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독왕
남궁세가는 현재 항주는 물론이고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가문이다.
정의연을 이끌어 마교를 소멸했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던 황태자비까지 폐위시킨 어마어마한 위세의 가문이다.
자연스럽게 남궁가 대장원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턱의 위치가 예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남궁가의 뿌리가 강호에 있는 게 맞아 초라한 행색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함부로 무시하진 못했다.
그래서 때가 꼬질꼬질한 남루한 옷차림의 거한이 내미는 서신을 함부로 거절하지 못하고 안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아직 겸손을 조금이나마 간직한 문지기들과 달리, 남궁세가 항주 본가의 총관 오역번은 겸손 따위를 개 줘버린 지 오랬다.
상대의 행색을 전해 들은 오역번은 가주 앞으로 가는 편지를 자기 선에서 차단했다.
천하를 경영하느라 노고가 태산인 가주를 이런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가주를 뵈려거든 신분을 밝히시오."
타고난 성격부터 안하무인이지만, 상대 덩치를 보니 살짝 겁이 나서 처음 계획과 달리 신분을 물었다. 원래는 그냥 트집을 잡아 쫓으려 했다.
그런데 오 총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가락으로 편지를 가리키기만 했다.
오역번은 직접 편지를 뜯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가주한테 올라가는 모든 물건은 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총관들이 먼저 개봉하게 되어 있다.
물론, 편지 내용까지 읽는 건 월권이다.
그러나 상대의 무례함에 분노한 오 총관은 세가의 규칙을 어겨 편지 내용까지 확인했다. 편지 내용은 오 총관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부채질까지 했다.
"저놈을 생포해라."
편지에는 글자가 많지 않았다. 안부도 없고 겸양의 말도 없이 그저 남궁세가의 피독주를 내놓으라는 내용뿐이었다.
문지기 하나가 대문 안에 있는 끈을 당겨 종을 울렸다. 남은 자들은 창을 들고 남루한 차림의 거한을 덮쳤다.
갑자기 빛살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이재에 밝으나 무공은 평범한 오 총관은 자신이 본 장면이 믿기지 않았다.
상대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문지기들 손에 들린 창이 모조리 토막 났다.
"오, 오지 마."
그러나 오 총관의 애원이 가득 섞인 말에도 상대는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대 손이 검 자루를 잡는 걸 본 오 총관은 오줌을 지리며 비명을 질렀다.
오 총관의 비명은 꽤 오래갔다. 그리고 가랑이의 축축한 느낌 때문에 정신을 차린 오 총관은 자신이 멀쩡함을 발견했다.
단, 손에 들고 있던 편지가 사라졌다.
'난 이제 죽었다.'
원래 별거 아닌 일을 자신이 설치다가 크게 키웠다. 이 일의 끝이 어떻게 되든 오 총관은 남궁세가 총관 자리에서 쫓겨난다.
최악의 경우 검에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오 총관은 여전히 부들거리는 사지를 애써 움직여 엉금엉금 기었다. 검을 뽑은 사내는 어차피 남궁세가의 무사들 손에 죽을 테니 오히려 남궁가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큰길 대신 작은 골목으로 기어갔다.
다행히 오랜 장원이어서 가까운 곳에 잡다한 건물이 많았다. 오 총관은 늦지 않게 골목으로 들어가 개 우리로 보이는 곳에 몸을 비집어 넣고 팔다리의 떨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무룡은 강호의 일을 잘 모른다. 특히 남궁세가와 같은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오역번이 남궁가의 일개 말단 총관임을 알 턱이 없는 무룡은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했다고 여겼다. 게다가 상대가 자신을 생포하려 하자 애써 바꾼 얼굴이 간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오해로 다시 편지를 전달하는 대신 무력으로 피독주를 얻어내기로 했다.
'창연검蒼鳶劍.'
무룡이 마주한 건 남궁세가의 대표 검법 중 하나로 유명한 창연검법이었다.
화산파의 자하검법보다 태청검법이 더 유명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대단한 검법이면서 많은 사람이 익힌 덕분에 더 대단한 검법보다 훨씬 널리 알려졌다.
그만큼 어떤 검법인지 잘 알려져서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한텐 잘 안 먹힌다. 그리고 무룡은 북천검도 일 검에 당황케 할 정도로 검법 수준이 높다.
"가문의 원수다."
창연검의 약점만 정확히 찾아서 콕콕 찌르는 무룡의 검법에 남궁가 무사들이 외쳤다. 남궁가의 원수가 아니라면 창연검을 이렇게까지 분해하여 연구했을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릇 무공이란 똑같이 배워도 사람마다 다르게 성취한다. 남의 무공을, 심지어 사부의 것이라고 해도 맹목적으로 따라 하면 안 된다.
자신이 품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성취하는 것이다.
무릇 무공을 익히는 자라면 타인의 것을 연구하기보다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자신의 수련을 뒷전으로 하고 남의 무공을 자세히 연구할 정도면 철천지원수가 틀림없다는 게 강호의 상식이다.
