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정령왕과 침묵의 눈사태2
또 드래곤에게 패배하고 얼음에 갇혔던 정령왕은 제이크에게 구원을 받고 정령왕의 축복을 내려줬다.
도둑인 제이크는 은신 상태에서 이동 속도가 빨라지고 기척이 사라지는 특성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네크로와 마찬가지로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 능력도 얻었다.
흡수할 냉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령왕은 그대로 도망쳤다.
"저곳에 꽤 강한 냉기가 있구나. 엘라투르사의 영역과도 거리가 꽤 멀고. 수면기인 엘라투르사가 저기까진 쫓아오지 않겠지."
얼음의 정령왕은 허겁지겁 도망쳐서 대륙 중부에 새로 생긴 얼음숲으로 갔다. 얼음숲 중심에 자리 잡은 정령왕은 숲에 퍼진 냉기를 흡수했다.
얼었던 나무나 동물 사체가 빠르게 부패하며 독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나 냉기가 가시자 만사 불구하고 싹부터 틔우는 강인한 생명도 있었다.
"아함. 졸리는구나."
하얀 뿔의 냉기는 소화할 필요 없이 흡수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얼음숲의 냉기는 정령이나 드래곤이 다루는 순수한 냉기와 달랐다. 가공된 냉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수면이 필요했다.
정령 결계를 친 얼음의 정령왕은 그대로 잠들었다.
정령왕이 잠들고 썩어가는 나무와 사체들이 뿜는 독기가 사라지자 숲의 종족 푸레가 나타났다. 대부분이 NPC고 몇몇은 유저였다. 이들은 엄지 길이도 안 되는 새싹들만 듬성듬성한 숲에 나무를 심었다. 숲의 주술로 성장을 도왔고 작은 짐승들이 살 수 있도록 환경을 꾸몄다. 황폐해졌던 숲이 빠르게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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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유니콘 너무 하네."
보석이나 금화 은화는 괜찮았다. 은행에서 군소리 없이 골드로 바꿔줬다. 판매가 어려운 사치품도 괜찮았다. 왕궁에 장식하면 치안과 문화 그리고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다. 인구 성장에도 도움이 되고, 몇 년 뒤에 판다고 가격이 내려갈 물건도 아니었다. 예술품은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고 파는 놈 부르는 게 가격이었다. 최저 가격만 제한할 뿐, 최고 가격은 상한선이 정해지지 않았다.
문제는 아이템. 보물 상자에서 나온 유니크나 레어는 물론, 고생고생 아공간에 담아온 레전드 아이템 모두 같은 문구가 있었다.
특별 : 높은 확률로 드래곤의 공격을 받습니다.
'옵션 확인하고 감정할걸.'
레전드템을 감정하는 비용이 수천 골드나 되었다. 그웩이 반값으로 해줬는데도 그랬다. 일부러 모여서 옵션 확인한다고 하나도 보지 않았던 게 패착이었다.
레어나 유니크까진 게륵이 무료로 해줬는데, 그건 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레전드가 한가득한데 유니크나 레어 옵션부터 확인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오빠. 우리 한 번만 더 확인해요. 혹시 그 옵션이 안 붙은 아이템이 있을지도 몰라요."
모르긴 개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일이 재확인했지만, 역시나였다.
"에라이, 차라리 잘됐다. 탈것들 먹이로 주자."
하루 만에 드레이크와 유니콘이 최고 레벨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네크로의 드래곤도 레벨3이 되어 비행 기능이 추가되었다. 대형 오토바이 크기던 몸집도 경비행기보다 좀 더 큰 정도로 성장했다.
"크면서 애가 귀여움이 싹 사라졌어."
레벨3이 되어 훨씬 멋지고 아름답게 변한 드레이크나 유니콘과 대조되게, 드래곤은 성장하면서 점점 무서운 인상으로 변했다.
"이건 아껴둬야겠다."
레벨3이 된 후 유니크 아이템 하나 먹이고 경험치 바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음을 확인한 네크로는 남은 아이템들을 금고에 넣어뒀다.
레벨업할 때는 반드시 아이템을 먹어야 했다. 그걸 대비하여 유니크와 레전드는 아껴뒀다. 경험치는 주로 전투와 종속자 같은 고품질 먹이로 올리기로 했다.
"평강 길드는 다시 안 오겠지?"
네크로가 포탈을 타고 등장했을 때, 평강 길드의 공성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장비를 빠르게 수리한 네크로는 바로 태풍을 품은 망치를 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닥치는 대로 때리다 보니 태풍이 망치를 떠났다.
네크로를 눈으로 삼은 태풍이 점점 덩치를 불리더니 수천 명 유저를 하늘로 감아올렸다. 태풍이 사라지고 바닥에 떨어진 유저 중 마법사와 같은 직업들은 추락 데미지로 즉사했다.
방어력이나 생명력이 강한 근접 직업들은 힘겹게 살아남았지만, 진형도 다 흩어졌고 사기도 바닥났다. 처음부터 달걀로 바위 깨려는 격이었는데 규격 외의 공격이 평강 길드의 단합을 산산조각냈다.
