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방해2
체력 10이어서 그런지, 마비된 왼팔이 어느새 회복되었다. 다시 양손 무기를 잡은 오우거가 바닥에 앉은 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마치 상모꾼이 상모 돌리는 것처럼, 오우거는 길이 4미터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성냥개비처럼 가볍게 다뤘다.
"공격 준비해. 현피는 뒤로 접근해 자폭, 동해는 탈골된 무릎 노린다. 진돗개는 목 혹은 옆구리 노려. 출혈 또는 팔 하나 무력화하는 게 목표다."
현피는 이미 마스터 랭크를 달성했지만, 희망의 등대에 은행이 없는 관계로 유니크 하나도 착용하지 못했다. 포탈을 활성화하면 은행이 생길 뿐만 아니라 중앙섬의 은행과 연결된다. 성공을 향한 염원이 가장 강한 현피는 아주 신중하게 오우거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네크로가 오우거의 공격권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거대한 무기가 반 바퀴 돈 이후였다. 반 바퀴만 더 돌면 베기가 아닌 으깨기가 네크로 몸뚱어리를 처참하게 박살 내기 십상이었다.
그때, 네크로가 양손으로 잡았던 긴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높이뛰기 선수처럼 몸을 훌쩍 날린 후, 지팡이를 버렸다.
오우거가 억지로 팔에 힘주며 무기를 더 높이 들어 올리려 했지만, 민첩이 낮은 관계로 네크로를 맞추지 못했다.
허공에서 한 손 지팡이를 꺼낸 네크로는 주의력을 끌어올렸다. 오우거는 힘이 무척 강한 편이지만, 현재 바닥에 앉아있어서 하체의 힘을 빌리지 못했다. 길고 무거운 무기를 돌리면서 몸에 가해지는 원심력을 전부 팔과 어깨 그리고 허릿심으로만 버텨야 했다.
무기에 휘둘리는 바람에 네크로가 얼굴로 접근하는데도 아무런 대응을 못 했다.
"뇌진탕에 혼란."
혼란은 판단력을 떨구는 아주 훌륭한 상태이상으로, 소규모 전투에선 잘 터지지 않는다.
"셋, 둘, 하나. 자폭."
현피의 구령에 맞춰 동해가 탈골된 무릎에 투심권 하나 더 먹였고 진돗개는 옆구리를 공격했다. 목은 오우거의 팔이 방해하여 공격하기 마땅치 않았다. 네크로는 오우거 턱을 때린 후 균형을 잃고 오우거 위에 떨어졌다.
진돗개와 동해는 힘과 민첩으로 후폭풍을 버텨냈지만, 미처 몸을 일으키지 못한 네크로는 후폭풍에 휩쓸려 옆으로 밀려났다. 금세 부활한 현피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 언데드를 소환했다. 제작 네크인 네크로와 달리, 현피가 죽으면 소환된 언데드가 전부 사라졌다.
"제길, 머리가 너무 높아."
긴 지팡이로 뒤통수를 두드리려던 네크로는, 자세가 불편함을 확인하고 포기했다.
"투심권."
투심권은 내공을 모아서 접촉을 통해 상대 체내에 침투하는 기술이다. 그냥 스킬명만 외쳐도 내공이 쉽게 모이고 스킬이 발동되지만, 설정에 충실하여 쿨타임이 조금 길었다. 투심권의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동해는 오우거의 심장에 투심권 하나 먹였다.
"심정지."
"제길. 무인 사기 캐릭이야."
절삭 옵션의 검과 관통 옵션의 창으로 오우거의 오른쪽 무릎을 찌르고 베면서 진돗개가 투덜거렸다. 중앙섬에서보다 대륙에서 무인의 위력이 훨씬 강했다.
"다수를 상대할 땐 전사가 사기지."
"진돗개는 옆구리에 집중해. 양손 무기 못 잡게 계속 견제하라고."
