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이노
키가 평범한 어른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자그마한 노인 둘이 앞으로 나섰다. 한 명은 손으로 두드리는 작은 북을 들었고 한 명은 단소라기엔 길고 장소라기엔 짧은 퉁소를 들었다.
퉁소에는 구멍이 네 개밖에 없고, 평범한 퉁소보다 두 배 정도 굵었다.
북을 든 노인은 자신을 고노로 칭하고 퉁소를 든 노인은 소노라고 소개했다. 소노는 가만히 있고 고노가 작은 북을 손으로 두드렸다.
무룡은 독을 회수하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억지로 독을 밖으로 내보낼 때와 달리 회수할 땐 부담이 작다. 무룡은 독 때문에 가만히 있은 게 아니라 현재 상황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아서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그냥 소주로 가자고 고민을 끝낸 무룡은 다시 앞으로 걸었다. 그런데 이번엔 사람이 아닌 괴물이 앞을 막았다.
괴산에서 나는 나무와 돌을 깎아 만든 인형들이었다. 고노의 북소리에 몸을 일으킨 인형들이 소노의 퉁소에 따라 무룡을 공격했다.
무룡은 검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주먹을 뻗는 돌 인형을 부쉈다. 그리고 검을 도끼처럼 휘둘러 나무 인형도 여러 토막으로 잘랐다.
인형들의 공격은 보기에만 기괴하고 실질적으론 별 효용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무룡도 느꼈다.
정상이 아닌 머리를 애써 굴려 고민한 무룡은 일각이 훨씬 지나고서야 영문을 알아챘다. 부서지고 잘린 인형들이 북소리에 복구되어 다시 전투에 투입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북소리에 따라 세가 연합이 동원한 육천 명에 달하는 무사들의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사람들의 심장이 북소리에 동조하자 점점 많은 인형이 몸을 움직여 무룡을 공격했고, 부서지거나 잘린 인형도 빠르게 복구되었다.
인형들의 공격은 일류 무사보다 약했다. 그러나 인형끼리 엉키면서 무룡에게 들러붙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점점 작아졌다.
무룡은 검을 휘둘러 인형을 부수는 것보다 떼어내는 데 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죽이는 건 어려워도 꼼짝 못 하게 잡아두는 건 가능할 듯했다. 그러면 무거운 돌멩이에 매달아 깊은 물에 처넣고 못 나오게만 해도 언젠간 무룡이 죽을 것이다.
이백 명이 넘은 사람이 동시에 녹아서 핏물 한 줌도 못 남기고 사라지는 장면을 보며 공포에 떨었던 세가 연합의 무사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룡의 상태가 정상이라면 머리가 터질 때까지 굴려 지금 난관을 타파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사고하기 힘든 무룡이기에 그저 보이는 위험에만 대비하며 점점 궁지로 몰렸다.
"다리를 묶었다."
무룡의 다리를 잡는 인형이 점점 늘었다. 팔이 안 보일 정도로 검을 휘둘러 인형을 베고 부수곤 있지만, 떨어지는 인형보다 달라붙는 인형이 더 많았다.
"합주."
고노의 말에 소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헙!"
세가 연합 수뇌부들이 기함을 질렀다. 갑자기 고노의 손에 들린 북이 허공에 둥실 떴다.
내공으로 무기나 가벼운 물건을 허공에 잠시 띄우는 건 여기에도 몇 명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노처럼 안정적으로 띄우는 건 검극 정도가 아니면 어렵다.
고노가 허공에 띄운 북을 양손으로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원래 북소리를 내고, 남은 손으론 박자가 약간 다른 소리를 냈다.
이는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한 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에 맞춰 소노의 퉁소도 두 개 음률을 냈다. 이에 대부분 사람은 놀라지 않았지만, 사실 이거야말로 북을 허공에 띄우고 두 가지 박자로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입으로 나가는 바람을 두 개로 나누고 퉁소 안에서 두 바람이 어떻게 충돌할지까지 예상해서 다른 소리를 동시에 내는 어마어마한 재주다.
