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이 되다1
"야, 나 이 정보 알아내려고 30골드 썼어."
4만 원에 육박하는 거금. 레전드 한국 유저만 60만 명을 돌파했다. 그중 40만 명이 가상현실 기기 구매자고, 20만 명은 갑자기 생겨난 수십 개 레전드 게임방을 통해 접속하는 유저였다. 유저가 많아지니 슬슬 정보를 취급하는 단체가 생겨났다.
게임방 VIP 회원권을 끊고 하루도 빠짐없이 게임방에 출근한 십년지기 단짝들은 친구의 희생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늪지랑 바위산 경계지대를 따라가면서 리자드 마을이랑 우크 동굴을 번갈아 공격할 수 있어. 유니크는 안 주지만 우크는 가끔 레어를 주고 리자드 마을의 금속 가지고 용병 길드 가면 레어 아이템 바꿀 수 있어."
마을 사이 거리는 보통 멀었다. 탈것을 얻은 유저라도 매일 탈것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에 이동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 이동 거리를 늘이려면 비싼 먹이를 잡화점에서 사서 탈것에게 먹여야 했다.
탈것을 갖춘 유저에게는 우크와 리자드 사냥이 오히려 손해였다. 그래서 이젠 불필요한 정보를 갓 대륙에서 건너온 새내기에게 돈 받고 팔았다.
미리 준비한 여우풀에 불을 붙이고 우크가 뛰쳐나오기를 기다렸다. 야행성인 우크는 낮에 굴에 처박혀 있기에 이 방법이 100% 먹혔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누가 털었나 보다. 들어가 보자."
일행은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컴컴한 동굴이지만, 게임답게 일행의 시야는 전혀 방해받지 않았다.
"야, 여기 매직 템."
"여기 품질 낮은 보석. 대충 5골드 할 것 같은데."
비록 경험치나 레어는 얻지 못했지만, 먼저 우크를 잡은 유저들이 제대로 수색 못 하고 떠난 듯했다.
"도둑이 없는 파티일 수도 있어. 경험치만 보는 부자 파티."
우크 동굴을 털어 괜찮은 소득을 얻은 일행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리자드 마을로 달려갔다.
"야, 금속만 챙기고 나머진 다 그대로야."
"빨리 챙기고 우크 동굴까지 달리자."
그렇게 일행은 전투 한 번 안 하고 2시간여 뛰어다니기만 했다. 경험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2시간에 올린 수익이 무척 괜찮았다. 일행이 리자드 마을 점령하려면 20분 정도 걸려야 하고 우크 동굴도 10분씩 걸린다. 이동 시간까지 생각하면 2시간에 최대로 봐줘도 우크 동굴 2개에 리자드 마을 2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템이 그대로 남아있는 우크 동굴과 리자드 마을을 2시간 이내에 4개씩 털었다.
빨리 80레벨 찍고 그랜드 마스터가 되려던 꿈은 쉽게 얻어지는 불로소득에 멀리 날아갔다. 예상치 못한 횡재에 일행은 희희낙락하면서 다음 마을로 달렸다.
"야, 저거 이륙 사장님 아냐?"
"우리의 우상 이륙 사장님이라고?"
다섯 번째로 찾아간 리자드 마을에서 끝내 천사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야, 도둑. 소환수 얼만지 확인해 봐."
"죽음의 기사 1, 해골 기사 1, 리치 37, 듀라한 56, 강화 좀비 700, 해골 마법사 360."
"사장님이 틀림없군. 가서 사인해달라고 하면 거절하겠지?"
"멍청아. 여긴 게임이야. 사인펜도 없을 거라구."
자신들이 다니는 게임방 사장이자 26억의 사나이로 불리는 네크로를 게임에서 직접 보게 된 이들은 감개무량했다.
"근데 뭐 하시는 거지?"
"저게 가능한 거였어?"
