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으로5
"건배."
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맥주잔들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마시다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맥주잔이 빠르게 비워졌다. 거품이 줄줄 흐를 정도로 맥주잔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자, 술만 마시지 말고 고기도 좀 먹자."
입안에서 고기 육즙이 톡 터져서 혀를 희롱했다. 고소한 양념장이 고기의 맛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맛을 확실하게 주장했다. 심지어 고기를 감싼 상추마저 천상의 맛으로 입을 행복하게 했다.
"투자 이상으로 뽑아냈어."
"난 처음에 형 미친 줄 알았거든. 그런 중대한 결정은 미리 우리랑 상의하면 안 돼?"
"너네 다 새가슴이잖아. 말하면 무조건 반대했을걸?"
"됐고, 건배합시다."
그때를 회상하니 광해 가슴은 아직도 세차게 방망이질했다.
###
망연자실.
예비 엔진이 고장 났을 때 넷이 느낀 감정이었다.
"운영자 불러서 조치해달라고 하면 안 될까?"
"버그도 아닌데 운영자 불러서 뭐해. 사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네크로의 말에 셋 모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전함을 부수면 돼.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되는 거야. 그럼 희망의 등대에서 부활하든지 중앙섬에서 부활하든지 할 거야."
"그럼 저 NPC들은?"
"저들은 그냥 죽는 거지. 거주지역에서 죽으면 일정 기간 후 리젠하지만, 거주 지역을 떠나면 그냥 끝이야."
"근데, 신의 조각상 퀘스트 실패하면 어마어마한 벌 받는 거 아냐?"
맹탕인 둘과 달리 진돗개는 퀘스트를 걱정했다.
"아마 엄청난 페널티를 받을 거야. 마지막 남은 조각상이 바다에 가라앉고 대주교도 죽는 셈이니."
속수무책.
넷이 로그아웃 직전까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도 소용없었다. 차라리 작은 배라면 노를 만들어 젓든지 헤엄치며 끌고 밀며 가든지 할 텐데.
"형, 오늘은 바다나 보러 가자."
"그래. 서해에 가서 바닷바람도 쐬고 회도 먹자."
"맨날 동해만 봤는데 서해도 좀 봐주자."
그러나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서도 광해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피시방에 돌아가자마자 세수도 안 하고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갑판장. 혹시 전함에 작은 배가 있는가? 구조정 같은 거 말이야."
"없습니다."
'게임은 게임이야.'
현실이라면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 하다못해 고무 배라도 있었을 거다.
'작은 배 몇 개 실어둘걸.'
대주교가 된 헤아가 갑판으로 올라와 신도와 선원 모두 모아놓고 기도를 올렸다. 분노조절장애를 앓아 포악하기 그지없는 갑판장도 순한 양이 되어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네크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신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임의 신이든 진짜 신이든. 도와만 준다면 톡톡히 사례할 의향이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 보입니다."
반말에서 존대가 되었다가 다시 반말이 되었던 헤아가 이번엔 존대를 사용했다.
"음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깐요."
NPC인 헤아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신에게 기도하십시오. 신이 기적을 내려줄지도 모릅니다."
별거 아닌 말이지만, 뭔가가 네크로 뇌리를 간질였다.
###
"으아, 술이 달다."
동해가 벌써 눈이 풀렸다. 이젠 빠르게 달리는 거 빼고는 정상인과 다름없는 동해다. 지팡이 없이 다닌 지도 이젠 꽤 된다. 혹시나 염증 같은 거 생기지 않았나 정기적으로 검사해야 하지만,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에 허덕여야 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난 그때 게임 접속하기 정말 싫었어. 그리고 지식인에 항공모함 연료 떨어지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냐고 글 올렸다가 엄청 놀림 받았어."
술이 꽤 된 현성이가 양심고백 했다.
"우리 연료 떨어진 거 아니잖아."
"엔진이 갑자기 생각 안 나서 연료 떨어졌다 그랬어."
"근데 형은 어떻게 유니크 아이템을 기부할 생각을 떠올렸어?"
###
이틀간 고민했다. 머리를 간질이는 뭔가를 잡아내려고 헤아뿐 아니라 여러 NPC와 대화했다. 그러다 돌쇠를 보고 자신이 놓친 게 뭐였는지 알아챘다.
듀라한 셋을 합쳐 죽음의 기사가 되는 확률은 1%였다. 리치 셋은 실패로 그대로 사라졌다. 그런데 죽음의 기사는 첫 시도에 성공했다.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탯."
힘 7
민첩 5
체력 8
친화력 6
신앙 0
신앙은 올리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일말의 희망을 안고 네크로는 헤아를 찾았다.
"대주교. 기부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신전의 모금함에 넣어주셔도 되고 저한테 직접 주셔도 됩니다."
"가치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본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보단 타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가늠합니다."
골드는 대부분 은행에 있다. 골드 가격이 변동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지를 띄우기에 언제 팔아도 상관없다. 괜히 현금이 많아지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아직도 꽤 많은 골드를 은행에 맡겨두고 있었다.
"아이템도 기부됩니까?"
