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귀환
초인동맹은 확장을 멈췄다.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대규모 우르크를 상대로 수비에만 열중했다. 우르크는 미련할 정도로 일정 간격으로 특정 도시만 공격했다.
그러나 갑자기 패턴을 바꿀 소지가 다분하여 누구도 방심하진 못했다.
20개가 넘는 도시를 잃었던 철혈팔기는 빠르게 수습했다. 철혈팔기 수뇌부도 멍청이가 아니었다. 우르크가 정해진 시간에 리젠되는 몹이 아닌 걸 잘 알기에, 처음부터 성을 지키는 것보다 우르크 살상에 집중했다.
다른 나라들이 다 합쳐야 비슷할 정도로 우르크를 해치우니 침공하는 우르크 규모가 빠르게 줄었다. 여유가 생기자 잃어버린 성을 되찾고 심지어 동서남북으로 확장까지 했다.
그리고 이 난리 통에 확장을 멈추지 않은, 정확히는 못 한 국가도 있었다. 북미와 유럽 출신 유저들이 점점 큰 규모로 몰려들면서 서남부의 마을 혹은 도시를 점령하고 WORLD에 귀속했다.
"유럽에서 왕의 혈통 얻은 유저가 왕 안 한다고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고?"
6서버의 약초꾼 빼고 남은 일곱 직업은 모두 주인을 찾았다.
한국 서버는 네크로의 성기사와 역천의 마법사, 중국 서버는 철혈팔기의 무인과 초인동맹의 사령술사, 일본 서버는 가미카제의 도둑, 북미 서버는 사냥꾼, 유럽 서버는 전사였다.
"개인 에픽 퀘스트 한다고 사라졌대. 아예 안 한다는 건 아니고, 퀘스트 다 끝나고 돌아오면 왕 할 수도 있어."
개인 퀘스트라면 몇 달 걸릴지 모른다. 그리고 몇 달이 흐르면 자칫 대륙에 남은 우르크 도시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인지 최근 마을이나 도시를 점령하고 WORLD로 소속되는 유럽 세력이 엄청나게 늘었다.
"돌아와도 왕 안 할 가능성이 커. 유럽 세력들은 뭔가 알 거 같으니까 정보 좀 알아내 봐."
네크로의 의문은 며칠 안 되어 풀렸다.
"에픽 종족 전환 퀘스트?"
유럽에서 왕의 혈통 얻은 유저는 에픽 종족 전환 퀘스트를 받고 오우거가 되려 했다. 오우거가 되어 오우거의 왕이 될 계획이라고 한다.
"유저가 특정 종족의 왕이 된다니. 큰 국가를 이루는 건 어떨지 몰라도 전투력은 어마어마하겠구나."
드워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투력을 확인했기에, 큰 국가를 이루고 유지하는 능력은 몰라도 전투력은 엄청 강하다는 추론을 얻었다.
"오우거 왕국이 용병으로 뛰면 장난 아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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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꾼과 사냥꾼으로 이뤄진 푸레 종족 유저들이 황폐한 저택을 방문했다. 사냥꾼 유저가 스킬로 던전 입구를 찾아냈다.
"왜 던전 입구는 랜덤으로 해놨는지. 약초꾼끼리만 오면 어떡하라고."
유저들이 툴툴거리며 던전에 진입했다. 유저 숫자와 레벨과 랭크 그리고 직업에 근거해 임시 던전이 생성되었다.
"저는 혈정 3개면 퀘스트 끝입니다. 드디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축하해요. 저는 아직도 32개 남았네요."
"아무리 게임이고 과일이 맛있다지만, 게임 내내 풀만 먹으니 입에 가시가 돋치겠어요. 저도 빨리 퀘스트 끝내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쉿. 분위기 이상합니다."
뱀파이어를 잡아 혈정 100개를 모으는 마지막 퀘스트. 비록 들어갈 때마다 구조가 다른 던전을 유저에게 선보이지만, 패턴은 비슷했다. 처음 보는 던전이어도 생소함은 적었다.