성기사 하나가 수백 마리 리자드에 둘러싸였다. 정확히는, 성기사가 도발 스킬로 리자드들을 주변에 묶어뒀다. 그리고 천이 넘는 언데드가 리자드를 둘러싸고 착실하게 깎아 먹었다.
하지만 이들은 천이 넘는 언데드와 수백 마리 리자드가 엉겨있는 큰 전장이 아닌, 다른 집들보다 조금 높게 짓고 튼튼한 나무 바닥이 특징인 리자드 주술사의 거처에 집중했다. 그곳에는 네크로가 99% 확실한 유저가 리자드 주술사 목을 조르고 있었다.
"주술사 죽으면 리자드들 다 도망가잖아. 그리고 주술사가 합류하면 리자드들 전투력이 몇 배 강해져. 그래서 저렇게 잡아두고 있는 거 아닐까?"
"힘이나 체력 그리고 민첩이 얼마나 되면 저게 가능할까?"
레전드는 게임인 만큼,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스탯 차이가 심하면 안 걸린다. 레슬링 기술을 몹에게 걸어도 상대의 스탯이 월등하다면 단순히 힘 또는 민첩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스탯도 뛰어나고 기술도 훌륭한 거겠지. 오늘 수익 이 정도면 괜찮으니까 뒤로 돌아갈까? 지금쯤은 우크도 그렇고 리자드 마을도 리젠했을 텐데."
네크로가 보여준 기상천외한 모습이 이들 가슴에 불을 질렀다. 어서 빨리 그랜드 마스터 랭크가 되어 레전드 템을 장착한 채 대륙을 종횡하고 싶다는 웅심이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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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고년이 갑자기 '오빠, 오늘은 불편한 날이야.' 이러는 거야. 대포가 조준까지 다 끝내고 발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말이야."
"시발 새끼. 넌 조루야? 들어가기도 전에 발사 준비부터 하냐?"
"시발, 그 발사 말고. 진격 준비가 끝났단 말이야. 그리고 뭐? 조루? 이 시발 새끼야, 내 별명이 중국 공격수야."
"그건 또 뭔 개소리야?"
"90분 동안 뛰어만 다니고 슛 안 때린다고."
칸막이로 분리되긴 했지만, 웬만큼 큰 목소리가 아니어도 밖에 다 들린다. 그러나 술이 어느 정도 된 남자들은 남들이 듣건 말건 상관 않고 떠들어댔다.
"시발, 개소리는 됐고, 하던 얘기 마저 해."
"내가 평소엔 거칠어도 별명이 침대 위의 젠틀맨이야. 여자가 불편한 날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참아야지. 야동이나 보면서 직접 해결하려는데, 이년이 글쎄 내 허리를 잡은 손에서 힘을 안 빼는 거야."
"시발, 뭐 하는 짓거리래?"
"못 하는 게 아니라, 불편한 날이니까 좀 살살 다뤄달라는 거였어. 시발, 그날 부드럽게 하느라고 2시간이나 달렸잖아."
"시발 새끼, 밖에 나가 조깅 2시간 뛰었냐? 5분도 못 버티는 새끼가 뻥은."
"새끼, 함 벌려 봐. 내가 얼마나 오래 뛰는지 알려줄게."
"아, 이 더러운 새끼들이. 니들 서로 벌려주는 사이였어?"
그때 칸막이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열리는 소리가 우호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들, 여기 전세 냈어? 술 좀 조용히 마셔주면 안 될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상상도 못 한 광경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왜 말이 없어? 그럼 이제부터 조용히 해줄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지?"
"와, 이 시발년이. 간이 밖으로 나왔네?"
"아저씨, 지금 나 욕했어?"
여리게 생긴 여자는 의외로 강단이 있었다.
"기집이 처음부터 반말 찍찍이네? 니들 부모 널 그렇게 가르치드냐?"
"시발, 니도 반말이잖아. 존댓말 듣고 싶음 니부터 존댓말 해 드세요."
