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혼분투
며칠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끝낸 셋은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사질의 임무가 중하다."
"반드시 본때를 보이겠습니다."
좀처럼 조양봉을 안 벗어나던 손청우와 노계혼이 옥녀봉의 정기관을 방문했다. 둘도 화산에 적을 올린 정식 제자이니 정기관을 방문하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사형인 청웅을 대놓고 오줌싸개라고 말하며 다니는 손청우와 같은 배분은 물론 한 배분 많은 제자들한테도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으며 배신자라고 악을 바락바락 쓰는 노계혼의 방문은 예삿일이 아니다.
"청웅 사제 계신가? 오랜만에 옥허검을 좀 가르치고 싶은데 어디 계신가? 혹시 어젯밤 적신 이불을 빨아 너느라 시간이 없으신가?"
명목상 대사형인 청웅을 대놓고 놀리는 데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손청우의 눈이 작정하고 사고 치려는 사람처럼 희번덕거렸다.
장안의 조가장에 작은 변고가 생겨 많은 제자가 화산을 떠난 상태라 누구도 손청우를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부. 청웅 사숙도 이젠 어른인데 직접 오줌 싼 이불을 빨겠습니까? 밑에 혀로 핥아서라도 이불을 깨끗하게 빨아줄 똥개들이 여럿 있는데 말입니다."
둘이 난리를 치자 사람들이 연무장으로 슬슬 몰려들었다. 그러나 손청우가 두려운 청웅은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야, 너 청웅 제자지? 네 사부는 오줌만 잘 싸는 줄 알았는데 겁쟁이기도 하구나."
"사숙께선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어허, 사백한테 감히 사숙이라니. 그리고 오줌 잘 싸는 게 어때서? 몸이 건강하니까 오줌도 술술 나오는 것 아니겠느냐."
"더 그러시면 정식으로 장로회에 불경죄로 회부하겠습니다."
손청우는 뒷짐을 지고 물러났다. 오늘 활약해야 할 사람은 손청우가 아닌 노계혼이다.
"사부끼리 불화가 있으면 그걸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제자된 도리지. 사제, 와서 내 죽검을 받으시게."
"서열상 내가 사형이다."
"마교가 정기관 연무장에서 불의의 검을 휘두를 때 넌 어찌했느냐? 네가 화산이라는 이름에 한치 부끄러움이 없다고 떳떳이 말하면 내가 사형이라고 불러줄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교에 맞선 어린 제자는 노계혼만 빼고 다 죽었다. 청웅의 제자는 그날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노계혼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만,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고 청웅의 제자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았다.
"사제. 개소리 말고 나와서 내 죽검을 받아. 특별히 넌 진검을 사용해도 좋다."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화가 되어 충동을 일으켰다. 머리가 뜨거워져 사고할 능력을 잃은 청웅의 제자는 목검을 들고 노계혼의 앞에 섰다.
보통은 죽검이 목검보다 낫지만, 잘 만든 목검은 죽검보다 몇 배나 휘두르기 편하다. 무기에선 노계혼이 손해였다.
'죽인다.'
검을 잡고 마주 서자 노계혼은 살심을 키웠다. 벽파검법을 처음 전수하던 날 무룡과 나눴던 대화가 절로 머리에 떠올랐다.
- 사질, 벽파검법의 요체가 뭐라고 생각해?
- 틈을 안 주고 몰아치다가 틈을 발견하거나 만들어서 찌르는 검법입니다.
- 틀렸다.
그때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비록 노혼의 가르침을 한 글자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을 벽파검의 후계자로 여겨 이름도 노계혼으로 바꿨다. 그리고 나름대로 벽파검법을 연구하고 어떻게든 익혀내려고 몇 년이나 애썼다.
- 벽파검법은 살인 검법이다.
- 네?
- 죽이고자 하는 상대는 반드시 죽이는 것.
'오늘 널 반드시 죽인다.'
