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소녀
"한시가 급합니다."
석군은 한가하게 모닥불을 지피고 참새를 꼬챙이에 껴서 굽는 추향이 이해 가지 않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 몰라?"
"그런 말도 있습니까?"
"세 시진이면 광서생의 내상이 완치된다. 그럼 우린 훨씬 빠르게 독무곡에 갈 수 있다."
"그냥 우릴 두고 소저께서 독무곡에 말을 전하면 되지 않습니까?"
"재료가 부족해서 내가 없으면 이 은성진이 유지되지 않는다."
은성진隱星陣. 모습이나 기척은 물론 냄새까지 가려주는 진법이다. 그리고 진법 안에서 밖이 훤하게 보인다.
"주검을 묻어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석군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놈들이 딱 보고 '아, 이놈들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구나. 지원군 좀 더 불러야겠다.' 이러면 어쩔 거야?"
석군은 형인 석람처럼 머리가 뛰어나지 않다. 그래도 글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똑똑하다는 소릴 가끔 듣는다.
그러나 하얀 얼굴과 시원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소녀 앞에선 계속 바보가 되었다.
"다 됐다. 너 이거 먹어."
석군은 황송한 얼굴로 추향이 건네는 꼬챙이를 공손히 양손으로 받았다. 그러나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입에 가져가는 대신 손에 꼭 쥔 채 추향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추향은 석군이 자길 뚫어지게 쳐다보는 걸 개의치 않고 먹는 데 집중했다. 입을 커다랗게 벌린 다음 하얀 이로 참새의 살을 거칠게 뜯었다.
그러다 뼈가 씹히자 퉤 하고 모닥불에 뱉어버렸다.
'무슨 처자가.'
석군은 작은 실망을 느꼈다. 화산의 남자 제자들도 음식을 저리 품위 없이 먹진 않는다.
"진짜 제국의 공주 맞습니까?"
"응."
"제국은 당씨라고 들었는데요."
"난 엄마 성 따라서 추씨야."
"그럼 부친은 전대 황태자신가요?"
"아니. 전대 황태자라면 내겐 할아버지 되겠구나."
대화를 하면서도 추향은 참새를 뜯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 석군은 참새고기를 살짝 뜯어서 이로 살며시 씹었다.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고소한 풍미가 느껴졌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꼬챙이에 낀 참새 세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뼈를 쪽쪽 빨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추향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오래 굶었나 봐?"
"네. 사흘 내내 쫓겼습니다."
"그럼 푹 자둬. 네 사부가 깨면 곧 출발할 거니까."
"괜찮습니다."
석군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추향을 완전히 믿지 못해 내상을 치료하는 사부를 두고 잠들 수 없는데, 그게 마치 죄짓는 것처럼 송구하게 느껴졌다.
"곤하면 날 깨워."
석군은 놀라움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괜한 의심을 했구나.'
추향은 허공에서 꺼낸 말뚝 세 개를 땅에 박은 다음, 그 위에 누웠다. 머리와 엉덩이 그리고 발목만 말뚝에 대고 편하게 자는 모습에 자신들을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에 손을 썼을 거란 생각을 겨우 떠올린 석군은, 추향을 잠시나마 조금 의심했던 자신이 천벌을 받아 마땅할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석군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짜 흔적이 하나도 없어?"
'귀신인가?'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사람은커녕 날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없다니까. 넌 꼭 수화로 얘기하면 안 믿더라."
석군은 옥허심법으로 기운을 가라앉히며 오른손으로 검을 잡았다.
옥허심법은 기의 움직임이 조용하여 큰 힘을 써도 상대한테 들키지 않는다. 게다가 옥허검법 역시 쾌를 바탕으로 하는 무공이어서 대부분 상대는 가볍게 보고 방심하다가 강한 찌르기에 요해를 속수무책으로 내준다.
그런 옥허심법에 손청우는 벽파공을 섞었다. 느리게 움직이다가도 출수하는 순간에 기의 흐름을 빠르게 하여 위력을 몇 배로 높일 수 있다.
차이가 크게 나는 고수에겐 먹히지 않지만, 자신보다 한두 단계 경지가 높은 상대에겐 정말 유용한 수단이다.
"힘 빼. 저들한테 우린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아."
"어떻게?"
"뭐, 말한다고 무공만 익힌 네가 알아듣겠어? 그리고 생각 있는 놈들이라면 주검이 버젓이 있는 이곳에 우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이나 할까? 그저 있지도 않은 도주 흔적을 찾으려고 헛심이나 빼겠지."
말을 마친 추향이 다시 고르고 깊게 숨을 쉬었다.
'힘드니까 그냥 누워만 있어야겠다.'
석군은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피곤함이 쏟아져 저도 모르는 사이에 코를 세차고 골아대며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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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누구시오?"
"오호. 힘을 찾으니까 발톱을 보이시겠다? 역시 광서생이라는 별호가 그냥 생긴 게 아니었어."
석군은 사부와 추향이 만약에라도 싸운다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마음이 괴로웠다. 한쪽은 아버지와 같은 사부고 한쪽은 위기에서 구해준 구명은인이다.
"나는 진실을 원하오."
"이름은 추향, 나이는 비밀. 신분은 이미 말했어. 난 제국의 장공주야."