그러나 이번 던전은 달랐다. 공포 영화처럼 숨 가쁘게 옥죄는 기운이 있었다.
"상급 뱀파이어!"
"잘됐네요. 운 좋으면 혈정 수십 개 주기도 해요."
"전사 스킬과 주술사 스킬을 함께 씁니다. 일정 거리에만 있어도 상대 생명력 흡수하니까 알아서 거리 확보하세요."
"제가 맹수 친구 부를게요."
곰 두 마리와 늑대 한 마리가 소환됐다. 약초꾼이 직접 일대일로 싸워서 피통 20% 이하로 깎은 후 펫으로 길들이는 스킬로, 익히는 유저가 얼마 없었다. 근접도 아니고 원거리도 아닌 중거리 딜러로 분류하는 약초꾼이 일대일로 맹수를 제압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냥꾼 유저 하나가 '오늘은 너다' 스킬을 사용했다. 표적 스킬에 적중한 상급 뱀파이어의 회피율이 하락했다. 특히 원거리 스킬 회피율이 크게 하락하여 사냥꾼이 많은 파티에 고전할 게 뻔했다.
"셋 거꾸로 세겠습니다. 저격 익힌 분들 동시에 심장 노립시다."
저격 화살 스킬을 익힌 사냥꾼 셋이 활을 들었다.
"셋, 둘, 하나. 저격 화살."
10초 지난 후 화살 세 개가 상급 뱀파이어의 심장에 꽂혔다. 일격필살 확률이 있는 스킬이었지만, 재생능력이 강하거나 회복력이 강한 몹 그리고 유저에겐 효과가 낮았다. 상급 뱀파이어 심장에 꽂힌 화살들이 천천히 밖으로 밀려났다.
"친구여, 부탁하노라."
곰과 늑대가 뱀파이어를 덮쳤다. 셋이 몸빵하는 사이 사냥꾼은 먼 거리에서 화살을 날렸고 약초꾼은 조금 접근해 여러 스킬로 뱀파이어의 피를 깎았다.
뱀파이어가 회복하는 것보다 일행이 깎아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러나 피통이 15% 정도 된 이후 뱀파이어가 흡혈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피통이 주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숲의 분노."
약초꾼의 궁극기 숲의 분노. 스킬 시전자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이 생겼다. 영역 안의 적에게 약초꾼 스킬을 무작위로 쏟는 영역형 스킬. 적이 여럿이면 골고루 공격하고 하나면 집중하여 공격했다.
약초꾼의 공격은 독과 정신 저주 위주였다. 정신에 작용하는 저주는 별 효과 없었지만, 다행히 독 데미지가 뱀파이어에게 잘 먹혀 피를 차근차근 깎았다. 늑대와 곰 한 마리가 역소환 될 즈음에 사냥꾼 유저의 저격 화살 쿨타임이 돌아왔다. 두 대의 화살이 심장에 적중하면서 5% 남았던 피통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 혈정 3개 남은 사냥꾼 유저분 어디 갔어요?"
"저격 화살은 거리가 멀수록 위력이 강하다면서 가장 뒤에 있었는데요."
"설마, 퀘스트 완성해서 던전에서 쫓겨난 거 아닐까요?"
"파티 목록에 그냥 있는데요."
임시 던전은 함께 들어가면 자동으로 파티를 결성한다. 임시 던전은 일반 던전보다 목적성이 강해 PK를 비롯한 분란이 일 가능성이 크기에 취한 조치였다.
"설마, 유령 몹에게 당한 건가?"
종속자를 유저들은 유령 몹이라고 불렀다. 유저가 종속자에게 저항하면 종속자는 죽고 경험치와 아이템을 남긴다. 저항하지 못하면 일정 기간 유저의 몸을 컨트롤한다.
"그분 여왕 혈통이라서 스킬 위력이 강한데. 다들 조심합시다."
