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교잠입
"독성, 보고 싶었어."
무룡을 본 난화봉이 바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무룡을 안지 못했다.
"교주, 체통을 지키세요."
덕구가 핀잔을 줬다.
"덕구 많이 컸네. 예전에 나한테 얻어맞고 울면서 엄마한테 이르던 코찔찔이가."
"교주. 난 이제 오독교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백독불침을 이뤘고 독공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난 그냥 놀았을까? 그리고 독공에 최고의 경지가 어딨어."
"상대의 독을 받아서 돌려줄 수 있습니다."
덕구의 말에 난화봉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그거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 났는데."
"마교의 흑응조로 손을 강하게 단련했습니다. 덕분에 웬만한 독은 받아서 그대로 돌려줄 수 있습니다."
"잠깐. 나 급한 일 때문에 온 거다."
둘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보이자 무룡이 중간에서 끊었다.
"그래? 얼마나 급한 일인데?"
"혈교의 살수가 내 가족을 습격했다."
가짜 소문을 퍼뜨려서 수만 명 무인을 독무곡으로 보낸 건 눈가림이고, 음모를 꾸민 배후 세력의 진정한 목적은 당백호의 목숨을 끊고 옥새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당백호의 무공도 꽤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곁에 목숨을 던져가며 지켜주는 호위가 백 명이 넘는다.
게다가 무공도 뛰어나고 기척을 잘 듣는 오지열이 있어 기습을 미리 알아챘다.
추영이 바로 당백호를 지키러 갔고, 독무곡 입구를 지키던 무룡과 소교주도 재빨리 돌아가서 혈영살수들을 도살했다.
상대 살에 칼을 꽂기 전까지 안 들키는 은밀함이 장점인 혈영살수지만, 오지열의 뛰어난 청력, 추영의 불가사의한 감, 마교에서도 살상력은 최고로 치는 오살공, 무룡의 무공을 뛰어넘은 재주에 순식간에 몰살했다.
문제는 혈영살수가 그렇게 희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약을 꾸준히 먹고 석 달에서 반년 정도만 훈련하면 바로 혈영살수가 될 수 있다.
"그 나쁜 놈들."
"그래서 혈교로 들어가서 뿌리를 뽑고자 한다. 겸사겸사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덕구 얼굴 그쪽에서 알 텐데."
"나 혼자 간다."
혈교는 바로 오대비문 중 하나인 남화교다. 남화교가 어디에 있고 교도가 얼마나 되며 교주가 누군지는 강호에 잘 알려졌다.
단, 남화교가 있는 곳은 길을 알아도 못 들어간다. 엄중히 지키는 것도 있지만, 천연적인 진법이 있어 안내를 안 받으면 갇히기 일쑤다.
그리고 남화교에서 큰 세력을 이룬 여러 가문 중에 오독교에서 간 난씨가 있다. 오독교에 남은 난화봉의 가족은 그들을 배신자라고 부르지만, 정이 완전히 끊기진 않아 그쪽에서 도움을 청하면 마지못해 손을 잡아주곤 했다.
"맨날 약초랑 의원 보내 달라고 징징거려서 보내주는 건 문제 없는데."
난화봉은 걱정이 있는지 말끝을 흐렸다.
"교주. 사부께선 만독불침에 금강불괴입니다. 깊은 물 속에서도 삼 일 버틸 수 있습니다."
"다 죽일 거야?"
난화봉은 무룡이 무언독왕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 중 하나다. 난화봉은 지금 무룡의 안위보단 남화교에 간 혈족의 존폐가 걱정되었다.
"죽여도 괜찮은 놈만 죽일 거야."
무룡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살인은 대상이 아무리 밉고 싫어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을 안 죽이면 훨씬 괴로운 일이 생긴다. 그렇기에 죽일 결심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 아니면 대부분 사람에게 죽이려고 마음을 굳히는 자체가 어렵다.
물론, 선을 한 번 넘으면 살인이 쉽게 여겨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룡은 천성이 후덕한 편이고, 자신의 살인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노혼의 밑에서 자라다 보니 그렇지 않았다.
"배신자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피를 나눈 혈족이야. 꼭 죽일 놈이라면 차라리 팔다리를 잘라 병신 만들어줘."
무룡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덕구를 남겨두고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덕구, 대결이다."
무룡이 떠나자마자 난화봉은 파랗게 물든 손을 휘두르며 덕구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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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요괴는 몸 주변에 연한 노란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요괴는 대부분 오행의 기운 중 한두 가지를 수련하는데, 범 요괴는 땅의 기운만 익혔다.
그리고 색이 연한 건 오히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품은 기운을 주체하지 못할수록 색이 짙은 법이니까.
"으악!"
갈고리 같은 앞발 발톱에 걸린 두 동해문 제자가 즉사했다. 그냥 칼에 같은 부위를 맞았으면 출혈은 있더라도 목숨은 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괴의 기운이 상처를 타고 내부에 침입한 바람에 비명 한 번 지르고 바로 숨을 거뒀다.
"마수와 달리 요괴는 알려진 게 많아. 꼭 그렇진 않지만, 범 요괴의 첫 공격은 앞발 휘두르기야."
추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 요괴가 자세를 낮추더니 뒷발질을 했다.
"두 번째는 뒷발 공격인데, 앞발보다 힘이 최소 세 배 이상 강하다. 주로 발톱이 안 들어가는 갑옷 따위를 입은 자들을 상대할 때 쓰지. 둔기로 후리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동해문이 데려온 술사들은 대응이 재빨랐다. 범 요괴가 첫 공격에 성공하자마자 바로 법술을 펼쳐 동해문 제자들의 몸에 갑옷을 소환했다.