무사들의 판단은 빠르게 윗선으로 전해졌고, 엉덩이에 천근추를 단 장로들이 움직였다.
남궁세가처럼 큰 가문이 원수가 없을 리 없다. 게다가 정의연을 만들고 마교를 멸하면서 훨씬 많은 원수가 생겼다.
마교의 잔당뿐이 아니라 정의연 소속 가문이나 문파 중에도 남궁가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자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릴 때마다 움직이면 가뜩이나 시린 뼈가 더 쑤신다. 그래서 웬만한 건 무사들에게 맡겨두는데, 가문의 원수라는 말에 절로 튀어 나갔다.
"놈!"
대연검大衍劍을 극성으로 익힌 장로가 먼저 외친 다음 무룡을 공격했다. 자신을 등진 무룡을 그냥 공격하면 암습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그리고 곧 자존심을 챙긴 자신을 탓했다. 고개도 안 돌린 무룡이 뒤로 뻗은 검에 심장이 뚫린 장로는 마지막 숨을 뱉을 때까지 눈을 감지 못했다.
장로가 일 검에 죽자 무룡을 에워싸고 공격하던 무사들의 검이 어지러워졌다. 장로가 등장하기 전까진 부상자는 생겨도 사망자는 없었다.
그래서 무룡을 창연검의 약점을 속속 파악하여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로만 여겼는데, 대연검으로 유명한 장로가 일 합에 죽는 걸 보니 간담이 서늘했다.
무룡은 말로 안 된다는 생각에 검을 뽑았으나 상황을 걷잡을 수 없는 데까지 끌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연검을 익힌 장로가 너무 강해 죽이는 외에 따로 대처할 수단이 없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으니 속전속결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 물러나자는 생각에 검에서 사정을 거뒀다.
연이어 달려온 장로들이 길어야 세 합을 못 버티고 무룡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남궁가 무사들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지역마다 무인의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 딱 잡아떼서 말할 순 없지만, 웬만하면 일류 수준으로 평가받을 무사들이다.
그러나 살기를 담은 무룡의 칼질을 막기에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뇌전검대를 보내라."
보고를 받은 남궁 가주가 명령을 내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가주라는 자리는 웬만해서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 경박하게 보일 뿐이 아니라 가주가 나서서 실패하면 재기하는 어려움이 몇 배로 커진다.
감당하기 힘든 상대는 차라리 피하는 게 낫다. 잠시는 조롱과 비난을 받겠지만,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가주가 건재해야 한다.
뇌전검대는 뛰어난 경공과 살상 검법을 익힌 자들이다. 무인으로서의 완성은 기대하기 어렵고, 그저 평생 사람 죽이는 칼로 쓰일 존재들이다.
대부분은 사생아인데, 검극은 자질이 너무 출중하여 뇌전검대에서도 거부했다.
"가주,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최근 남궁가의 비전인 제왕검형帝王劍形을 무형無形의 경지까지 익힌 소가주가 나섰다.
"어쩌려고?"
"뇌전검대가 정신을 빼놓는 사이에 패왕형覇王形으로 기습하겠습니다."
제왕검형에서 기습에 유리한 건 월왕형越王形이다. 오월쟁패 때 서시를 오나라 왕에게 바쳐 미색으로 국정을 소홀케 유도하고 와신상담하여 복수한 월왕 구천의 음험함을 빗대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대결하는 패왕형을 암습의 용도로 쓰겠다고 하니 소가주의 제왕검형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이 가능했다.
"그래. 무리하지는 말고."
이미 백 년에 가까운 기간 제왕검형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무공 자질보다는 성품 때문에 다음 대 가주로 점지한 소가주가 근래에 갑자기 제왕검형을 높은 수준으로 성취하자 마음이 더없이 기꺼웠다.
"악적을 처단하고 오겠습니다."
가주의 허락을 받고 밖으로 나온 소가주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가문에서 열 명은커녕 서른 명 안에도 들기 힘든 무공 실력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오대비문의 하나인 남화교南華敎의 비약을 먹은 후 제왕검형을 대성에 가깝게 익혀냈다.
이젠 중원일룡中原一龍으로 불리는 화무룡을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할 자신이 있지만, 마교는 이미 지리멸렬하여 무공을 뽐낼 기회가 없었다.
'이 기회에 무명武名을 남겨야겠다.'
남궁가의 소가주라는 신분이 아닌 제왕검형의 주인이라는 무명.
싸우는 곳에 도착해 보니 뇌전검대가 고전하고 있었다. 무룡은 뇌전검대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검을 이해했고, 마환기공으로 웬만한 공격은 그냥 무시했다.
변검이나 환검 같은 속임수가 전혀 안 먹혀 웬만한 검법은 무룡 앞에서 위력이 몇 토막 나는데, 뇌전검대의 살상에 목적을 둔 빠르기만 하고 위력은 다소 부족한 검법은 무룡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저 경공이 출중한 덕분에 쉽게 안 죽고 버티는 수준이었다.