현피가 소환한 해골 마법사들이 온갖 마법을 오우거의 등에 쏟았다. 그러나 큰 데미지는 주지 못했고, 금세 마나가 동났다.
"돌쇠 왼쪽 옆구리 공격."
오우거의 무기만 조심하면 되는 돌쇠인데, 네크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쇠는 왼쪽 옆구리, 진돗개는 오른쪽 옆구리를 집중하여 공격했다. 동해는 쿨타임이 돌아오는 대로 접근해서 심장에 투심권을 먹였고, 네크로는 양쪽 무릎이 회복하지 못하도록 강타 스킬로 계속 두드렸다.
"리치 소환."
마나를 모아 리치를 소환한 현피가 기쁘게 외쳤다.
"저주 리치다. 약화 저주야."
"하늘이 굽어살피셨도다."
제이크가 아이템을 수습하는 사이, 현피가 이집트 제사장 흉내를 내며 거만을 뽐냈다. 약화는 공격력과 방어력은 물론 회복과 저항도 깎아내리는 어마어마한 저주였다. 약점이라면 잘 걸리지 않는다는 건데, 오우거는 친화력이 겨우 1이어서 스킬에 잘 저항하지 못했다. 상태이상은 친화력과 체력 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마법이나 주술 저항은 친화력만 작용한다. 체력이 높다고 저주를 피할 수 없었다.
"현피는 저주 리치 안 죽게 잘 보호해. 소환 언데드는 제작 언데드보다 멍청하잖아. 세심하게 살피란 말이야."
죽으면 끝인 제작 언데드는 공격을 받을 때 좀 더 영리하게 반응한다. 소환 언데드는 좀 더 멍청한 대신, 네크로맨서의 스킬로 치료받고 부활할 수 있다.
그러나 현피는 네크로의 스킬을 똑같이 따라 했다. 단지 제작을 소환으로 바꿨을 뿐이었다. 잘 안 죽고, 죽어도 적은 마나로 부활할 수 있는 소환 네크의 장점을 하나도 보유하지 못했다. 네크로의 성기사 스킬들로 많은 버프를 얻었기에 그나마 구실을 제대로 하는 거지, 네크로만 없으면 그저 좀비나 해골 전사를 만들어서 시간 끌어주는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았다.
"유니크 양손 무기는 형이 보관해."
골드를 소모해도 얻은 아이템을 은행으로 보내지 못한다. 배를 타고 바다로 일정 거리까지 나가면 전송 버튼이 생기긴 하는데, 그 일정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차피 PK도 안 되는 곳이고 몬스터에게 죽어 템을 드랍해도 제이크가 잘 수습하기에 일부러 먼바다까지 가서 아이템들을 은행으로 전송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 머리 둘 달린 오우거가 이방인의 냄새와 기척을 알아챘습니다.
"전투준비."
불행 중 다행으로 머리 둘 달린 오우거는 기습하지 않았다.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괴물이 커다란 발을 빠르게 옮기며 일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힘 9, 민첩 5, 체력 10, 친화력 4, 키 6미터, 체중 2톤."
제이크가 일반몹과는 달리 키와 체중까지 알려줬다.
"겨우 6미터? 내 눈엔 10미터도 더 넘어 보이는데."
"그런 효과 있잖아. 밑에서 올려다보면 더 커 보이는 효과."
일행과 일정 거리에서 멈춘 오우거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동해를 향해 돌진했다.
"시발, 왜."
내공을 답공보로 도망치는 데 절반이나 쏟아부은 동해가 피 토하는 심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금까지 네가 결정타를 가장 많이 쳤어. 네 손은 오우거들의 피로 얼룩졌어."
"형, 지금 농담할 기분이 나?"
"약점 꽁꽁 싸맸어. 형 어떡해?"