노계혼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대신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늘 두들겨 패던 노계혼을 만만하게 보고 나선 소년의 몸이 굳어버렸다. 사부의 명에 따라 억지로 노계혼을 괴롭히다가 재미를 붙여 매일 찾아갔던 가벼운 마음의 소년과 달리 노계혼은 염두에 생사를 담았다.
당연히 기세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상대가 틈을 보이자 노계혼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죽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목검을 움직여 세 번의 공격을 막았지만, 노계혼이 공격 속도를 한 단계 올려버리자 속절없이 얻어맞기만 했다.
노계혼은 집요하게 상대 머리를 노렸다.
"그만, 그만!"
연속으로 얻어맞은 소년이 목검을 버리고 양팔로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외쳤다.
"네놈 가슴엔 진정 화산이 없는 것이냐? 네가 화산 제자라면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터지더라도 검을 놓치지 말았어야지."
노계혼의 훈계에 목검을 버린 제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노계혼의 말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노혼 사조가 다음이라고 했을 때 마교에선 겁먹지 않았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노계혼의 말은 뻔했다.
너희는 마교보다도 못한 놈들이다.
"내가 당신 검을 받아보겠소."
청웅의 제자 중 한 명이 바닥의 목검을 주워 잡았다. 노계혼은 상대의 검이나 눈보다 검을 잡은 손을 먼저 주시했다. 파지법이 꽤 훌륭했다.
'저런 놈은 몰아치는 것보다 속이는 게 낫다고 하셨지.'
무룡은 비록 실전 경험이 많진 않지만, 비검대회에서 결승까지 갔을 정도로 벽파검법에 대한 이해가 깊다.
직접 몸으로 펼치는 건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이론만큼은 노혼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그런 무룡의 가르침을 노계혼은 아주 빠르게 흡수했다. 몇 년이나 청웅의 제자들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실전 경험이 정말로 풍부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경험이어서 너무 편중된 게 문제긴 하지만.
'나보다 더 사부를 닮은 놈이군.'
조양봉에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무룡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노계혼은 쉽게 격동하고 늘 악에 받쳐 산다. 그런 면에서 점잖은 노혼과 정반대인 듯하다. 그러나 벽파검법을 펼칠 때만큼은 둘이 정말 닮았다.
어쩌면 노혼의 마지막 싸움을 보고 몇 년 동안 닮으려고 노력한 성과일 수도 있으나 타고난 부분이 닮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주제에 저렇게 비슷할 수 없다.
노계혼은 연환검을 중간중간 멈췄다. 덕분에 파지법이 훌륭한 상대는 검을 어떤 속도로 휘둘러야 할지 헷갈렸다.
원래대로라면 연환검을 멈춘 노계혼도 초식 전개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무룡의 가르침을 받아 멈추는 시점이 교묘하다. 절대 못 멈출 시점에 억지로 멈추는 게 아니어서 상대만 영향을 받고 노계혼의 공격은 얼마 약해지지 않았다.
'하수 상대로만 먹히는 거라고 했지. 그러니 너무 재미 들이진 말자.'
노계혼은 상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도 흥분하지 않았다. 목표로 삼은 게 노혼이고 노혼이 죽음으로 완성한 가장 위대한 싸움을 직접 목격했기에 작은 성취로 득의양양할 기분이 아니었다.
상대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머뭇거리는 조짐이 보이자 노계혼은 바로 공격 속도를 올렸다. 이번 상대는 끝까지 검을 놓치지 않았지만, 죽검에 연신 얻어맞은 통증에 마찬가지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뭐냐? 마교가 노혼 사조뿐이 아니라 화산의 검도 죽인 것이냐? 차라리 검으로 양물을 자르고 궁에 가서 환관이 되는 게 어떠냐?"
"가르침을 바라오."
세 번째로 나선 자는 청웅의 제자가 아니었다.