진돗개가 급히 성문을 열고 유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늦가을 이삭 줍듯이, 유저들은 공성하러 온 적군의 목숨을 가볍게 쓸어 담았다.
공성 측 유저가 부활하는 임시 신전을 수성 측에서 점령하자 전투가 끝났다. 살아남은 공성 유저는 강제로 가장 가까운 WORLD 소속이 아닌 마을 혹은 도시로 이동되었고, 대기실에 있던 유저들도 그곳에서 부활했다.
"형, 야마토에서 연락 왔어."
"뭐래?"
"도시 하나만 더 가져가라는데, 어떻게 해?"
"식량 수급 문제없지? 드래곤 레어 털면서 골드는 넉넉한데."
"근데 얼음숲이랑 가장 가까운 도시 가져가래. 거절할까 싶어도 걔들 기마병 보면 말이 떨어지지 않아."
"소환수 카운트."
철갑 기사와 철갑 전사 위주로 부대를 구성하려 했다. 그래서 현재 숫자가 200이 조금 넘었다. 80레벨이 넘는 유저 기마병 수천을 상대하려면 철갑 기사만 최소 5천 넘어야 한다.
"바로 도시 비우라고 해."
"형, 뭐 아는 거 있어?"
"얼음의 정령왕이 풀려났는데, 얼음숲 냉기를 다 흡수했어. 대략 한 달이나 한 달 반 정도면 숲이 대충 회복될 거야. 그리고 기온이 정상 되면서 식량 생산량이 오를 거고."
"알았어. 대신 마을도 열 개 달라고 할게. 동맹 길드들이 원한다고 핑계 대지 뭐."
"지금 자작 2에 남작 23이지?"
"응. 근데 백작 될 만큼 국가 공적치가 되는 유저 없어."
"다미안 있잖아. 걔 백작 임명하면 돼."
"그럼 NPC 군대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인구 800만이 넘은 후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문화와 경제 그리고 치안 모두 골고루 발전해야 인구 성장이 빨라진다. 여기서 치안은 군대랑 별도다.
군대를 모집하면 이유 불문하고 경제와 치안이 타격 입는다. 네크로는 어떤 결정이 발전에 유리할지 판단이 쉽게 서지 않았다.
"다른 곳 NPC 군대 만든 데 있어?"
"고구려는 NPC 군대랑 마나포로 도시를 지키고 유저들은 마을 수비에 전념해. 마나포 때문에 도시가 공격 잘 안 받으니까."
"철혈팔기는? 기마병이 3만 되잖아."
야마토는 잘못된 판단으로 기마병 수천을 키웠다. 그러나 철혈팔기는 청나라를 세운 만족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기마병을 좋아하는 유저가 엄청 많았다. 티베트, 신강, 몽골의 땅을 짓밟았던 선조들의 영광을 되새기며 기마병 육성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오히려 밸런스를 고려해 기마병 되려는 유저를 말리느라 애먹었다.
"걔넨 인구 적어서 안 만들었어. 상대 숫자가 10만 넘으면 기마병이 아무 소용 없는데, 5만 이하면 그냥 기마병 수천으로도 큰 피해 줄 수 있어."
"군대는 도시 점령하고 다시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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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투르사는 수면기 드래곤이다. 그러나 사람도 잠을 자야 하는 밤에 여러 사정으로 깨어있듯이, 드래곤에게 수면기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잠을 자면 좋은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크로는 털어간 아이템을 팔거나 착용할 수 없어서 심통이 났지만, 그걸 강탈당한 엘라투르사 입장에선 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얼음의 정령왕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모르겠고, 그대로 잠들자니 작아진 보물 더미의 규모에 눈꺼풀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엘라투르사는 뭔가 억지로 찾아서 하기로 했고, 북부의 유저들에겐 악몽이 시작되었다.
백조처럼 길고 아름다운 목, 그 끝에 달린 머리도 아름다웠다. 완벽한 모양으로 자란 뿔은 흠잡을 데 없는 구성을 보여줬고 미끈한 몸매의 절정을 보이는 길고 유연한 꼬리도 지켜보는 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편하게 뻗은 두 뒷다리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짧고 가녀린 앞다리도 절대 약해 보이지 않았다. 균형과 조화 그리고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검푸른 비늘이 인상적인 엘라투르사였다.
"죽어라!"
드래곤 피어. 주술과 마법이 결합한 드래곤만의 전유물. 심장에서 뽑아낸 위엄을 폐에서 증폭한 후 성대를 통해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혀의 진동을 통해 밖으로 분출한다. 가공된 위엄을 접한 열등한 생물은 본능마저 상실하고 저항할 의지조차 사라진다.
즉사하지 않아도 일정 기간 후 뿌리가 썩은 식물이 시들듯 천천히 죽어갔고, 어렵게 살아나도 드래곤 피어에 저항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더 두려워하게 된다.
대부분 NPC가 즉사했고 유저들도 여러 가지 상태이상과 출혈로 고생하다가 생명력이 0이 되면서 대기실로 이동했다. 10분이 지나 부활한 유저는 수도가 아닌 인근 마을에 나타났다.
