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인심
무룡은 체력이 뛰어나고 덕구는 내공이 깊다. 계혼은 체력도 뛰어나고 내공도 나이에 비교해 많은 편이다.
덕분에 셋은 하루에 삼백 리씩 달려 열흘 만에 화산에 도착했다.
한계에 가깝게 몸을 움직인 셋은 멀쩡한데 등에 업혀서 온 세 아이가 화산에 도착하기 무섭게 고열을 앓으며 드러누웠다.
"사형, 거사는 며칠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무룡과 계혼이 떠난 사이 청우는 대사형이 되었다. 그리고 편지로 정의연 소맹주인 화무룡이 화산 장문인 직을 맡을 생각이 없다는 확답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대사형인 청우가 그간 공석이던 화산 장문인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화산과 가깝게 지내는 가문과 문파들에 초청장을 보냈고 거래 관계에 있는 지역 유지들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당분간 화산은 손님으로 북적댈 것이기에 자하동의 문을 당장 여는 건 어렵다.
"알았다."
어차피 덕구가 음양강수를 분석하고 어떤 성분을 얼마나 추가해 강화할지 연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아이들을 제자로 받는 일도 심사숙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가 걸리는 것이오?"
"아이의 언행을 보면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닙니다. 혹시 역도의 가문과 연루되었다면 화산에도 그 화가 미칩니다."
무룡은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제국은 명운이 다했다. 화산이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려면 석람처럼 뛰어난 어린 제자를 많이 받아야 한다."
"차라리 사형이 장문인 자리에 앉으신다면 제가 저 아이들을 제자로 받겠습니다."
"난 사부를 해친 자들을 죽여 복수하고 사제는 화산을 바로잡아 복수한다. 이미 끝난 얘기다."
기꺼이 화산을 위해 헌신할 마음이 있다. 그러나 추영과 아이를 구하는 건 노혼의 복수보다도 더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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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인, 더 미룰 수 없소."
장문인 취임식을 위해 황도길일을 골랐다. 그리고 열두 시진 중 가장 길한 시진을 정해 취임식을 진행하기로 했는데, 정해진 시진이 거의 끝나는데도 객석이 텅텅 비었다.
그나마 거래 관계에 있는 유지들은 못 와서 미안하다는 편지라도 보냈으나 대부분 문파와 가문은 그만한 체면조차도 화산에 주지 않았다.
"바로 취임식을 시작한다."
야박한 강호의 인심에 손청우는 마음이 단단히 상했다.
'결국엔 힘이구나.'
힘을 잃으니 화산의 옛 명성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조형래가 수완을 부려 화산을 어느 정도 지탱했는데, 조씨 가문이 사라진 지금 화산파의 위신은 바닥을 뒹굴었다.
침울한 분위기 가운데 개파조사의 위패를 모시고 모든 화산 제자가 함께 절을 올렸다. 무룡과 계혼 역시 가장 뒤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했다.
"전검傳劍을 하겠습니다."
청우가 종남파의 홍혈검弘孑劍 손에서 자하검을 받아 두 손으로 받쳐 높이 들었다.
원래는 전대 장문인이나 장로 중 가장 배분이 높은 자가 전해야 하지만, 상황이 여러모로 여의치 않아 유일하게 하객을 보낸 종남파의 명숙에게 부탁했다.
"하하. 노혼 아우의 제자가 화산 장문이 되다니. 오늘 한번 거하게 취해야겠구나."
자하검을 건넨 홍혈검이 호탕하게 웃었다.
"자리를 빛내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겨울이 추울수록 매화는 더 아름답게 핀다. 내가 본 노혼이 그랬다. 비록 초면이긴 하지만, 노혼의 제자이니 훌륭한 장문인이 되리라고 믿는다."
청우는 속이 오만함으로 가득하지만, 그걸 겉으로 표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홍혈검의 말을 듣고 나니 꼭꼭 눌러뒀던 오기가 불쑥 치밀었다.
'사부가 화산이고 사형이 화산이고 내가 화산이다.'
청우는 내내 고민하던 문제를 충동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제가 제자를 받으려고 하는데 홍혈검께 공증을 부탁드립니다."
"그거 좋지. 그거 좋아."
청우는 바로 석람과 석군 그리고 석연을 불러 배사지례를 올리게 했다. 똘똘한 석람이 정확히 예를 올렸고 두 동생은 석람이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했다.
"석람. 넌 화산 장문인인 나 손청우의 제자이자 화산파의 대사형이다. 무엇보다 화산의 명예를 우선시해야 하고 다른 사제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지를 자르고 단전을 파할 것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습니다."
일부 손청우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자들도 있었지만, 강호에 유명한 검객인 홍혈검이 공증을 섰기에 감히 반발하고 나서지 못했다.
"내가 옥허심법에 맞춰서 만든 검법인데 네가 첫 전수자가 될 것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새겨 두어라."
말을 마친 손청우가 자하검을 뽑아 휘둘렀다.
날의 길이가 사 척 이 푼이 되는 보검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차가운 기운을 흩뿌렸다. 어느 정도 무공에 조예가 있는 자들은 손청우의 검에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흩날리는 눈꽃을 느꼈다.
"매화검법이다. 아름다운 매화는 혹독한 추위에만 핀다는 걸 명심해라."
원래는 빙설검법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홍혈검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매화검법으로 바꿨다. 어차피 눈꽃이 매화를 닮았기에 너무 억지도 아니었다.
"화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매화처럼 고고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으하하. 화산이 와호장룡이었구나. 다음 대 장문인까지 걱정이 없으니 화산의 성세가 멀지 않구나."
