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산란
"누가 의심 살 만한 짓을 했어?"
추향이 날카롭게 추궁했다. 구궁진을 유지하며 저들이 하려는 짓을 파악한 후, 결정적인 순간에 훼방을 놓으려던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물거품이 됐다.
"찾아와서 다짜고짜 진법이 완성되면 의뢰금을 받고 떠나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진법 칠 때 틈 하나 남겼으니 망정이지."
추향은 능숙하게 은성진을 펼친 다음, 천리안으로 진법 안 상황을 훔쳐봤다. 노계혼은 안도의 숨을 쉬며 불을 지펴 음식을 준비했고 석군과 손청우는 가부좌를 틀고 심법을 운용했다.
석군은 명황성 안에서 내공이 눈밭에 굴리는 눈덩이처럼 불어 수련이 재밌고, 손청우는 요괴라는 존재를 몇 번 접하며 자신이 생각하던 무공의 틀을 확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추향은 구궁진 안에서 펼쳐지는 재밌는 구경거리에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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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물소 머리도 한입에 삼킬 만한 커다란 덩치의 늑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머리가 하나인 걸 보면 사내가 말하던 삼두랑은 아니다.
'청동괴다.'
청동괴는 금속 괴물이다. 그런 청동괴에게 혈교가 만든 약이 생명을 불어넣었다.
'내 추측이 맞았어.'
단서가 거의 없었지만, 추향은 청동괴와 명황성이라는 조합으로 이 일에 혈교가 연관되었음을 추리해냈었다.
그래서 동해문을 괴롭히던 중에 혈교로 가야 한다는 말을 꺼낸 적 있다.
'명황성 안엔 처음부터 청동괴가 없었다.'
장안과 형주의 청동괴는 진법이 파괴됨에 따라 사라졌다. 그러나 대도는 봉인진만 훼손된 바람에 청동괴가 천하로 흩어졌다.
그리고 명황성이 된 여섯 도시 안엔 술사와 무인들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청동괴가 없었다.
이에 그간 꽤 많은 자가 청동괴를 잡아 명황성에 데리고 들어가서 어떻게 되는지 살폈다. 그러나 뭔가를 기대하던 자들은 청동괴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목격하고 탄식만 뱉어야 했다.
추향은 과감히 신비세력이 청동괴와 명황성에 관해 뭔가를 알아냈다고 추리했고, 천하에 금속으로 만든 괴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을 아는 건 혈교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어떤 수단으로 청동괴에 생명을 부여했다고 쳐도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 신비세력의 목적에 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행히 추향의 안개는 아주 빨리 걷혔다. 코를 킁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삼두랑이 청동괴를 향해 엉덩이와 대가리를 흔들며 춤을 춰댔다.
'구애의 춤?'
궁금증이 해결됐지만, 추향의 의혹은 오히려 커졌다.
요괴에 관해 아주 낱낱이 알려진 건 아니지만, 암수의 구분이 없다는 정도는 상식이다.
청동괴는 처음에 삼두랑의 구애에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삼두랑의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멍청이. 암수의 구분이 없다는 건 암컷도 수컷도 아닌 게 아니라, 암컷도 수컷도 된다는 말이잖아.'
굳이 구애의 춤이 필요한 건 누가 암컷이 되고 누가 수컷이 될지 협상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한 거지?'
추향이 아무리 박학다식하고 총명하다고 해도 여기까지 알 순 없다.
신비세력은 그간 삼두랑을 상대하면서 얻은 피를 혈교로 보내 특별한 약을 만들었다. 이 약은 청동괴한테 일시적으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신비세력은 수많은 청동괴를 잡아 진법에 가둔 다음 약을 썼다. 그리고 수천 마리 중 겨우 세 마리가 생명을 얻었다.
두 마리는 팔괘진을 치고 삼두랑을 유혹하는 과정에 파괴됐다. 고작 팔괘진으론 삼두랑의 판단력을 흐려 청동괴를 진짜 늑대로 여기게 하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구궁진을 펼쳐 법칙을 단순하게 바꾼 덕분에 이번엔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삼두랑을 속이는 덴 성공했지만, 이번엔 청동괴가 말썽이었다. 삼두랑의 피로 만든 약 덕분에 생명을 부여받은 청동괴는 진짜 생명체가 아니다.
그래서 삼두랑의 유혹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생명력이 소실되며 청동괴의 본능이 강해졌다. 부여받은 생명력이 사라질 위기에 닥치자 종족 보존의 본능이 강하게 발동하여 삼두랑의 구애에 응했다.
그리고 천우신조로 삼두랑이 암컷이 되고 청동괴가 수컷이 되었다. 만약 청동괴가 암컷이 되었다면 회임한 채로 생명력이 사라지며 신비세력의 계획은 다시 십수 년의 기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자들이다.'
추향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초반에 삼두랑이 수컷으로서 유혹할 때 반응하지 않다가 암컷으로 바꾸고 얼마 안 되어 청동괴가 호응한 것을 미리 계획한 것으로 오판한 탓이다.
구애의 춤으로 협상을 마친 삼두랑과 청동괴가 번식 행위에 돌입했다.
요괴의 번식은 인간이나 짐승과 달랐다. 그냥 정자를 보내 정보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하나로 합쳤다.
청동괴의 생명력은 삼두랑의 피에서 뽑아 증폭한 것이다. 그렇기에 결합하는 과정도 매우 빨랐다. 서로 거부 반응이 전혀 없기에 시간이 걸릴 일이 없는 것이다.
구궁진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삼두랑이 너무 쉽게 청동괴에게 끌린 이유기도 하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생명력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추향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삼두랑이 새끼를 낳을 시기를 계산했다. 그러곤 급히 품에서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꺼내 분질렀다.