"무구도 당연히 가능하죠. 신께서는 어떠한 물건이라도 본연의 쓰임새를 찾도록 안배할 겁니다."
네크로에겐 네 개의 미확인 유니크 아이템이 있었다. 희망의 등대 은행과 중앙섬의 은행이 따로따로일 가능성을 진돗개가 언급했고, 혹시 희망의 등대에서 은행 물건을 못 찾을 걸 대비하여 세 번째 괴물부터는 아이템을 은행으로 전송하지 않았다.
'장갑을 기부하자. 외형상으론 도둑 아이템이야.'
"기부합니다."
- 신앙 스탯이 3이 되었습니다.
"신앙이 얼마나 깊으면 신께서 기적을 내리시나요?"
"더는 깊을 수 없을 때면 신도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네크로는 헤아가 신도들과 함께 신에게 기도를 올릴 때 함께 올리려 했다. 그러나 텍스트에 쓰인 문자를 읽지 못해 그저 무릎만 꿇고 입은 가만히 있었다.
'이 방법은 아닌 거고. 현실이면 무작정 백팔배라도 하며 간절히 빌겠는데, 이건 게임이야. 내 소원을 신에게 닿게 하는 수단이 분명히 있을 거야.'
"야, 너희들 저기 가서 무릎을 꿇어. 그럼 텍스트로 기도문이 뜰 거야. 혹시 읽을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내게 말해줘."
기도 시간에 맞춰 셋을 로그인시켰다. 그런데 셋 다 텍스트를 읽지 못했다. 성기사만 읽을 수 있는 문자인데, 넷 중에 성기사는 없었다.
'성기사로 인정 안 해 주면서 퀘스트는 왜 받게 해? 그러고보니 동해 직업 퀘스트도 공유받은 적 있었지.'
셋 다 로그아웃한 후, 네크로는 유니크 신발을 기부했다.
- 신앙 스탯이 6 되었습니다.
###
"형이 갑자기 우릴 모아놓고 유니크 아이템 얘기할 때, 놀라 죽는 줄 알았잖아."
진돗개가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며 말했다.
"그때 유니크 아이템 3개 기부하고 신앙 스탯이 8 됐거든. 그리고 이틀 기다렸어. 그런데도 기적이 안 생기는 거야. 그래서 네 번째 아이템도 기부했지. 기부하고 신앙이 10 됐는데도 아무 소식 없는 거야. 그러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 그래서 너희한테 고백했지."
현성이가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며 웃었다. 원래 주량이 별로인데 원샷을 연거푸 때리더니 맛이 가버렸다.
"그때 우리 넷이 눈물 그렁그렁해서 함께 기도하자 이랬지. 종교 믿는 놈 하나도 없는 주제에."
###
청천벽력.
유니크 아이템 네 개를 헤아에게 기부했다는 네크로의 말은, 샴푸로 거품 내자마자 물이 끊겼을 때와 같은 절망을 안겨줬다.
"형, 형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 아니잖아.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고,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그치?"
"나 신앙 스탯이 생겼는데, 신전 퀘스트 완성하거나 기부하면 올라가. 그리고 스탯을 대가로 신이 기적을 내려줘.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신이 알아서 기적 내려주고 스탯 가져가는 거야."
"그래서?"
"지금 신앙 스탯 10이야. 다른 스탯들은 10이 최대잖아. 아마 신앙 스탯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그런데 기적이 안 생겼어."
"그래서?"
네크로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깔았다. 유니크 넷이면 현금으로 5천만 이상이다. 비록 장신구는 없지만, 임자 잘 만나면 1억까지도 볼 수 있다.
'미쳤구나. 내가 미쳤어. 무슨 정신으로 그랬을까?'
달라지려고 했던 건 맞지만, 그래도 너무 풀어졌단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도박에 중독된 사람처럼, 가지고 있던 유니크 아이템을 하나씩 신앙 스탯으로 바꿔버렸다.
'귀신에게 홀린 게 틀림없어. 아니면 가상현실 기기가 내게 암시를 준 거야. 나더러 유니크 아이템을 기부하도록 최면 걸었던 거야.'
급기야 가상현실 게임이 유저를 최면한다는 음모론까지 떠올렸다.
"형, 우리 이러지 말고 기도하자. 손잡고 기도하는 거야. 게임의 신이든 부처든 알라든 주든. 우릴 구해줄 분에게 기도하자."
넷이 손잡고 기도하는 신도들 무리에 끼어들었다.
"어?","어!","어."
안 읽히던 기도문이 한글로 표시되었다.
"실수하지 말자. 난 이미 다 외웠어. 다들 입을 맞춰 틀리지 않고 한 번에 가는 거야."
넷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기도문을 또박또박 외웠다. 그리고 기적이 임했다.
"배가, 배가 복구되었습니다. 새것으로 변했습니다."
갑판장이 호들갑을 떨었다. 네크로는 다시 0으로 변한 신앙 스탯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신앙 수치가 6이나 8이었을 때 넷이 함께 기도했어도 기적이 발생했을 수 있었다.