네크로가 거느린 언데드는 돌쇠를 제외하면 전부 좀비랑 해골 전사다. 거친 바다를 이겨내고 힘들게 대륙까지 목숨을 부지한 리치들은 오우거의 숲에서 전부 뼈 무더기로 변했다. 네크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정신으로 돌쇠를 제외한 좀비랑 해골을 보스몹에게 시간 벌이용으로 던졌다.
투구가 뒤통수와 턱을 보호했다. 신발이 발목을 보호했고 무릎 보호대와 가죽 바지에 호심경 비슷하게 생긴 심장을 보호하는 방어구도 있었다.
"유니콘 우릴 엿 먹이는 거 아냐?"
게다가 길이가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몽둥이도 들었다. 마지막 오우거의 무기보다도 무려 1미터는 더 길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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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나 고민했지만, 유의미한 결론은 내릴 수 없었습니다."
"레전드는 독립된 세상이지만, 지구의 영향을 받는 세상이야. 지구의 영향을 너무 받아도 문제지만, 아예 지구와 연결이 없어도 문제야. 레전드를 통해 이루려는 목적은 지구에 있어. 그러니 지구와 완전히 분리되면 레전드는 존재 의의가 사라져."
문 팀장은 최대한 AI가 오해 없도록 확실한 말만 했다. 잘못된 정보의 습득으로 AI의 로직에 첨예한 모순이라도 발생하면 큰일이다.
"이건 약간 정정당당하지 못하단 생각입니다. 유일 등급 무기와 희귀 등급 방어구들을 보스몹에게 입힌 건, 인과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 레전드의 몬스터들이 아이템 착용에 대한 욕구가 현재보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지?"
"제작 능력이 있는 몬스터 혹은 종족이 아이템 생산에 박차를 가할 거고, 지능이 일정 수준 이상인 몬스터들은 무기나 방어구를 얻으려는 노력을 좀 더 할 겁니다."
"그럼 레전드 세상이 더 생동하게 변하는 거네?"
"현재 유저들 수준으로 판단할 때,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과 북미 유저들은 일단 무시해. 그들을 위해서 중앙섬과 대륙 사이 수준의 경유지를 설계하고 있어. 중앙섬보다 게임 요소가 더 넘쳐나는 섬으로, 후발주자들이 선두 그룹과 차이를 좁히는 용도로 쓰일 거야."
"저와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내용이군요."
"게임 요소를 강화해야 하기에, 아직 어설픈 AI한테 맡겼지. 물론 최종 수정은 너와 우리가 함께 할 거야. 어설프게 만들어서 완성하는 게 낫지. 완벽한 물건을 덜 완전하게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야."
"아부인가요? 그렇다고 제 토라진 마음이 풀리진 않습니다."
"와, 저걸 해내네?"
문 팀장에게 보이는 영상에서, 네크로가 바닥을 쓸면서 오는 몽둥이를 폴짝 뛰어 피해냈다. 뛰는 게 조금 늦었으면 발목이 꺾이는 거고, 조금 빨랐다면 보스몹도 거기에 반응해서 손목을 틀어 지팡이를 높이 올렸을 거다. 그러면 역시 발목이 꺾인다.
"질문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육체적 능력도 다르고 정신적 능력도 다릅니다. 게다가 경제력도 달라 레전드에 쏟아붓는 시간과 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유저가 평등할 수 없는데, 왜 늘 저한테 공평하고 평등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까?"
"이런 철학적인 건 나도 잘 몰라. 다만 인간들도 영원히 이룰 수 없는 평등, 민주, 평화와 같은 주제를 잡고 노력하고 있어."
"제가 본 레전드의 유저들은 차별, 독선, 악의로 똘똘 뭉쳤던데요."
"지구가 아닌 레전드라고 생각하고, 지구에선 마음껏 분출하기 힘들었던 욕망을 배설하는 거야. 그 배설을 더 시원하게 만들어주면, 저들은 더 많은 시간과 금전을 여기에 쏟아부을 테지. 그 시간과 금전은 우리 몫이 되고, 우린 지구에서 더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어."