"좋다. 오늘 화산제일검의 벽파검법으로 너희들에게 화산이 뭔지 가르침을 내리겠다. 뼈에 새기고 심장에 새기어라."
손청우가 검 자루에 손을 올려놓고 눈을 희번덕거린 탓에 같은 배분은 물론 한 배분 높은 장로회에 속한 자들도 감히 말리지 못했다.
"넌 특별히 노혼 사조의 대제자인 무룡 사백이 화무룡을 궁지에 몬 노도박안의 절초로 상대해 주마."
노계혼은 거짓말을 했다. 노도박안은 벽파검법에서 가장 위력이 강하여 화산 제자 대부분은 익히지 않아도 어떤 초식인지 안다.
노도박안을 경계하는 상대에게 노계혼은 노도박안을 제외한 벽파검법의 초식을 모두 써먹었다. 노도박안을 염두에 둔 상대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연환검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고 손목을 얻어맞아 목검을 떨어뜨렸다.
"화산의 검은 쉽게 떨어뜨리고 다시 주우면 되는 그렇게 하찮은 거였구나. 그래서 마교가 우습게 보고 옥녀봉에서 칼을 마음껏 휘둘러 내 어린 형제들의 목숨을 취했구나."
제자 하나가 나와서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주워 힘으로 부러뜨렸다. 무룡도 순수한 육체의 힘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래도 나이보다 내공 성취가 깊어 보였다.
"네가 아는 것만 화산의 검이 아니다."
'죽인다.'
상대는 단단해 보였다. 노계혼의 현재 성취로는 노릴 틈이 없었다. 이럴 땐 그저 검의를 떠올리며 몸을 던져야 한다.
딱 소리와 함께 상대 목검이 노계혼의 검을 든 팔을 때렸다. 노계혼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왼손으로 바꿔 잡고 계속 휘둘렀다.
원래부터 좌수검을 익혔던 듯 어색함이 없었고 초식의 연계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죽인다.'
머리도 슬슬 뜨거워졌다. 노계혼은 왼손으로 벽파검법을 펼쳐 상대를 압박했다. 익숙지 않은 좌수검 때문에 첫 합에 노계혼의 팔을 때린 상대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계혼은 벽파검을 배운 지 보름 정도밖에 안 되고 벽파공 수련도 겨우 며칠 했다. 기본 토납법 덕분에 내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써먹을 정도도 아니다.
결국 싸움이 길어지자 내공 성취가 높은 상대가 우위를 되찾았다. 기세를 탄 상대의 검이 또 한 번 노계혼의 검을 잡은 팔을 때렸다.
검이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노도박안의 초식이 펼쳐졌다.
상대는 노계혼의 반격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가 노도박안의 초식에 된통 당했다. 승기를 잡은 노계혼은 죽검을 빠르게 휘둘러 상대 팔을 연신 타격했다.
"다음."
노계혼의 눈이 흐릿해졌다. 시공을 뚫고 과거로 돌아간 노계혼의 눈엔 거대한 등이 보였다.
닮고 싶은 등이다.
"다음."
화산을 닮은 등이다.
"다음."
아버지를 닮은 등이다.
"다음."
화산 제자들이 귀신에 홀린 듯 목검을 들고 노계혼 앞에 서고 패배했다. 대결이 계속 이어지다가 열일곱 번째 제자가 나섰고 싸우는 중에 노계혼의 죽검이 부러졌다.
노계혼은 짧아진 죽검을 양손으로 잡고 간격을 순식간에 좁힌 다음 상대 명치를 강하게 찔렀다. 동시에 상대가 휘두른 검이 노계혼의 등을 때렸으나 누가 봐도 노계혼의 승리가 분명했다.
"다음."
- 작가의말
노계혼 같은 성격의 주인공으로 글을 구상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성격이 드세고 고집이 세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주인공 편의를 봐줘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주인공은 늘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만 우연히 늘 좋은 결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직 그 정도 필력이 안 된다고 판단해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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