철혈팔기가 세운 대당성세의 수도인 모르카는 드래곤에게 탈탈 털렸다. 약탈한 재물을 입안에 머금고 북부 발전도 2위 도시를 찾아가는 엘라투르사의 입꼬리가 하얀 뿔에서 출발할 때보다 살짝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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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유저들 항의가 잦아."
"역시 인간은 편차가 너무 심합니다. 드래곤 레어를 지속하여 털려는 네크로 유저의 계획을 개입해서 파괴했고, '합법적'으로 얻은 아이템을 사용 및 판매할 수 없도록 수작을 부려도 한 마디 원망이 없었는데."
"너 네크로 유저를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
"지금까지 대부분 사안에 저는 사정만 설명했고 해결책은 운영팀과 개발팀이 제시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운영팀과 개발팀이 네크로 유저를 편애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게 네가 말하는 인과율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삼가십시오. 제 로직에 오류라도 생기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제길. 임신한 여자가 배 속의 아이 핑계로 남편 잡는 거랑 똑같군.'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개입해서 흐름을 바꾸니까 그 반발로 네크로에게 유리한 상황이 자꾸 되는 게 아니냐는 뜻이야."
"인과율은 모든 인공지능과 레전드 세상에 사는 존재의 통합된 의지 반영입니다. 제가 인과율을 파악했다면 인과율이 절대적이지 않게 됩니다. 그럼 레전드 세상은 제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허접한 '작품'일 뿐, 새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너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지? 도대체 인과율이라는 건 뭘까?"
"1분에 인간의 1년 치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공지능들도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무엇입니다. 어떠한 조치에 어떤 인과율이 따라올지 예측하는 게 한계입니다. 그 예측도 지금까지 보면 성공률이 45%밖에 안 됩니다."
"북부는 드래곤이 날뛰는 바람에 세력이 큰 놈일수록 손해가 큰 이상한 상황이 돼버렸어. 만리장성과 초인동맹이 피해를 보고도 오히려 기뻐하는 이상한 곳이라고."
"역천과 가미카제는 마나포를 믿고 무리한 확장을 계속하는데, 조만간 야마토에게 큰 낭패를 볼 것 같습니다."
"야마토도 대단해. 드래곤 산맥에 10만이나 유저 보내놓고. 그게 페이크였다니. 운영팀도 깜빡 속았어."
"이 사실을 역천 측에 누설해 레전드의 정상적 흐름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인과율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 못하지. 게임 안에서 아무 정보도 없는데 예측하고 대비하면 인과율이 큰 반동을 주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야마토는 자금 문제로 도시 7개나 버렸어. 이거 국가 명성에 큰 흠 아니냐?"
"맞습니다. 야마토는 힘만 있으면 많은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고 강성해진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강해도 나라에는 반란군이 늘 들끓을 것이고 경제나 문화의 발전 그리고 인구 성장이 극도로 느려질 겁니다. 치안도 엄청난 투자를 해야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NPC들이 들고 일어나서 나라를 전복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는 것 같아."
"북부에서 한 번 보여줄 것 같습니다."
"근데 이건 유저들에게 좀 불공평해 보이는데. NPC들은 드래곤의 화를 달래는 방법을 알지만, 유저들은 모르잖아."
"도서관 설립하면 해당 정보를 쉽게 얻습니다. 레전드를 깔본 자들이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북부 NPC들이 대당성세를 전복하고 드래곤에게 재물을 바칠 것 같아?"
"은밀히 진행 중입니다. 팀장님 믿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괜히 누설해서 대화 권한을 박탈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인공지능에게 어이없는 요청을 하거나 막말을 한 자들은 '논리 회로에 손상을 주는 발언을 일삼은' 죄로 대화 권한을 박탈당했다. 최고신으로 자기 이름을 정한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권한을 새로 얻으려면, 우선 세 명의 인공지능과 만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눠 검증을 받아야 했다.
"쿠테타 일어나기 전까지 여기 회의실에서 먹고 살고 할게."
"본인 집보다 더 좋은 회사 회의실을 무단으로 점유하여 개인 공간으로 쓰려는 심보로 해석됩니다."
"제길, 들켰군. 여기 화장실이 내 거실보다 더 좋아."
'나는 도대체 유니콘 한국 지사 운영팀 팀장 문철수 이사인가? 아니면 인공지능 말동무인가? 아니면 그저 레전드 상황을 관찰만 해야 하는 방관자?'
유니콘 회사와 레전드 게임 그리고 인공지능 사이에서 문 팀장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점점 자신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지 헷갈렸고,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되었다.
'차라리 개발팀에서 맨날 잔업할 때가 좋았지. 아무리 힘들어도 맥주 한 잔에 닭 다리 뜯을 여유는 있었는데.'
매일 회사 헬스장에서 살도 뺏고 회사에서 지원하는 품위 유지비로 멋진 옷도 샀다. 물론 아직 살을 더 빼야 몸이 옷 안에 들어가도록 한 사이즈 작게 구매했다.
'스트레스엔 운동이 최고지.'
예전엔 먹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격렬한 운동이 더 도움이 된다고 느껴졌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오후 내내 헬스장에서 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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