상대가 먼저 시비 걸었단 생각에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술이 알딸딸하게 잘 되긴 했지만,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지 않아서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땅콩 한 줌 쥐어 여자한테 던졌다.
"이거 먹고 떨어져."
그때 여자애 뒤로 덩치가 나쁘지 않은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너 맞았어?"
"네, 저한테 뭐 막 뿌렸어요."
갈고리 눈을 뜨고 시비 걸던 여자애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시발, 좃됐다.'
레젠드 게임 OB 길드의 길드장 배틀넷, 실제 이름 배용수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직감했다.
"야, 나 사고 치면 큰일이야. 어떻게든 빠져야 해."
옆에 앉은 오랜 친구이자 부길장에게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안으로 들어와서 몸싸움을 유도하면서도 문을 절대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뒤에 출동한 경찰들이 사건 당사자 전부 경찰서로 데려갔다.
불과 2시간 뒤, 동영상 사이트에 남자들이 음담패설 내용과 더불어 땅콩을 던진 장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베플에 '안경 쓴 남자 OB 길드장 배틀넷인데.'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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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많이 올렸어?"
"20분에 한 번씩 새로운 내용 추가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올리자마자 퍼가는 곳이 많습니다. 관심이 식지 않을 겁니다."
"SNS 쪽은?"
"작업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심이 필요한 퇴물 연예인과 래퍼들이 벌써 동영상 퍼 나르고 난리입니다."
반경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계획을 짜면서도 생각대로 모든 게 흘러갈까 싶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이 나왔다.
"차세형 씨, 납니다. 배틀넷 그거 내 작품이에요. 이젠 내 뜻에 따를 마음이 들었나요? WM 쪽은 이미 애저녁에 구워삶았죠. OB가 흩어지고 PM이랑 WM이 손잡으면, 역천 길드 종이호랑이 되는 겁니다.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가 모택동 동무가 한 말씀이 있어요.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다. 바르지 못한 놈은 바르게 서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역천 길드는 순전히 돈 쏟아부어서 만든 신기룹니다. 허상이라구요."
PM 길드장 쪼꼬미와 통화를 끝낸 반경운은 잔다크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상대방 전화기가 꺼져 있다며 소리샘으로 유도했다.
"충전도 안 하고 게임에 빠져있나 보군. 여자들은 왜 일의 경중을 따질 줄 모를까? 지금은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닌데."
고려신문에서 여성 권익 신장 관련 기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부서의 장, 반 실장이 연결되지 않는 통화에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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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운의 생각과 달리, 잔다크 김혜영은 전화기를 끈 채로 반형운과 대면하고 있었다.
"최 비서. 반푼이가 심어놓은 프락치 다 찾아냈어?"
"네, OB 길드에 세 명, WM에 일곱 명, PM에는 열두 명입니다."
"어떻게 찾아냈지?"
"내 멍청한 사촌 동생 통화 목록이랑 메신저 친구 목록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자들을 조사해서 누가 레전드 게임을 하나 알아보고, 게임 아이디를 알아내서 쉽게 끝냈습니다."
반경운과 최 비서는 김혜영을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돈 많이 썼겠네?"
"아닙니다. 어차피 전화번호만 가지고 폰팔이 찾으면 이름이랑 주소 다 뜹니다. 메일 주소도 알아낼 수 있죠. 그 기본 정보들 가지고 경찰 찾아가면 범죄기록이랑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니콘에 있는 친구 통하면 게임에서 어떤 아이디 쓰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신규 유저는 어렵지만, 삼대 길드는 대부분 옛날부터 게임 해오던 올드 유저였다. 박 대리와 신 사원이 고생해서 정리한 명단에 이들 대부분이 있어서 유니콘 DB에 접속할 수 없어도 삼대 길드 유저 명단은 쉽게 뽑아낼 수 있었다.