일행의 추측과 달리, 사냥꾼 유저는 대기실에서 분노에 차 씩씩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잃고 대기실로 이동하기 전에, 숲의 여왕 혈통을 잃어버렸다는 메시지가 귀에 들렸다. 인물 정보를 불러서 숲의 여왕 일족 호칭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유니콘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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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혈귀 여왕 에르제베트가 소금성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 숲의 여왕 일족으로부터 심장을 갈취한 에르제베트는 드래곤에 필적할 정도의 위력을 보유했습니다.
- 여왕의 완전 부활로 흡혈귀가 종족으로 인정받습니다.
- 유저는 종족 전환 퀘스트로 흡혈귀가 될 수 있습니다. 도둑과 사령술사 저주술사를 비롯한 직업이 흡혈귀 종족에 적합합니다.
"에라이. 이건 또 뭐야?"
최근 늘 화가 목구멍까지 차 있는 현피가 넘치는 분노를 토해냈다. 토템 스킬은 겨우 숙련을 넘어 전문을 향해 달팽이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특별한 돌이나 나무를 발견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스킬 사용 횟수에 비교하면 숙련도는 빠르게 오르는 편이었지만, 토템 재료가 될 나무나 돌을 찾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드래곤 잡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네?"
"드래곤보단 나아. 게다가 우리 한 번 잡은 적 있잖아."
진돗개의 낙관적인 판단에 네크로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때 에르제베트가 신이 이름을 찾았다는 말에 심장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어. 바꿔 말하면, 심장을 회복하면 신도 안 두렵다 이거야. 그때는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에르제베트를 잡았는데, 이번엔 우리 실력으로 잡아야 해."
"대도서관 게임 시간으로 두 달 더 있어야 완공인데."
우르크의 대규모 침공에 모든 자금과 인력 물력을 전쟁으로 돌렸다. 그래서 대도서관 설립을 예상보다 늦게 시작했다. 건물은 이미 다 지어졌지만, 도서관에 필요한 자료와 서적 그리고 사서의 모집에 시간이 걸린다는 설정으로 아직 오픈하지 못했다.
"왕궁에 가자. 다미안이랑 우자르랑 함께 대책을 의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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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너무 쉽게 살았나?"
반형운은 몸을 등받이에 푹 기댄 채 반성했다.
"게임이 너무 방대하여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을 뿐입니다. 과정에 작은 저항이 생기는 건 필연입니다. 결국, 최종 목적지에 발을 딛는 건 운보다는 능력으로 판가름 납니다."
최 비서의 위안이 소용없었다.
우르크의 공격이 점차 시들해졌다. 풀이 완전히 꺾이기 전인 지금이 가미카제 뒤통수치기 딱 좋은 시기였다. 네크로에게 줄 에픽 갑옷도 준비했다. 역천이 받은 허리띠보다는 못하지만, 역천은 갑옷 외에도 줄 것이 꽤 많았다.
"한 달. 게임 시간으로 딱 한 달이면 가미카제를 궁지로 몰 수 있는데."
독에 든 쥐에겐 누구나 쉽게 돌을 던진다. 우리에 갇힌 맹수도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게 인간이다. 가미카제를 두세 번만 완파하면 뜯어먹으러 달려들 세력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네크로도 대륙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고."
지금 네크로는 누구나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누구 편도 아닌 상황이 지속할수록 네크로에게 유리하다. 역천은 네크로를 흙탕물에 끌어들여 색을 확실히 해서 편 가름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흡혈귀 일족의 여왕 에르제베트가 소금성에 전쟁을 선포하여 네크로를 묶어버렸다.
"상무님. 만리장성이 왕의 혈통을 얻었답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만리장성 한국 담당이 호치택이라는 작자라고 했지? 얼굴 좀 보자고 연락해."
철혈팔기가 대륙 중부, 초인동맹이 서북부에 자리를 잡았다. 네크로는 만리장성이 서남부를 노릴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역천은 만리장성이 노릴 곳이 동남부임을 확신했다.
서남부나 동북부에 가면 만리장성과 초인동맹도 서로 국경을 접해야 한다. 설사 국경을 맞대지 않더라도 거리가 가까워 언제든 서로 칼을 마주할 가능성이 컸다.