말을 마친 홍혈검이 술 단지를 들고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화산 제자들도 그 호기에 감염되어 커다란 대접을 들고 입에 술을 쏟았다.
"그저 하늘이 위에 있을 뿐, 그와 나란히 하는 산이 없더라."
어떤 시인이 화산의 고고함을 찬양한 시구다.
"고개를 드니 해가 가깝고 머리를 숙이니 구름이 보이누나."
누군가가 손청우의 말을 받아 시의 남은 구절을 읊었다.
"오검화산傲劍華山 의기천추義氣千秋."
화산의 검은 고고하고 의기는 영원하다.
손청우의 선창에 화산 제자들이 오검화산 의기천추를 목 놓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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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무룡과 계혼과 덕구 그리고 손청우까지 계곡에 있는 자하동의 문 앞에 모였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우연히 발견하더라도 문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거요."
손청우가 정식으로 장문인이 되었기에 무룡도 더는 하대하지 않았다.
"그냥 바위라고 생각하지 누구도 문이라고 생각지 않았겠죠."
문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뒀다면 문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모르고 보면 그저 바위로 생각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사형과 사숙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무룡과 덕구와 달리 청우와 계혼은 독에 취약하다. 덕구는 둘을 꽤 먼 곳까지 물러나게 한 다음 물에 가루를 탔다.
"빨리 부어야 합니다. 황동 주전자가 녹으려 합니다."
무룡은 황급히 주전자를 기울여 안에 든 음양강수를 문에 부었다.
칙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한가득 피었다.
"사부, 어떻게 됐습니까?"
성격이 급한 계혼이 그새를 못 참고 질문했다.
"실패다."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자하동의 문은 조금 녹아 사라졌다.
그러나 꼬박 주전자 하나를 써서 겨우 조족지혈에도 못 미치는 양을 없앴다. 천하에 오독신충처럼 특별한 독물이 흔한 것도 아니니 음양강수로 자하동의 문을 녹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오독교에 준 독들까지 다 가져와도 채 한 치를 녹일 수 없다.'
허탈한 나머지 무룡은 땅에 주저앉았다. 자하동으로 들어가는 게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무룡이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추영과 아이를 구해 도망친다든가 괴물을 어떻게든 죽인다든가 하는 선택들은 너무 불확실하고 위험하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마교도 굳이 애타게 자하신공을 익힌 사람을 찾진 않았겠지.'
사실 예전부터 염두에 둔 생각이긴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두려고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만약 자하동으로 들어갈 만한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마교가 굳이 화진악이나 화무룡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문영에게 자하신공을 익힌 사람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자는 누굴까? 마교 장로인 후문영이 왜 마교의 이익에 반하는 명령을 따랐을까?'
"사형. 정기관의 제 침실에 기관이 있습니다. 열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음양강수라면 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뭔가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전에 우선 자하단부터 수습해야겠소."
수백 년이나 되는 기간 화씨 가문이 자하동의 비밀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그걸 글로 적어서 비밀리에 보관했을 수도 있다.
무룡은 억지로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가 꺼질까 봐 두려워 바로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자하단을 핑계로 시간을 끌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일행은 무룡을 따라 자하단을 묻은 곳으로 갔다.
"저기, 사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계혼이 말을 더듬거렸다.
"말씀하신 자하단이 혹시 여기에 단지로 묻은 까만 단환입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혹시 아주 귀한 물건입니까? 제가 모르고 다 먹어 치웠습니다."
노혼이 죽은 날 화를 못 참은 계혼은 옥녀봉을 떠났다. 마교 장로가 노혼을 비겁하게 죽였는데도 참으라고 하는 손청우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만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계곡으로 왔는데 어딘가 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넘치는 호기심을 못 참은 계혼은 땅을 파서 무룡과 계혼이 숨긴 자하단을 발견했다.
굶주림을 못 이겨 자하단으로 배를 채웠고, 자하단을 다 먹어 치운 다음 결국 배고픔을 못 참고 옥녀봉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네가 내공이 그렇게 빨리 쌓인 거였구나."
자하단은 자하괴독에 대항하려고 만든 약이다. 독에 저항할 수 있게 몸의 기운을 강하게 보충하는 약이니 그저 먹으면 영약이다.
지속하여 작용하는 자하괴독에 저항해야 하기에 약의 기운도 다른 영약과 달리 빨리 유실하지 않고 몸에 오래 남았다.
다행인 건 청웅의 제자들에게 맨날 얻어맞으며 약의 기운이 몸에 잘 흡수되었다. 더 다행인 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옥허심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양기가 대부분인 영약을 낭비하지 않았다.
음기가 더 강한 옥허심법을 익혔다면 약의 기운 대부분이 허망하게 소실되었을 것이다.
벽파검법을 빠르게 익힌 건 타고난 자질과 노력 덕분이지만, 벽파공과 마환기공 수련에 빠른 진전을 보인 건 순전히 자하단 덕분이었다.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있다.'
자하단이 다 사라졌지만, 무룡은 오히려 용기를 얻었다.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 계혼에게 일어났다. 과정 중에 하나만 틀어졌어도 계혼이 오늘의 성취를 이룰 수 없었다.
'뜻이 있는 자에겐 길이 있다.'
마음을 추스른 무룡은 손청우와 함께 정기관의 장문인 침실로 향했다.
- 작가의말
계혼이 검법에는 천재인 건 맞지만, 내공 성취가 빠른 건 순전히 자하단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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