진짜 갑옷은 아니고 일정 기간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일회용 법보로, 꽤 비싼 부적을 소모해야 펼칠 수 있는 부적 의존형 법술이었다.
"뒷발질로 재미를 못 보면 마지막 공격이 나오지. 바로 꼬리야."
갑옷 덕분에 동해문 제자들은 범 요괴의 일격에 쉽게 당하지 않았다. 요괴의 기운을 갑옷이 막아주자 범 요괴도 그저 힘이 훨씬 센 맹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고작 법술 하나에 막힐 정도로 약한 놈이라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검문의 소탕을 피해서 도망이라도 치려면 어느 정도 강함은 필수다.
"꼬리가 세 개네요?"
"척추가 세 개라는 뜻이야. 척추 하나에 꼬리 하나. 이건 법칙이거든. 심지어 마수도 이건 못 벗어나."
마수는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제멋대로인 존재다. 그러나 모든 법칙을 어기는 건 아니다.
"척추가 뭡니까?"
"목에서부터 엉덩이까지 가는 뼈. 등뼈라고 말하면 알아듣겠어?"
"아."
추향은 한숨을 작게 쉬고 말을 이었다.
"척추는 몸의 중심이야. 몸의 모든 뼈와 근육 그리고 신경이 척추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뤄. 그런데 척추가 여럿이면 어떨까?"
석군은 눈치만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상식 밖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거야. 바로 지금처럼."
범 요괴의 꼬리가 검처럼, 칼처럼, 창처럼, 채찍처럼 움직여 동해문 제자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훨씬 강해 보이는 뒷발질에도 버티던 갑옷을 하나씩 부쉈다.
"무인도 내공을 끌어오고 정해진 초식에 따라 검을 휘두르면 훨씬 강한 힘을 내지? 범 요괴 역시 마찬가지야. 저놈은 꼬리에 기운을 싣는 부류일 거야. 그러니까 특별히 꼬리가 많지."
"다리가 더 많은 요괴도 있습니까?"
"그럼. 다리가 여섯 혹은 여덟인 놈은 앞발이나 뒷발 공격이 강하지."
처음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범 요괴가 초식 비슷한 걸 써가며 동해문 제자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니 슬슬 호승심이 불탔다.
그때, 옆 영지에서 돼지 요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꿀, 꿀꿀."
"제길, 큰일이다."
"왜요?"
"둘이 친해."
요괴는 서로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 상대를 죽여 먹으면 그간 쌓은 기운 대부분을 뺏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먹이로 여기는 두 종은 절대 친할 수 없고, 요괴처럼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똑똑한 존재에겐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돼지 요괴가 근력만 키웠어."
내공이 잘 안 쌓여 외공을 익히는 무인이 가끔 있다. 요괴도 예외는 아니다. 돼지 요괴는 기운이 잘 안 쌓이는 체질을 타고났고, 덕분에 범 요괴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돼지 요괴는 범 요괴를 먹어봤자 얻는 게 없고, 범 요괴 역시 기운을 전혀 안 품은 돼지 요괴를 힘들게 잡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싸워야지."
돼지 요괴는 저돌적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힘이 상상 이상일 거야."
추향은 몸에 숨긴 수많은 암기를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되도록 피하고, 공격할 땐 꼭 내공을 최대한도로 실어."
돼지 요괴는 공격하기보단 셋을 잡아두려는 목적이 강해 보였다. 추향 일행이 물러나면 따라오고, 접근하면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렸다.
"골치 아프네."
범 요괴가 동해문을 제압하면 셋이서 요괴 둘을 상대해야 한다.
'세상엔 절대적인 게 없으니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거늘.'
귀찮을 정도로 많이 들은 말인데, 위기에 처하고서야 그 의미가 절실히 와닿았다.
"승산이 없는 것이오?"
"범 요괴가 가세하면 가망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 여긴 은성진으로 숨기도 힘들어. 시간이 넉넉하다면 내가 법술을 잘 변형해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우리 목숨은 버려도 되니 추 소저에게 부탁이 있소."
손청우가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말했다.
"만약 여길 혼자서 살아나간다면 화산파 장문인이 되어주시오."
추향은 손청우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화산파 장문인이 되는 건 꽤 귀찮지만, 둘을 버리면 범 요괴가 가세해도 목숨 정도는 부지할 자신이 있다.
그때.
"허허. 소사부께선 이 와중에도 화산파 생각뿐입니까."
커다란 덩치. 덩치에 어울리는 커다란 검. 검에 어울리는 커다란 손.
"계혼이 이놈."
추향이 호통치자 거대한 덩치가 움츠러들었다.
"언제 왔어?"
"사부께서 여길 가면 사저가 계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빠는?"
"덕구 사제랑 오독교로 갔습니다. 백호 사형이 혈영살수한테 공격을 받은 거로 화가 잔뜩 나셨습니다."
"돼지 요괴 잡아봤어?"
"그럼요. 다들 오해하는 게 있는데, 저놈 힘은 세도 살은 부드럽습니다."
말을 마친 노계혼이 커다란 검을 휘두르며 돼지 요괴를 덮쳤다.
- 작가의말
덕구가 난화봉한테 개길 정도로 컸습니다. 그럼 노계혼은 어느 정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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