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과 반목2
눈과 코밑이 빨개진 김연은 묵묵히 유리창 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초첨이 흐린 눈엔 어떠한 풍경도 비치지 않았다.
"형. 우리 버틸 수 있을까?"
동해의 목소리엔 불안이 가득 담겼다. 오래된 집에 피는 곰팡이처럼, 없애도 없애도 또 생겨났다.
"날 믿어."
아버지 기일이어서 김연과 광해는 몸에 수분이 남지 않을 정도로 울었다. 원래 묵직한 중저음인데 목이 잠겨서 더 묵직하게 들렸다.
"가미카제나 역천은 공격하고 수비하며 접전을 벌일 수 있지만, 우린 소금성 빼앗기면 끝이잖아."
즐기자 길드는 길드원이 5백도 안 되는 길드만 합병했다. 5백 명도 안 된 세력이 도시를 점령했을 리 없으니, 즐기자는 여전히 13개 도시를 보유했고, 마을만 50개로 늘었다.
소금성을 뺏기고 다시 국가를 세워도 대부분 도시와 마을을 점령한 세력들이 등 돌릴 게 뻔했다. 초인동맹 혹은 소금성을 차지한 국가에 소속하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가 소금성을 빼앗겨도 남은 세력을 안 받아줄 거야. 만리장성이 다 차지할 거거든. 소금성 빼앗겨도 바로 끝장나는 건 아니야."
"문제는 다른 세력들도 그걸 아느냐는 거지. 밉보일까 봐 소금성 수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텐데."
광해 추측으론 만리장성이 대륙 서남부로 올 것 같았다. 지금 WORLD가 차지한 영토를 만리장성이 전부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만리장성의 지금 위치는 역천과 우르크는 물론 가미카제의 공격도 받을 수 있다.
"걱정 마. 수비만 하는 거라면 자신 있어. 마나포도 많잖아."
광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일행의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복잡하고 불안한 마음과 달리, 차는 거침없이 서울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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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힘을 합쳐 소금성을 공략해야 합니다."
중국 세력들의 회의는 여전히 삐걱거렸다.
"역천과 가미카제가 힘을 합쳐 우리 수도를 공격하면?"
소금성의 위치가 WORLD의 변방이라곤 하지만, 수도가 공격받았을 때 탈것을 타도 30분 안에 초인동맹의 도시로 가서 포탈을 타는 게 불가능하다.
"소금성을 함락해 만리장성 수도로 삼으면 됩니다."
"함락 못 하면? 전문가들이 첫 공격에 함락할 가능성이 30%라던데."
'시발. 이럴 땐 또 전문가 말을 잘 들어요.'
"만리장성 의견이 궁금합니다."
"다른 도시부터 점령하자는 거지. 소금성 주변 도시를 모두 점령한 다음에 안전하게 소금성을 공격하자고. 우리가 수도를 소금성 근처로 옮길 테니까."
'자기들 도시 점령하는 거 도와달란 말이구나. 뻔뻔한 놈이 공산당 간부가 되는 건가? 아니면 공산당 간부가 되면 뻔뻔해지는 거지?'
인구가 15억 정도인데 공산당원이 8천만 명이다. 일개 정당의 구성원이 웬만한 국가 인구보다 많다. 승진할 때 얼마나 뻔뻔한지 시험을 보는지, 지금까지 만나온 공산당 간부는 하나같이 뻔뻔했다.
"북부 도시는 버리겠다는 뜻입니까?"
철혈팔기 대표가 질문했다. 파벌 싸움의 결과 철혈팔기 간부는 대규모로 물갈이되었다. 새로 주도권을 잡은 파벌은 예전 수뇌부처럼 설치지 않았다. 오만함은 여전하지만, 철부지 폭주족의 방종처럼 가볍지 않았다.
"그럼. 가미카제도 그렇고 역천도 그렇고. 짧은 기간에 해치울 상대가 아니잖아."
"소금성 주변 도시를 공략하는 사이 셋이 동맹석을 얻어내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세 국가가 함께 지키는 소금성을 함락할 자신 있습니까?"
철혈팔기 대표의 질문에 만리장성 대표도 조금 당황했다.
"아니. 시장에 나오는 동맹석은 다 사들인다면서?"
"중급 동맹석은 수도 수비를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저들은 소금성만 지키면 되기에 중급 동맹석으로도 충분합니다."
"중급도 다 사들여."
"동맹석은 유저가 사냥할 때 무작위로 드랍합니다. 세 국가에 소속한 유저가 얼만데, 동맹석이 저들만 피해서 드랍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소금성 옆에 있는 도시 하나 정도는 점령해야지. 우리 수도가 함락되면 동맹이 깨지잖아. 긴급 상황에 우리가 수도로 갈 수 있는 수단 하나는 마련해야 해."
이치를 따지면 설득할 수 있는데, 만리장성 대표는 할 말만 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셋의 태도를 바꾼 건 뜬금없이 들어온 황당한 소식이었다.
"급보입니다. 네크로가 소금성을 신에게 바친답니다."
"뭔 개소리야?"
