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행방
번쩍 뜬 무룡의 눈에 하얀빛이 서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왜 싸우지?'
따로 운기할 순 있어도 하나로 합쳐진 거나 다름없던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이 무룡의 몸에서 격렬하게 다퉜다.
소멸이 아닌 제압을 목적으로 한 싸움이긴 하지만,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인지 목숨을 건 혈투처럼 치열했다.
'수련인가?'
수십 혹은 수백 개 혈도에서 동시에 마환기공의 음기와 자하신공의 양기가 부딪쳤다. 음기와 양기의 충돌로 혈도가 더 단단하게 단련되었고, 충돌의 여파로 주변 혈도들도 강해졌다.
보이는 행태는 양기와 음기가 혈도를 독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이지만, 무룡의 입장에선 정말 효율적인 혈도 단련법이었다.
몸 안에서 거대한 두 기운이 쉬지 않고 충돌하는 바람에 무룡은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자하신공 구 단계를 이뤄 자하괴독의 방해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깔개에 궁둥이를 붙인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
그간 천환서고에서 이십 만 권이 넘은 책을 읽은 덕분에 무룡의 무의식엔 수많은 지식이 쌓였다.
덕분에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이 다투는 이유가 문뜩 머리에 떠올랐다.
'자하신공이 음기를 배척하기 때문이구나.'
오독교에서 먹은 만년 하수오 때문이었다. 마환기공은 딱히 기운의 성질을 따지지 않는다. 음기든 양기든 무조건 받아들이는 무공이다.
그러나 자하신공은 양기가 구 할을 차지하는 극양에 가까운 심법이다.
구 단계를 완성한 자하신공은 몸에 가득한 음기를 소멸하거나 밖으로 쫓으려 했다.
마환기공은 품은 기운의 칠 할에 이르는 음기를 배제하는 자하신공에 반기를 들었다. 성질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많으면 되는 마환기공으로선 자하신공의 행태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키려는 자와 쫓으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이 길어지며 더 많은 혈도를 차지하는 게 승리하는 길임을 깨닫고부터 단순히 밀고 당기던 양상이 혈도 쟁탈전으로 변모했다.
'위험하다.'
싸움이 점점 격렬해지며 무룡의 몸 곳곳에서 대나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싸움이 길어짐에 따라 마환기공이 점점 많은 음기를 그러안으며 자하신공이 강해졌다. 양기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기운 자체는 적어도 힘은 오히려 세졌다.
강해진 자하신공이 승기를 조금씩 잡아가며 음기를 몰아내고 소멸했다. 그에 위기를 느낀 마환기공이 음기를 더 강하게 뭉친 다음 그간 수많은 독을 상대하며 배운 싸움 기술로 자하신공에 거세게 저항했다.
지난 세월 하나처럼 움직이며 무룡의 목숨을 지켜주던 두 무공이 반목하여 오히려 무룡의 몸을 위험에 빠뜨렸다.
기운의 크기나 운용 기술은 마환기공이 우위이고, 기운을 활용하여 내는 힘은 자하신공이 우위다. 차라리 하나가 압도적이어서 승리하면 나았을 텐데, 각자 자신의 우위를 철저히 발휘한 탓에 싸움의 승패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졌고 충돌은 격렬해졌다.
'내 편이 하나 남았지.'
책의 내용 대부분을 무의식에 쌓아둔 탓에 무룡의 지식은 얼마 늘지 않았다. 대신 지혜가 늘어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에 이르는 일이 자주 생겼다.
무룡은 마음을 다잡고 벽파공을 운기했다. 자하신공과 달리 지속하여 순환할 수 없어서 여태껏 방치했던 벽파공이다.
'굳이 벽파공의 운기 경로를 따를 필요가 있을까? 거센 흐름으로 최대한 많은 혈도를 단련하고 기운의 움직임을 활발히 한다는 오의만 지키면 되지.'
살고 싶은 의지, 자하동의 비밀을 풀어 추영과 아이를 구하고 싶은 의지, 절세의 무공이라곤 하나 고작 무공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오기.