소가주는 월왕형으로 존재감을 적당히 낮춘 다음 몰래 패왕형을 준비했다. 무형의 경지를 완성했으면 준비 기간이 훨씬 짧았을 텐데, 아직 초입이어서 서두르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목숨을 던져서라도 임무를 완성하고야 마는 뇌전검대는 소가주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잘 버텼다.
별 위협은 안 돼도 날파리처럼 귀찮은 뇌전검대를 어렵게 처리한 무룡은 하인 하녀를 비롯해 기운이 평범한 자들을 무시하고 그냥 앞으로 걸었다.
그때 미약하던 기운 하나가 급격히 커지더니 뒤에서 기습했다.
무룡은 맹룡도로 마환기공을 극성으로 일으키는 동시에 호세도로 외기를 움직여 몸을 허공에 띄우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검은 위로 살짝 뜬 무룡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공격 궤도를 수정했다.
'검극?'
직접 맞아본 적은 없지만, 검극의 심검과 아주 유사한 공격이었다.
무룡은 전신뇌와 검룡을 단전에 품었다. 그리고 자하구를 품었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먹었다.
열매의 역할은 여의주가 된 자하구와 용이 된 검룡에게 인연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독룡담에 있는 자하구와 단전에 있는 검룡은 열매를 통해 조금씩 교류하고 있었다.
전신뇌는 자하구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이고, 남궁가에서 찾는 피독주 역시 같은 역할이다.
굳이 남궁가의 피독주를 고집한 건 독고현천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냥 효능만으로 봤을 땐 사용해도 되는 피독주가 몇 개는 더 있다.
소가주의 제왕검형이 대단하긴 하나 무룡의 마환기공을 뚫고 몸에 아주 대단한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단전을 노린 공격이 자하구와 검룡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새로운 짝을 만들려던 자하구는 갑자기 끊어진 연결에 분노하여 독을 마구 풀었다.
소가주는 검을 맞은 무룡이 무력하게 쓰러지자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채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무룡의 몸에서 나온 독이 소가주의 몸을 녹여 없앴다.
흰색의 자하괴독과 검은색의 이룡의 독이 섞여 회색으로 보이는 독이 남궁세가의 장원에 퍼졌다.
사람도 녹이고 나무도 녹이고 돌도 녹이고, 심지어 물마저 없앴다.
그렇게 퍼지던 독이 대장원의 담장에 닿자 멈췄다.
그때 쓰러져서 미동도 안 하던 무룡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자위가 사라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무룡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남궁가의 커다란 장원을 잠식했던 독 안개가 서서히 무룡 몸으로 빨려갔다. 독을 다 회수한 무룡은 뻣뻣한 걸음으로 가주전이 있던 곳으로 가서 땅을 팠다.
한참 땅을 파던 무룡이 새까만 돌덩이를 찾아냈다. 무룡이 남궁세가를 방문한 목적인 독고현천이 남긴 피독주였다.
무룡은 피독주를 들고 한참 망설이다가 꿀꺽 삼켰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어서 왜 여길 왔던지 생각나지 않는 탓이었다.
"복수."
피독주를 삼킨 무룡은 다음에 할 일을 복수로 정했다. 이미 세운 계획을 다 까먹은 탓에 떠오르는 몇 개 단어 중 가장 와닿는 걸 목표로 했다.
"소주, 남궁가."
목적지를 정한 무룡이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다 점점 걸음이 능숙해져서 달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경공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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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거지꼴을 한 사내가 경공을 펼쳐 도망치는 걸 보고도 오역번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사실 거지 사내보다 남궁가의 처벌이 더 무서운 탓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남궁가에서 자신을 잡으러 무사들이 나오는 기척이 없자 궁금함을 못 참고 개 우리에서 나왔다.
조심조심 걸어서 담장으로 간 오역번은 귀를 대고 안의 기척을 엿들으려 했다. 그런데 별로 몸을 기대지도 않았는데 담장이 풀썩 무너졌다.
"아니야, 내가 한 거 아니야."
자신이 무너뜨린 곳을 시작으로 남궁가의 담장이 줄줄이 무너지는 걸 본 오역번이 절망 가득한 목소리로 울먹였다.
"어?"
그러나 곧 대장원의 상황을 확인한 오역번은 울음을 멈췄다. 뺨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고 도랑물에 머리를 완전히 잠그기도 했으나 눈에 보이는 장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대장원은 어느새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못 남긴 채 폐허가 되었다.
오역번은 뒤늦게 나타난 포졸들에게 잡혀 관아로 갔고, 자신이 본 걸 그대로 얘기했다.
그러나 오역번의 진술을 믿지 못한 포두들이 고문을 거듭했고, 고문을 못 견딘 오역번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강호에는 무언독왕無言毒王의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 작가의말
무룡이 강호 전체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재벌 2세의 습격으로 머리가 해까닥 해서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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