만리장성 대표가 벌떡 일어섰다.
"10일 동안 제사를 지내면 소금성을 신에게 바칠 수 있습니다. 헤아 대주교가 교황이 되어 소금성을 직접 통치하는 겁니다."
"잠시만요. 알아보겠습니다."
초패왕이 길드 채널로 대도서관 사서에게 정보를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십 년 같은 십 분이 지나고 초패왕에게 쪽지가 왔다. 사서와 대화한 내용을 음성 파일로 보내왔다.
- 소금성을 신에게 바치면 어떻게 됩니까?
- 교국이 됩니다. 대주교가 교황을 맡죠. 다른 종족이 소금성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모든 인간 국가는 자동으로 병력이 차출됩니다.
- 인간 국가가 공격하면요?
- 인간 국가가 인간의 신의 교국을 어떻게 공격합니까.
"당장, 당장 소금성부터 함락해야 해."
만리장성 대표가 길길이 날뛰었다. 소금성 공략이 실패하면 이후 승진은커녕 퇴직을 고민해야 한다. 퇴직 전에 국가급 간부가 되려는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렇게 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뭔가 음모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왜 보호막이 사라지기 3일 전인 오늘 제사를 시작합니까? 일주일 일찍 시작했으면 보호막이 사라질 때 소금성이 교국이 되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10일, 정확히 9일 뒤면 빙하시대 쿨타임이 돌아옵니다."
우르크 도시에서 빙하시대를 사용한 후 쿨타임이 돌아오기 바쁘게 초인동맹 영토에 빙하시대를 사용했다. 그래서 빙하시대 쿨타임을 들켰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지?"
"우리가 급하게 소금성을 공격하게 하고, 셋이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무슨 꿍꿍이?"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소금성을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하던 초인동맹과 철혈팔기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판단에 오히려 신중론을 펼쳤다.
그러나 두 길드의 힘을 빌려 소금성 주변 도시를 쉽게 점령하려고 신중론을 펼치던 만리장성 대표는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날뛰었다.
"3일 동안 공성전 준비하기도 빠듯한데. 알아보더라도 공성전 준비는 해야 할 거 아냐?"
"어느 수준으로 준비할지 정하려면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역천이랑 가미카제가 몰려와도 무조건 함락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준비해. 소금성 함락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냐. 뭘 더 고민할 게 있어."
객관적으로 소금성을 빨리 함락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주장하는 게 바뀌니 만리장성 대표의 말이 무척 타당하게 들렸다.
결국, 3시간의 입씨름이 끝났을 땐 보호가 사라지자마자 소금성을 전력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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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는 해 뜨기 직전에 일어났다. 평소에도 빨리 일어나는 편이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 빨랐다. 거실에 나오니 김연이 살짝 부은 눈으로 어슬렁거렸다.
"뭐해?"
"성필 오빠가 주방 들어갔어. 자꾸 탕탕거려서 잘 수 있어야지."
주방에 들어가니 성필이 요리 재료를 가득 손질해놨다. 김연 다섯이어도 사흘은 되어야 먹어치울 양이었다.
"뭐해?"
"동해가 계속 뒤척이잖아. 그래서 일찍 깼어."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최근 따로 나가서 사는 현성이었다.
"야, 너 비밀번호 알잖아."
"미안. 갑자기 생각 안 나서."
"뿜뿜 생일로 바꿀까? 안 잊어먹게?"
"지금은 내 생일도 제대로 기억 안 나. 8월 33일인가 그럴 거야, 아마."
광해는 가끔 찾아가는 보육원 원장에게 전화했다. 나이 드신 분이라 잠이 없는지 전화 받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광해 씨.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원장님, 저희가 요즘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네요. 오늘 음식 재료 손질해서 보내드리려고요. 아침 따로 준비하지 마세요. 양이 충분합니다."
[날씨 쌀쌀해서 밥 안치기 싫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내 마누라보다 훨씬 낫네그려.]
애들에게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해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광해는 남는 음식 재료를 잘 포장해서 아저씨의 차에 실었다.
"광해 씨. 애들 겨울옷 맞춰줘야 할 텐데."
"요즘 좀 바쁩니다. 아저씨가 좀 수고해 주세요. 비용은 제가 댈게요."
"그라믄 안되지. 평소처럼 반반 합시다."
"제가 미안해서 그럽니다. 그리고 우린 다섯이잖아요."
"어허, 돈 많다고 유세 떠는 겁니까? 나도 로또나 사야지 원."
손을 흔들어 아저씨를 배웅하고 집에 올라왔다. 다들 밥이 안 넘어가는지 우유와 삶은 달걀로 아침을 때웠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바로 모든 길드 대표들을 불러모았다.
"내가 여러분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네 사장,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난 내 딸을 달라고 해도 내줄 수 있어."
"어떤 이상한 요구를 해도 다 받아들이실 겁니까?"
"그럼. 당연한 얘길 왜 해. 네 사장 설마 투항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것만큼은 따를 수 없어. 남자가 가오가 있지."