그 밖에도 수많은 의지가 겹쳐 맹룡도에 올라탔다. 굳센 의지를 등에 업은 맹룡도가 벽파공의 찰랑대던 파도를 크게 키워 무룡의 전신을 적셨다.
파도는 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아무리 강한 파도여도 뭍에 닿으면 스러진다.
벽파공이 사라진 단전 위치에서 늘 사그라든 이유다. 벽파공에 있어서 단전은 파도의 시작이자 끝이기에 단전 위치에만 가면 물살은 잦아든다.
그러나 맹룡도로 움직인 벽파공은 달랐다. 무룡의 수백 개 혈도 모두가 파도의 시작이고 끝이다. 하나의 파도가 끝나면 새로운 파도가 생기고, 새로운 파도가 생기면 하나의 파도가 사라졌다.
편법으로 이룬 일기관통처럼 무룡의 벽파공 역시 벽해청공碧海晴空의 경지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편법으로 이룬 것이기에 상응하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의 싸움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벽파공의 파도로 기운이 마구 뒤섞인 탓에 자하신공이 약해졌다. 음기 위주로 기운을 뭉쳐 자하신공에 대항하던 마환기공 역시 제멋대로 섞인 기운 때문에 혼란을 느꼈다.
파도가 거셀수록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의 투지가 꺾였고, 끝내 자하신공이 음기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무룡의 목숨을 위협했던 내부 투쟁이 멈췄다.
'음은 음이고 양은 양이다. 음이 양이면 양이 음이다. 구분하면 음양이요 구분하지 않으면 태극이다.'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이 멈추고 벽파공만 거센 파도를 휘몰아 무룡의 전신을 누볐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이 무룡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갔다.
기초가 부실하여 경지가 오를수록 위험하지만, 무룡은 현재 경지를 올리는 게 위험함을 전혀 몰랐다.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은 하나이자 둘이다. 음기와 양기도 하나이자 둘이다. 나와 추영은 하나이자 둘이다. 세상과 나는 하나이자 둘이다.'
구분이 사라지며 분계선이 더 명확해졌다.
#
자하신공이 십 단계에 이르렀다.
음기를 최대한 배척하던 구 단계와 달리 십 단계에 이른 자하신공은 음기는 그대로 두고 양기만 뽑아서 사용했다.
'음기를 포용할 수 있다면 십일 단계에 이를 것이고, 음양의 구분을 잊으면 십이 단계에 이르겠구나.'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무룡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비록 편법으로 빠르게 올린 경지여서 그에 부합하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고 심법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지만, 자하신공 십 단계의 성취가 하찮은 것도 아니어서 얻은 게 없진 않았다.
'사상누각이구나.'
차라리 십 단계에 이르지 않는 게 훨씬 안전한 상황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이 다투는 상황보다 작은 삐끗거림에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 현재 상태가 훨씬 위험하다.
'추영과 아이를 구할 때까지만 버텨다오.'
기초가 부실한데 건물은 하늘을 찌른다. 작은 바람에도 휘청하여 무너지는 상황이다.
'비밀을 풀자.'
무룡의 마음은 자하동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조급해졌다. 자하신공 십 단계가 무너지는 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만, 자칫 그 여파에 목숨을 잃거나 거동 능력을 잃으면 추영과 아이를 구할 사람이 없다.
무룡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공동의 중앙에 갔다. 규칙적인 구형 공동이 아니지만, 무룡은 그곳이 공동의 중심임을 확신했다.
'틀림없다.'
무룡은 공동의 중심에 우두커니 서서 불안하게 날뛰는 마음을 다독였다.
'이 방법은 반드시 통한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무룡은 넘치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과 걱정을 쫓아냈다.
그리고 드디어 공동에 빛이 드리웠다.
무룡은 심호흡을 한 뒤 자하신공 일 단계부터 십 단계의 운기를 동시에 했다.
