괴독은 급히 독룡유를 부려 무룡의 몸에 들어온 독을 흡수했다. 일시적으로 강한 흐름이 형성되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독룡담이 살짝 기척을 흘렸다.
무룡은 그 틈을 순양공보다는 자하신공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심법으로 벌렸다. 비록 그간 다양한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었지만, 무룡의 체질이 순양공과 안 맞아서 경지를 높이지 못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자 순양공은 무룡의 의지에 완전히 부합한 움직임을 보였다.
'경탄도!'
그때 갑자기 무룡의 뇌리를 때리는 게 있었다.
'면면불식과 도철공이 경탄도의 일부분이다!'
추영이 알려준 면면불식, 사마영이 가르친 도철공. 둘을 합치면 바로 무룡이 아직 못 익힌 칠신도록의 경탄도다.
무룡의 머리에서 도철공과 면면불식의 구결이 순식간에 조합이 되었다. 도철공은 경탄도에서 크게 삼키는 부분을 담당하고, 면면불식은 끊임없이 삼키는 부분을 담당했다.
웬만한 자질로는 동시에 익히는 게 어려워서 둘로 나눴는데, 면면불식은 추영의 가문에 흘러갔고 경탄도는 우연히 사마영이 발견해 익히려다가 포기했다.
무룡은 바로 허신도로 외부의 기운과 공명하고, 부름에 응한 기운을 호세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아직은 어설픈 경탄도로 기운을 체내에 들였다. 다행히 면면불식을 오랜 기간 익힌 덕분에 공명한 기운 대부분이 무룡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모은 기운을 응비도로 뭉쳤다. 그러나 모든 기운은 멈추는 즉시 흩어지려 한다. 맹룡도가 무룡의 의지에 호응해 강하게 뭉친 기운을 빠르게 순환했다.
그러나 지속하여 흡수하며 기운이 너무 강해진 탓에 마환기공까지 잃은 무룡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뭉개졌다.
그리고 와행도가 등장했다. 기운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여 몸에 주는 손상을 최소화했다.
'돌아왔다.'
마환기공은 여전히 불완전한 외공이다. 그러나 불완전하다면 불완전한 대로 쓰면 된다. 세상 만물은 각자 쓰임새가 다르고 그 쓰임새의 크기도 다르다.
완벽하지 않다고 버릴 게 아니라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에 알맞게 써먹어야 한다.
자기 목숨뿐이 아니라 자칫하면 자하괴독이 세상에 풀려날 판인데 마환기공이 완벽한지 아닌지 따질 때가 아니다.
"어쩌지? 난 어쩌지?"
불사혈괴는 비수를 꼭 잡고 갈팡질팡했다. 무룡을 죽이고 싶은데 차마 손을 쓸 수 없고, 도망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후웅.
큰 바위가 바로 곁에 떨어질 때나 들을 법한 소리가 불사혈괴의 귀에 울렸다.
"이건 뭐야?"
성실히 대답하기로 약속했지만, 이미 청력을 잃은 무룡은 불사혈괴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현재 독룡유가 만든 흐름으로 무룡의 몸과 암혈인 독룡담이 제대로 연결됐다. 거기에 무룡이 살려고 외부의 기운을 끌어다 쓰면서 무룡의 몸과 세상이 연결됐다.
그 연결을 타고 자하괴독이 밖으로 나왔다.
"용인가?"
꼬리를 여전히 무룡의 몸에 둔 용의 모습을 한 괴물이 얼빠진 소리나 해대는 불사혈괴를 냉큼 삼켜버렸다.
- 작가의말
근손실보다 백 배 두렵다는 격손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