"소금성에 오지 말고 주변 도시에 대기해 주세요. 오늘 기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회의는 빠르게 끝났다. 몇 시간 뒤면 신이 쳐준 보호막이 사라진다. 육수가 좔좔 흐르는 맛있는 고기를 덮은 뚜껑이 사라진다. 온갖 맹수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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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군."
2백만이 넘는 중국 유저가 소금성에 득실댔다. 중국 유저가 9백만이나 되지만, 하루에 한두 시간씩 짧게 즐기는 유저가 반수를 차지했다. 게임에 조금 진지하게 임하는 유저 중 절반이 세 세력에 소속되었고, 개인 사정이 있는 유저를 제외하면 거의 다 소금성에 몰렸다.
"밖에 나가 정렬합시다. 네크로 유저들이 겁먹고 도망가게 말입니다."
포탈을 타고 소금성에 온 중국 유저들이 대문으로 빠져나갔다. 철혈팔기가 남문, 초인동맹이 동문, 만리장성이 서문 밖에 자리를 잡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NPC를 거의 대동하지 않았다.
"저들이 할 선택이라곤 우리 수도를 함락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만리장성 간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소금성을 지켜내야 의미 있는 게 아닙니까."
"그렇죠. 세 국가의 NPC를 모두 만리장성 수도에 보냈으니 쉽게 함락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왜 네크로 세력은 소금성 주변 도시들에 집결했을까요?"
"협상하는 거겠죠. 소금성을 지켜주는 대신 네크로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혹시 저들이 고구려에 합류해서 만리장성 수도를 공격하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요. 설사 동맹석을 얻었다 쳐도 고구려가 와서 소금성을 지켜야죠. 우리 유저 2백만입니다."
초인동맹과 철혈팔기의 NPC 대부분 그리고 일부 유저는 만리장성의 수도로 보냈다. 고구려가 전력을 다하더라도 수도를 함락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설사 함락하더라도 철혈팔기와 초인동맹의 동맹 관계는 여전하다. 만리장성이 혼자 서남부에서 고군분투하고, 남은 둘이 고구려와 가미카제를 처리하면 된다.
정부가 개입한 일이어서 철혈팔기나 초인동맹은 쉽게 배신하지 못한다.
"고구려는 이미 만리장성 수도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가미카제는요?"
"철혈팔기와 인접한 열 개 도시에 분산했습니다. 어딜 공격할지 가늠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 그깟 도시 몇 개 그냥 내주면 되죠. 소금성 점령하고 이틀이면 되찾을 수 있습니다."
"급보입니다. WORLD 유저들이 옥문관에 나타났습니다."
옥문관은 만리장성 수도다.
"숫자는?"
"포털 NPC가 통계에 따르면 15만이라고 합니다."
"고구려까지 합쳐지면 위험하겠는데요?"
"계책이 아닐까요? 우리가 일부 유저를 수비로 돌리게 하려고?"
"10만 돌아가면 됩니다. 2백만이 넘는데 10만 빠진다고 뭐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만리장성이 유저 10만 명을 선별했다. 그러나 선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멈춰야 했다.
"소금성 포탈을 폐쇄했다고?"
"포탈 폐쇄하면 빨라도 24시간 이후 가동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지금 소금성 병력 상황이 어떻게 되죠?"
네크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지휘부는 겁이 더럭 났다. 우르그르를 점령하고 포탈로 장난쳤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짜증 났다.
가미카제가 40만 유저를 배 한 척에 실어서 보냈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네크로가 그 정도 파급력이 있는 장난을 치는 거라면, 실실 쪼갤 게 아니었다.
"NPC 군대 15만에 유저 3만. 유저 3만 중에 얼마나 수비에 참여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괜히 걱정했네요."
"정찰병 좀 운용하죠. 혹시 달려서 지원 오는 세력이나 숨어있는 병력 없는지 둘러봅시다."
기마병과 탈것을 탄 사냥꾼 유저들이 돌아다녔다. 기마병은 지원 오는 세력이 없는지 확인했고, 사냥꾼 유저들은 스킬로 매복이 있는지 확인했다.
"네크로가 자포자기한 거 아닐까요? 소금성을 신에게 바치려는 게 쇼가 아니고 진심일 수도 있겠네요. 저라면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 못 할 것 같습니다."
"제사 다 끝나기 전엔 얼마든 멈출 수 있다잖아요. 우릴 다급하게 만들어 틈을 만들려고 쇼하는 겁니다. 지금 옥문관 공격도 일부러 이상한 짓 해서 우릴 흔들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만리장성 수도는 함락이라고 봐야겠네요?"
"네크로가 그쪽으로 옮기려는 게 아닐까요? 이쪽은 철혈팔기랑 초인동맹에 포위된 셈이니 차라리 역천과 가까운 곳에 가서 생존을 도모하려는 게 아닌지 추측합니다."
"네크로 생각이 뭐 중요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죠. 레전드 세상은 오늘부터 중국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대중화의 꿈을 게임에서 먼저 이룩하는군요. 잘하면 국가에서 훈장을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금성 포탈은 폐쇄되었고 주변 도시로 달려가기에도 시간상 늦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소금성을 전력으로 함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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