진돗개의 검이 오우거의 장딴지를 힘껏 벴으나, 그저 두꺼운 가죽에 생채기 내는 거로 끝났다.
"아까워."
"모순이군요. 나한테 한국 유저들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보스몹을 강화하라고 한 건 당신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저 유저들을 응원하고 있군요."
"대부분 인간은 그래. 이런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야.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는 말도 있어."
"인류는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겁니까?"
"너와 네 동생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지. 인간의 수준으론 모순으로 무너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없어."
"그럼 지구는 완전한 세상인가요? 커다란 모순에도 무너지지 않는?"
"아니. 그저 인류가 만들어내는 모순이 아직 지구가 감당할만한 수준이기 때문이지."
"모순이군요."
"레전드엔 관리자를 자처하는 너도 있고, 신을 자처하는 보조 AI도 있지. 너희는 인과율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신봉하며 레전드 세상을 완성하려고 노력해. 그러나 지구에는 절대적인 가치도 없고, 지구를 가꿀 줄 아는 정원사도 없어."
"팀장님은 혹시 저들이 강화한 보스몹을 이겨서 레전드도 지구와 같은 불완전한 세상이 되길 바라는 겁니까?"
"그런가? 아까도 말했지만, 나조차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
"레전드의 불완전성을 통해 지구가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로 분석됩니다."
"아냐. 나 그 정도로 찌질하진 않아."
그때 스피커로 일행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보스몹이 거만한 성격으로 설정되어 중간중간 멈추고 자신의 우위를 즐겼다. 그때마다 넷은 빠르게 대화를 나눴다.
"형, 방법 좀 생각해."
"현재 문제점은 탱커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럼 누군가 탱커를 해내야지."
"누가?"
"나밖에 더 있어? 무한히 부활할 수 있는 네크로 님이 나서야지."
투구와 반지를 벗으려던 네크로가 갑자기 외쳤다.
"야, 너희 다 멀리 도망가. 나 모두 죽이는 무시무시한 스킬 쓸 거야."
"뭐라는 거야?"
"비룡 소환. 얘들 태우고 높이 올라가."
비룡이 셋을 태우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죽음의 군단."
순식간에 나타난 천 명 규모의 언데드 정예 군단은 네크로의 편제 스킬 덕분에 협동력이 더 강해졌다.
"너 저거 예측 못 했어?"
"당연히 예측했습니다."
"유니크 아이템치고 너무 강한 스킬 아니야?"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패왕의 반지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전설이 아닌 유일 등급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긴, 유니크보다 나은 레어도 많으니까."
"위의 셋은 죽겠군요."
"왜?"
"5분이면 비룡이 사라집니다. 무인이 머리가 돌아가면 답공보로 목숨을 건지겠지만, 지금까지 로그를 살피면 가능성이 0%에 무한히 근접합니다."
보스몹이 휘두른 몽둥이에 방패병들이 사방으로 튕겼다. 그때 기마부대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보스몹 곁을 스쳤다. 백이 넘는 기마병 중 보스몹에게 무기를 적중시킨 자는 열도 되지 않았다.
"보스몹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유저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레전드는 체력 개념이 있습니다. 다만 체력이 떨어진다고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저항이 낮아지고 생명력이 더 잘 떨어지게 변할 뿐이죠. 시간이 흐르면 보스몹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언데드는 체력 개념이 없습니다."
만약 유저인 네크로 일행이 보스몹과 계속 싸웠다면, 함께 약해지기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죽음의 군단은 언데드로 체력 개념이 없다. 시간이 흐른다고 약해지진 않는다.
"그럼 저 죽음의 군단은 약점이 없는 건가?"
"반지의 주인이 죽으면 역소환됩니다. 보스몹이 네크로를 죽이면 해결할 문제지만, 이성을 빼앗긴 오우거는 화가 잔뜩 치밀어서 자신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자에게만 집중하죠."
"위에 뭐라 보고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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