그러나 음공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없고 견식도 고만고만하여 소노가 부린 재주에 진심으로 놀라는 사람은 몇 없었다.
북과 퉁소가 두 가지 소리를 내자 인형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일부는 원래대로 무룡에게 들러붙으려 하고 일부는 뒤로 물러서서 진열을 정비했다.
시간이 흐르며 뒤로 물러선 돌 인형과 나무 인형들이 뭉치고 섞였다. 처음엔 뭉치다가 쓰러져서 흩어지기도 했으나 나중엔 자석에 쇳가루 붙듯이 척척 진행됐다.
"거령巨靈 강신降神, 개산부開山斧."
고노의 외침에 따라 소노의 소매에서 누런 종이 수십 장이 쏘아졌다. 종이 몇 장은 무룡의 머리 위를 맴돌다 불타 사라졌고, 대부분은 커다랗게 뭉친 인형 몸에 들러붙었다.
갓 조각에 입문한 새내기가 깎은 것처럼 울퉁불퉁 형편없던 거대 인형의 외관이 조금씩 변화하며 점점 사람과 가깝게 되었다. 동시에 인형의 손에 천년 거암도 부술 것 같은 거대한 도끼가 생겼다.
도끼를 몇 번 허공에 휘두른 인형이 성큼성큼 달려가 무룡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확히는 몇 장의 부적이 불타 사라지고 남긴 붉은 연기를 노린 것이다.
다리가 묶인 무룡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마환기공으로 튼튼한 몸이어도 저 공격을 정수리로 받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판단도 본능적으로 내렸다.
위기는 인간을 강하게 한다.
독의 공격으로 흐리멍덩한 무룡의 머리가 찰나의 순간에 판단을 내렸다.
"공원파."
그간 잊고 지냈던 공원파가 갑자기 떠올랐다. 무룡은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을 공격하는 거대한 인형을 향해 공원파를 펼쳤다.
무룡이 품었던 몇 갑자인지 헤아리기도 힘든 막대한 양의 내공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인형들이 모두 사라졌다.
"뭐야!"
괴산이노도 사라졌다.
비록 거대 인형을 공격했지만, 사물의 본질을 베어 소멸하는 공원파는 거대 인형과 연결된 괴산이노도 가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괴산 이노와 연결된 수많은 인형도 그 여파에 휘말렸다.
"이게 뭐야!"
이해하기 힘든 일이 발생하자 공포가 사정없이 덮치고, 공포는 혼란을 불러왔다.
무룡의 최후를 감상하려고 눈을 크게 떴던 수천 명 무사가 갑자기 절망으로 얼굴을 바꾼 희망이 준 충격에 넋을 놓았다.
둥, 둥, 둥.
괴산이노는 사라졌지만, 북과 퉁소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북이 무룡의 의지에 반응하여 고동치기 시작했다. 퉁소 역시 연주자가 없는데도 기이한 소리를 냈다.
"도망쳐야 합니다."
위오영의 말에 수뇌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위오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화무룡보다도 못하고 제왕검형을 대성에 가깝게 익힌 남궁가의 소가주보다도 부족하다 여겼는데, 무공이 아닌 사람 자체를 보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 할 아이가 아니었다.
"이유는?"
"괴산이노의 북과 퉁소가 인형만 통제한다고 여겼는데,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주변을 살핀 가주와 장로들이 기함을 질렀다.
"괴산이노가 강한 건 두려움이 없는 인형을 다뤄서가 아니라 사람도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군요."
북소리와 심장 박동을 맞췄던 무사들이 퉁소 소리에 반응해 무기를 뽑아 마구 휘둘렀다.
소노가 살았다면 다양한 곡으로 원하는 사람을 공격하도록 조종했을 테지만, 무룡은 음공을 전혀 모르기에 그저 공격 명령만 흉내 냈다.