"노계혼과는 무슨 사이요?"
"그것도 말했잖아. 맨날 무공 가르쳐 달라고 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놈이라고."
"어디로 가는 길이오?"
"망우초 구하러 동해로 가는 길이다."
망우초忘憂艸.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게 한다는 전설의 풀.
"망우초는 어디 쓰려고?"
"아빠가 혼자 있을 때 자꾸 울어. 사람 좀 죽였다고. 그때 제정신도 아니었고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는데 말이야. 그게 내 속에 맺혀 더 높은 경지에 가는 걸 방해 해. 그래서 망우초 구해서 아빠가 슬프지 않게 하려는 거야."
손청우는 기상천외한 소녀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럼 왜 우릴 구한 거요?"
"너네 화산파잖아. 아빠가 그랬거든. 절검문과 싸우지 말고 벽력문과 친하게 지내고 화산파를 도우라고. 그리고 혹시나 오독교 사람들 보면 잘해주라고."
"소저의 부친이 누구시오?"
"응? 너네 내 아빠가 누군지 몰라? 노혼의 제자 무룡이 우리 아빠야."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다들 알겠지 하는.
특히 추향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에야 자신한테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심지어 쌍둥이 동생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가족에 대한 사랑이 조금 남달랐다.
무룡이 아빠이고 추영이 엄마라는 걸 늘 자랑하고 다녔기에 은연중에 화산파 사람들도 당연히 알겠거니 생각했다.
"그럼 왜 성이 추씨요?"
석군이 했던 질문을 손청우가 똑같이 반복하자 추향은 짜증이 확 치밀었다.
"여자는 엄마 성을 따르게 돼 있으니까. 우리 엄마 마교 성녀야."
무룡의 사정을 잘 모르는 손청우와 석군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자, 한 번만 말한다. 아빠는 독무룡, 제국 전대 장공주와 재상 독고현천의 아들이야. 엄마는 추영, 마교 성녀야. 난 추향, 제국의 장공주이자 천하제일 사고뭉치인 천방기사의 유일한 제자다. 그리고 내 동생은 당백호, 당금 제국의 황제 폐하다."
무룡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남궁세가의 항주 본가를 몰살하고 정의연의 육천 명이나 되는 무인을 죽인 게 가슴에 걸렸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게 아프게 찔러 몰래 울곤 했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본 추향은 총명한 머리로 왜 우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머리가 아무리 총명해도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추영처럼 다양한 사람을 보고 많은 일을 겪으며 세상사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모를까. 추향은 아주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랐기에 무룡이 왜 자책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경지가 막혔다는 건 그냥 만든 핑계고, 아빠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서신 한 장 남기고 독무곡을 떠나 동해 어딘가에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망우초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소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 소저한테 사숙이 되겠군."
"나 제국 장공주야. 그리고 내 사부 천방기사는 검극보다 배분이 높아."
손청우가 제멋대로인 추향을 배분으로 누르려다가 오히려 된통 당했다.
신분을 따지나 사승 관계에 따른 배분을 따지나 추향이 훨씬 위였다. 아무리 추향이 무룡의 자식이라고 해도 강호에서의 배분은 혈연보다 사승을 더 본다.
"나 그렇게 격식 차리는 사람 아니야. 장문도 말 편하게 해. 거기 계혼이 사제도 그렇고."
"강호의 법도가 있소."
"법도 그거 다 서로 안 싸우고 최대한 평화롭게 지내자고 만든 거잖아. 지금처럼 하 수상한 세상에 그딴 법도가 뭐 중요하다고."
"이런 때일수록 법도를 잃지 않아야 사람답게 사는 거 아니겠소?"
추향의 눈이 흐릿해지다가 바로 총기를 찾았다.
"고마워. 덕분에 크게 하나 깨달았어."
'고작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리고 그걸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수습해?'
손청우는 안타까운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아이가 화산 장문인이 된다면 천하제일의 문파를 넘볼 수도 있을 텐데.'
세 명의 손청우에 크게 손색 하지 않는 추적자를 단숨에 처리한 수단과 심계. 타고난 자질과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신묘한 재주들.
더구나 추향이 화산파 장문인이 되면 마교와 벽력문하고 돈독한 관계가 된다.
'저 아이가 장문인이 되고 석람이 총관이 되고 석군이 무력을 책임지면 난세에도 우리 화산이 굳건하게 버틸 수 있다.'
손청우는 추향의 성향을 알아낸 다음 어떻게든 설득해서 화산을 맡겨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했다.
"그나저나 정체불명의 세력이 내 아빠를 노린다는 정보는 어떻게 들은 거야? 혹시 놈들이 함정을 판 건 아니야?"
세상엔 우연의 탈을 쓴 필연밖에 없다. 추향은 손청우와 석군이 음산의 패도문 고수들을 부리는 세력의 내밀한 대화를 엿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손청우와 석군이 함께 무룡을 해칠 함정을 파진 않았을 테니 놈들의 계략이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말하자면 조금 부끄럽소. 그날 우리 사제는 객잔에서 식사하고 있었소."
손청우가 살짝 상기한 얼굴로 사건의 경과를 천천히 서술했다.
- 작가의말
어서 주인공이 등장하도록 판을 열심히 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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