"형, 전속력으로 가자. 길드 연합이 대륙을 코앞에 뒀다고 뉴스까지 떴어."
"선장. 희망의 등대로 전속력으로 간다."
선장이 재치 있게 뱃고동을 울렸다. 긴 터널을 맴돌던 묵직한 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네크로 일행의 심장도 뱃고동처럼 힘차게 뛰었다.
- 유저 최초로 상륙에 성공했습니다.
- 배에 탑승한 네 유저가 한 달에 걸쳐 막대한 명성을 얻습니다.
- 배에 탑승한 네 유저가 속하는 즐기자 길드 역시 막대한 명성을 얻습니다.
- 대륙에선 60레벨 제한이 풀립니다. 중앙섬의 유저는 여전히 60레벨 제한을 받습니다.
- 마스터 상위 랭크가 개방됩니다. 80레벨 이상에 8개 스킬 숙련도가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면 그랜드 마스터 랭크를 달성합니다.
- 그랜드 마스터는 전설 및 신화 아이템을 장착합니다.
유저, 해적 출신, 오아시스 주민, 섬마을 신도 할 것 없이 서로 그러안고 펑펑 울었다. 제국의 전함이 갑자기 나타나서 전투태세를 취하던 희망의 등대 사람들도 대주교가 탄 배라는 말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처음입니다. 95%의 병력을 희생해서 드래곤 산맥을 넘어 이곳에 정착한 이래, 외부로부터 지원이 온 건 처음입니다."
희망의 등대를 지탱하는 네 세력의 대표들이 일행을 뜨겁게 맞이했다.
망국의 왕족들을 위수로 하는 마법사 세력, 기사들의 절대 지지를 받는 귀족 세력, 출신은 고귀하지 못하지만 도시를 지키기 위해 늘 위험한 싸움터를 전전하는 용병 세력, 신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존재를 되찾으려고 매일 기도하는 성직자 세력.
"신전으로 갑시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신의 조각상을 가져왔습니다."
깔끔하긴 하지만 빛바랜 의장용 갑옷을 입은 왕족, 실용성보단 착용자를 돋보이게 하는 용도의 갑옷을 입은 귀족, 철편이 군데군데 떨어진 갑옷을 입은 용병왕, 기운 자국이 더덕더덕한 성직자의 의례용 성복.
이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헤아의 손에 든 조각상이 빛을 발했다. 왕족이고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헤아는 조각상을 들고 천천히 신전으로 향했다. 섬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하다는 듯이 신전을 정확히 찾아냈다.
-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 신앙 스탯이 5 되었습니다.
- 개인 명성이 상승합니다.
- 보상으로 전설 무구를 담은 상자를 드립니다. 어떤 무구가 나올지는 신도 모릅니다.
"형, 나 전설 상자 얻었어."
"나두."
수많은 NPC가 무릎 꿇고 대성통곡하는 마당에 대놓고 좋아할 수 없어서 넷은 길드 채널로 대화했다.
"형, 대박이다. 유니크 아이템 네 개를 레전드 네 개로 바꿔버렸네?"
"게다가 퀘스트 보상으로 나온 거야. 본인이 반드시 사용할 수 있다고."
- 퀘스트를 갱신합니다.
- 희망의 등대는 대륙에 남은 인류 마지막 도시입니다. 하지만, 드래곤 산맥의 몬스터들이 번성하여 인류의 영역은 계속 줄었습니다. 외부의 지원이 없고 음식 조달이 어려워 인구도 꾸준히 줄고 있습니다.
- 대륙의 신전에 안치된 조각상은 매일 점령석 하나씩 생성합니다. 우두머리 몬스터를 처리한 후 점령석을 설치하면 해당 영역은 인간의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 '인간의 영역을 넓혀라'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형, 나만 퀘스트 받은 거야?"
"나도 받았어."
"일단 부두 가서 전함 역소환할게. 너희 먼저 로그아웃해라. 오늘 같은 날 그냥 보낼 순 없지."
###
"상무님.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중요한 회의가."
"그래야겠어. 취하려고 마셨는데 취하질 않아. 그 네크로라는 유저 정보는 알아냈어?"
"어렵게 알아냈습니다. 알고 보니 유니콘에서 예의주시하는 유저 중 하나더군요."
"그래. 평범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유니콘에서 VR 게임 당시 컨트롤이 뛰어났던 유저들 위주로 가상현실 기기를 공짜로 줬습니다. 그리고 이 유저들의 전투 로그를 분석해서 몬스터의 전투 능력을 조정한다고 합니다. 네크로 유저는 VR 때부터 컨트롤로 유명한 유저라 정보원이 개인 정보까지 알아냈습니다."
"조사해. 말이 통하면 좋지만, 안 통하면 협박할 수 있는 약점을 꼭 찾아내."
"대부분 조사는 마쳤고,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곧 좋은 소식 올리겠습니다."
"그래. 왕국 세우는 건 당분간 힘들지만, 그건 삼대 길드도 마찬가지야. 더 오래 저들의 코를 꿰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 꼭 나쁜 일은 아니야. 새옹지마라, 새옹지마야."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한 반형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사무실을 떠났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