청량한 똑 소리에 정좌한 채 기운을 다스리던 석군과 손청우가 눈을 번쩍 떴다.
"급하니까 간단히 설명한다. 곧 청람 숙부가 올 것이야. 그럼 우린 삼두랑의 알을 확보하고 도망친다."
"차라리 대사부를 부르시지."
노계혼이 툴툴거렸다. 대사부는 천방기사다.
"그럼 사부가 알을 차지할 거란 말이야. 나이를 그렇게 먹었는데도 욕심이 줄지 않아."
욕심이라기보단 호기심이다. 철없는 것과 왕성한 호기심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천방기사한테서 떨어지지 않았다.
추향이 벽력문 소문주인 청람을 부른 건 사부가 일을 치르는 과정에 몰래 알을 빼돌릴 것을 걱정한 탓이다.
"아무리 강한 분이라고 해도 고작 다섯이서 뭘 할 수 있소?"
"삼두랑이 알을 낳으면 바로 구궁진을 흔든다. 그러면 놈들이 당황해서 삼두랑을 공격할 거야. 그때 우린 알만 훔쳐서 도망친다. 청람 숙부가 도우면 별문제 없어."
그때. 대가 짧은 낭아봉을 든 무인이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노계혼을 공격했다.
"소사부, 도와줘요."
손청우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검을 뽑아 노계혼을 도왔다. 뭔가 생각하기엔 노계혼의 목숨이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석군 역시 바로 검을 뽑아 싸움에 끼어들었다.
사내의 낭아봉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가 물 만난 눈송이처럼 어느새 사라졌다. 노계혼이나 석군은 물론 손청우마저 사내의 공격에 쩔쩔매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셋은 여전히 사내의 봉법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내는 셋의 검법을 파악했다. 덕분에 노계혼의 몸에 낭아봉의 이빨이 할퀸 생채기가 하나둘 늘었다.
"벽력문 소문주 청람이오."
부모 죽인 원수 패듯이 노계혼을 두드리던 사내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자신을 소개했다. 얼굴색도 그대로고 호흡도 평온하여 방금까지 고수 셋을 상대하며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독무곡 노계혼입니다."
노계혼이 부루퉁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싸움을 끝내자는 뜻이니 얼른 신분을 밝히세요."
노계혼의 귀띔을 받은 손청우도 황급히 포권했다. 더 싸우기엔 너무 지쳤다.
"화산파 장문 손청우입니다."
"화산파 제자 석군입니다."
청람의 공격은 강한 힘이 실리지 않았다. 대신 너무 빨랐다. 종일 검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을 손청우와 석군이지만, 고작 반 각도 안 되는 사이에 너무 지쳐서 바닥에 눕고 싶은 마음이었다.
"셋 다 벽파공을 익힌 듯한데, 좀 더 정진하시오."
퍼뜩 놀란 손청우가 다시 포권하고 한 번 더 공손하게 인사했다.
"훌륭한 가르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룡 형제의 지인이면 내 벗이나 다름없소.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구려."
셋이 지친 건 청람이 회복할 틈을 안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내공 심법은 싸우는 중에 운기를 회복하지만, 그 속도가 느리다.
특히 고급 심법일수록 운기가 복잡하여 전투 중에 운용하기 어렵다.
벽파공은 운기가 간단하고 경로의 혈도 몇 개가 바뀐다고 문제가 생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운기 속도가 빠른 편이기도 하다.
그러니 벽파공의 경지를 높이면 싸우는 중에도 좀 더 빠르게 기운을 회복해 지금처럼 금세 지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강한 무공은 강한 대로, 약한 무공은 약한 대로 쓸모가 있건만.'
"왜 불렀느냐."
"삼촌. 삼두랑이 알을 낳았어."
앞뒤 없이 뱉은 말이건만, 청람은 바로 알아들었다.
"알 훔치려고? 그래서 사부 대신 아까운 벽력목을 꺾어 날 부른 거구나."
"역시 삼촌. 훔친 다음 삼두랑이랑 저기 독무곡을 위험에 빠뜨린 나쁜 놈들을 막아줘."
"저놈들이 확실해?"
청람의 몸에서 솟은 기운이 추향이 친 은성진을 흔들었다. 추향은 황급히 손을 저어 진법을 안정시킨 후에야 대답했다.
"확실해. 마지막 배후인지 중간에서 심부름하는 놈들인지 몰라도."
"그럼 조금 호되게 혼내도 괜찮겠구나."
네 사람은 노계혼이 준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시기를 기다렸다.
"준비, 준비."
천리안으로 구궁진 안을 훔쳐보던 추향이 다급히 손짓했다. 그리고 팔과 손가락을 복잡하게 흔들며 입으론 주문을 중얼거렸다.
청람 등은 추향에게 방해가 될까 봐 숨소리마저 죽인 채 대기했다.
수백 장 떨어진 곳에 우레가 크게 울렸다. 그러더니 광풍이 몰아치고 수많은 기운이 마구 섞여 폭발하며 난리를 쳤다.
추향이 구궁진에 만든 틈을 벌여 진법을 파괴했다. 그 여파로 진법을 유지하던 여덟 술사가 피를 토한 채 기절했다. 추향을 방해할 만한 사람이 모두 사라진 셈이다.
"저걸 어떻게 훔쳐?"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구궁진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물소 중에서도 가장 크다는 검은 물소 세 마리를 합친 만큼 큰 늑대 한 마리가 있었고, 곁엔 웬만한 멧돼지가 작게 보일 정도로 큰 알이 하나 있었다.
- 작가의말
완숙, 반숙, 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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