"배틀넷 보내버린 걸 반푼이는 자기 작품이라고 여기겠지?"
"상무님 동생이지만, 그 멍청함은 같은 핏줄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돕니다. 배틀넷도 쉬운 인간은 아니죠. 그놈 빽이 안 통하게 우리가 검찰과 경찰에 손을 썼기에 성공했지, 원래 계획대로 경찰서에 처넣기만 했다면 지금쯤 배틀넷은 몰래 빠져나왔을 겁니다."
"똑똑한 놈이 미국물 먹으면 더 똑똑해지지만, 멍청한 놈이 미국물 먹으면 오히려 멍청해져. 현실감이 사라지거든. 한국은 한국이고 미국은 미국이야. 미국이 법으로 돌아가는지 인정으로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정으로 돌아가는 게 확실한 나라야."
여전히 김혜영을 무시한 채, 반형운은 전화를 걸었다.
"차세형 씨. 마지막 경곱니다. 배틀넷 내 말대로 됐죠? 그리고 반경운은 그게 자기 작품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죠? PM과 OB 모두 내가 안고 갑니다. 물론 쳐낼 가지는 쳐내야겠죠. 반경운이 심어놓은 놈들은 정리하고 갈 겁니다. 자꾸 간 보지 말고 확실하게 정하세요. 자정까지 시간 드립니다."
"뭔가요? 지금 뭐 하는 건가요?"
김혜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원래는 이대로 연합으로 쭉 가려고 했습니다. 소위 삼대 길드는 내가 안고 가기엔 좀 부담이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인간이 너무 많더군요. 근데 반경운이라는 작자가 수작을 부려 내 심기를 건드렸어요. PM을 돈으로 사고 WM을 끌어들이고 OB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어요. 귀찮아서 그냥 놔둘까 하다가 손대게 됐고, 손댄 바에 끝까지 책임지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형운은 녹차로 목을 따뜻하게 데웠다. 태어날 때부터 목이 좋지 않았고, 추운 겨울이면 특히 증상이 심했다.
"장계취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계책에 내 계책을 얹어 큰 이득을 보는 방식이지요. 배틀넷이랑 쪼꼬미, 이 둘이 몰래 손잡으려 한 건 비밀도 아니죠.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쓸모가 다할 때까지 어울려주려 했는데, 더 좋은 생각이 들어서요. 이번 기회에 OB랑 PM 역천으로 흡수할 겁니다. 얼마 뒤면 길드 레벨 6이 개방되며 길드원 1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제게 원하는 게 뭔가요?"
"악역입니다. 적당한 때에 내가 시키는 대로 배틀넷 감옥 보낸 거 반경운이랑 함께 짜고 함정 판 거라고 측근들에게 소식을 흘려주세요."
"왜?"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니라, 상대의 악의가 감당하기 어려워서 말이 튀어 나갔다.
"WM을 통해 새 길드 결속력 다져야죠. 대신 수원에 있는 자택 압류를 풀어드릴게요. 빚을 대신 갚아드리는 건 힘듭니다만, 당신네 가족을 괴롭히지 못하게 몇 달 막아줄 수 있습니다."
"끝인가요? 제게 원하는 게 이게 전부죠?"
"당분간은."
김혜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멍한 얼굴로 사무실을 떠났다.
"상무님, 조금 급하신 거 같습니다."
"네크로 유저 뒤에 누가 있는지 아직도 못 찾아냈지?"
"상대가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배후가 없다는 추론이 더 합리적입니다."
"아냐. 굳이 이 시점에 레전드 아이템을 경매장에 올린 저의가 뭘까? 그리고 도둑 유저가 훔쳐보기로 살폈는데, 네크로 목걸이 훔쳐보기에 실패했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레전드 아이템보다 상위 아이템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야. 다른 유저들은 레전드도 만져보지 못했는데, 네크로는 이미 상위 템을 얻어냈어. 배후가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돼. 조사 철저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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