삼국지에서 오나라와 촉나라는 서로 다투느라 힘을 제대로 합치지 못했다. 만약 오나라와 촉나라가 서로 국경을 접하지 않았다면, 둘이 진심으로 손잡고 위나라를 상대했을 가능성도 꽤 큰 편이었다.
중국 고대 병법에서 강조하는 원교근공, 먼 놈과 손잡고 가까운 놈을 패라.
게다가 만리장성이 왕의 혈통을 얻은 지금 초인동맹의 전략은 바뀔 수밖에 없다. 초인동맹은 철혈팔기를 주적으로 삼고 만리장성의 은근한 방해는 모른 척 눈감았다. 중국 정부가 수작 부릴 걸 경계해서이기도 하지만, 왕의 혈통이 없는 만리장성보다 철혈팔기가 진정한 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온건하던 초인동맹이 초식동물의 탈을 벗고 맹수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만리장성은 동남부에 자리를 잡아 초인동맹과 국경을 접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후, 힘을 합쳐 철혈팔기를 해치우는 게 최선이었다.
"상무님, 우린 그럼 계속 갇혀있어야 합니까?"
최 비서도 이러한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우린 동북부에 가서 확장한다. 북부는 북미 세력에게 남겨두고. 미국 세력에서 상부상조하자고 연락이 왔어."
"그럼 동남부의 성은?"
"만리장성에서 비싼 값 받아내야지. 마나포까지 팔아주면 군소리 없을 거야."
"가미카제가 동북부로 따라오면요?"
"바라던 바야."
아무리 뻔뻔해도 친일파 매국노라는 욕이 듣기 좋지는 않았다. 가미카제를 고구려에서 쫓아냈다는 언플로 이미지가 조금 좋아졌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언젠간 레전드 골드가 현찰처럼 쓰이는 날이 온다. 레전드가 가상 현실이 아니라 콜롬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처럼 신대륙으로 인정받고 레전드 세상이 빚어내는 가치가 화가가 종이에 찍은 커다란 점 하나처럼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레전드는 지구의 일부가 된다.
광고료를 비싸게 주면서 유명인을 모델로 삼는 건, 인간이 눈과 귀에 익숙한 걸 고르는 본능과 같은 습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네크로와 대한제국 그리고 역천이 함께 레전드 골드를 판매한다면, 현재 이미지가 가장 좋은 네크로를 찾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하지만. 만약에 역천이 가미카제를 완전히 깨부숴서 대륙에서 쫓아낸다면.
여전히 역천을 싫어하고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천을 좋게 보는 사람도 무척 많을 것이다. 더구나 언론을 어느 정도 장악한 고려신문의 힘을 이용하면 유니콘이 레전드 통제를 완전히 포기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 훌륭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한제국이야 별거 아니지만, 네크로는 슬슬 견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대한제국은 만리장성 한국 지부라고 보면 돼. 가미카제가 우릴 통해 한국 시장을 자기들이 삼키려던 것처럼, 만리장성도 대한제국을 통해 한국 시장을 먹으려 해. 우리랑 네크로가 붙으면 대한제국과 만리장성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그렇다면?"
"만리장성 만나 은근슬쩍 협력 의사를 보여줘야지. 쫄다구까지는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 만리장성이 들어올 수 있게 돕겠다는 의사를 비칠 거야. 그러면 만리장성이 알아서 네크로 견제하겠지. 대한제국이야 자기들 수족이고 우리도 하수인 정도로 보일 테니까."
"가미카제가 동북부로 오면 우리만으론 상대하기 힘듭니다."
"상황 봐가면서 움직여야지. 미국 애들이 동맹 맺자고 했으니까 손잡고 가미카제를 쫓아내도 되고, 만리장성 통해 대한제국 도움을 받아도 되고.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네크로는 최후에나 고려할 대상이야."
세워 둔 계획이 모조리 물거품 되었다. 믿음직한 부하들과 밤새워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변수가 많아 상황에 따른 계획이 수십 개는 되었다.
- 작가의말
던전에 등장한 상급 뱀파이어는 열화판입니다. 유저를 위해 약하게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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