"정의연을 탈퇴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이대로는 문파 연합의 개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길밖에 없다. 하는 일이라곤 고작 세차게 짖어서 겁주는 것밖에 없을 거고, 언젠간 멀쩡한 사람을 물어 미친개로 몰릴 것이다.
미친개는 줄에 묶인 채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는 말로밖에 없다.
"새로운 단체는 우리 늙은이들이 뒤로 빠지고 위 소협이 많이 나서줘야겠소."
#
무언독왕이 혼자서 육천 명이나 되는 정의연의 무사를 죽였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졌다.
사람들은 어느새 무언독왕을 검극과 나란히 두고 언급했다. 마교 교주 사마영의 생사가 불분명하지만, 검극에게 패했다는 확실한 소문이 있기에 벌써 무언독왕보다 밑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
"도망쳐야 한다."
대장로가 기침을 콜록대며 말했다. 가주와 소가주 모두 죽은 거로 여겨지기에 남궁가에서 대장로의 서열이 가장 높다.
그러나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고, 대장로는 이미 자신이 누울 관을 다 짜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꺼져가는 촛불 신세였다.
"항주 본가를 혼자서 없애고 정의연의 수천 무사를 혼자서 죽인 자입니다.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숨는다고 해도 그 정도로 대단한 자의 안목을 피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개인의 무력은 한계가 있기에 이런 큰일을 벌이려면 거대한 배후 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오판했다.
"누군가가 너에게 이 일을 미리 경고했다고 했지?"
"날짜를 따지면 무언독왕이 나타나기 딱 하루 전입니다. 어쩌면 무언독왕의 무리와 적대하는 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뭐라고 하더냐?"
"그냥 저보고 소주로 가라고 했습니다."
대장로는 더 고민하는 걸 포기했다. 죽음의 기운이 몸을 침식해 사고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남궁인을 장로로 임명하고 소주 분가의 총책임자로 한다."
누구도 반발하는 자가 없었다. 대장로가 현재 남궁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것도 있지만, 무언독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지레 겁먹은 탓이 컸다.
"열여섯 미만과 여자 그리고 가문의 무공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익힌 자들을 추려 피신시킨다. 양주 분가에도 비둘기를 보내 똑같이 지시하고.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 제물을 바쳐서라도 누군지 모를 상대의 분노를 달래야 한다."
남궁인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칠 사람을 뺀 나머지는 그냥 희생하기로 했다.
"제국을 쥐락펴락하면서 남궁씨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일장춘몽에 불과했구나."
장로 중 하나가 탄식했다.
"도주할 자들을 추려서 인명부를 작성한다. 그리고 인명부에 없는 자는 남궁씨로 인정하지 않는다."
몰래 도주하려는 자가 없을 리 없다. 그래서 남궁인은 미리 쐐기를 박아버렸다.
남궁의 성씨가 강한 건 남궁세가 때문이다. 개개인의 무력만 따지면 남궁가와 어깨를 견줄 가문이나 문파가 수두룩하다.
마교만 해도 남궁세가를 열 번 멸문하고도 남을 무력을 지녔다.
죽기 싫어서 도망치더라도 목숨만 부지할 뿐, 남궁가의 이름에 기대 위세를 떨칠 수 없다. 차라리 목숨을 던지는 게 가문의 명맥을 이어갈 자신의 후손에게 좋은 일이다.
남궁인의 주도하에 회의가 끝났다. 장로들이 각자 맡은 소임을 하러 떠나고 대장로도 방으로 돌아갔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혼자 회의실에 남은 남궁인은 노인과 함께 왔던 얼굴이 차가운 소녀를 떠올리며 계속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묘령의 나이로 보이는 소녀를 언제 봤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 작가의말
고노와 소노의 인형 다루는 무공의 이름은 고소신공입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