다른 사람이면 절대 못 할 재주다. 마환기공 덕분에 모든 혈도를 단전처럼 쓸 수 있고, 벽파공 덕분에 한 혈도에서 여러 기운을 뽑아 따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자하신공이 십 단계에 이르면서 운기 통로가 관도처럼 잘 닦였기에 시도할 엄두를 낼 수 있었다.
무룡의 몸에 놀이 깃들었다.
일세일여의一世一如意
여의여일세如意如一世
벽에는 자하신공의 구결 대신 의미 모를 글자 열 개가 나타났다.
'손청우한테 물어볼까?'
무룡은 절대 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총명하지도 않다.
무공서를 수집하는 취미 덕분에 무인치고는 글자를 많이 아는 노혼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성현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다.
대다수 무인보다는 유식하지만, 글공부를 제대로 한 서생들과는 비교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한 번 더 있지.'
무룡은 조급한 마음을 다잡고 바닥에 궁둥이를 붙인 채 안정을 취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반대편 벽에 빛이 드리웠다. 무룡은 전과 마찬가지로 열 개 운기를 동시에 하여 빛을 냈다.
일세즉일세一世卽一世
여의즉여의如意卽如意
무룡은 고개를 쳐들어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세일여의 여의여일세는 세상이 여의와 같고 여의는 세상과 같다는 뜻이다. 용의 여의주가 세상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이 있기에 딱히 이해하기 힘들지는 않다.
어떤 뜻을 더 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말이 된다.
그러나 일세즉일세 여의즉여의는 위의 말과 상반된다. 세상은 세상이고 여의는 여의다. 세상이 곧 여의이고 여의가 세상과 같다는 처음 말과 모순이다.
'음은 음이고 양은 양인데 음은 양과 같고 양은 음과 같다는 뜻이구나.'
조금 깨달은 바는 있지만, 여전히 여의주의 행방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무룡의 품에 얌전히 있던 자하구가 요동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그러나 자하구가 표현한 안타까움이 여의주의 행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자하동에 여의주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 노력이 헛된 발악이 아니었다는 것이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다.
'찾는 일만 남았다. 찾지 못하면 내가 무능한 것이다.'
무룡은 예전에 추영이 가르쳐준 방식으로 눈 주변의 혈도들에 내공을 돌렸다. 그러나 훨씬 밝아진 눈으로도 특별하거나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뭐든 해보자.'
무룡은 자하신공 일 단계로 운기하며 벽에 나타난 글자를 확인했다. 글자를 다 외운 뒤에 이 단계로 운기하며 추가된 글자를 확인했다.
그렇게 십 단계까지 차근차근 확인한 후, 모든 글자를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속독법과 순심술이 된다.'
천방기사는 천환서고가 아닌 곳에서 속독법과 순심술 모두 효과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무룡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순심술을 펼쳤다.
무룡의 심상에는 여의 두 글자가 명확하게 맺혔다.
무룡의 뇌리에 만 갈래 벼락이 떨어졌다.
'천방기사는 이 세상에서 속독법과 순심술이 먹히는 곳은 천환서고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니라면?'
무룡은 자신이 세운 가설에 이미 얻은 정보를 하나씩 대입했다.
세상이 여의이고 여의는 세상과 같다. 이는 여의주가 이 세상에 속해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은 세상이고 여의는 여의다. 이는 세상이 여의를 품었으나 여의가 독립적임을 의미한다.
'오독교의 교주전.'
세상에 속했으나 별천지로 느껴지던 특이한 건물.
'설마!'
무룡은 황급히 밖으로 달렸다. 이젠 능숙해진 운기로 자하동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무룡은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자하동의 문이 서서히 닫혔다. 무룡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 앞에 놓인 가죽 주머니를 들춰 안에 음식을 꺼내 입에 넣었다.
질근질근 씹던 음식이 꿀꺽 목구멍을 넘어가는 동시에 자하동의 문도 완전히 닫혔다.
'찾았다!'
- 작가의말
주인공은 뇌 성능이 뛰어나지만 배움이 얕아 사고 능력이 부족합니다. 슈퍼컴퓨터에 win 95를 깔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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