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시대1
대륙 중앙의 숲이 얼음으로 뒤덮이면서 숲에 살던 짐승이 전부 죽었고 식물도 모두 얼어 죽었다. 새싹이 비집고 나오지 못할 정도로 땅이 꽁꽁 얼어붙어서 죽음의 땅이 되었다.
얼어 터진 나무들이 부스러기가 되어 온 군데 널렸고, 찬 기운에 시든 꽃나무들도 미처 썩지 못하고 시든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강인한 씨앗들이 여린 생명을 품고 땅속에서 이를 갈며 시린 추위를 버텼다. 싹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본능적으로 생명을 감싼 껍데기를 여몄다.
활력이 충만한 숲은 넘치는 생명을 키워냈고, 발 달린 짐승들은 맹수나 경쟁 적수를 피해 숲을 떠나기도 했다. 비록 숲과 가까운 우르크 도시나 마을은 수십이지만, 숲을 떠난 짐승들을 먹이로 삼는 도시와 마을은 수백을 헤아렸다.
숲이 죽자 수백이 되는 우르크 도시와 마을이 굶주리게 생겼다. 거기에 연소탄 가격이 올라가면서 세라프로부터 음식을 살 돈도 궁해졌다.
현실이라면 우르크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인터넷이라도 개통되지 않은 이상, 갑자기 추워졌다는 사실 외에는 뭔가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게임 NPC이기에 우르크 족장과 귀족들은 하루도 안 되어 숲이 죽어버린 사실을 알았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머리로도 이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했다.
우르크들은 결단력 있게 전쟁을 결심했고, 그 상대는 우르크에게 유일하게 인간 국가로 인식되는 야마토였다.
"백작, 세라프가 거래를 요청했다."
"우리 돈 없다."
"노예 주면 연소탄 준단다."
연소탄 살 비용 절약하면 식량 구매에 더 많은 골드를 할애해도 된다. 어차피 쓸모없는 인간 노예를 줘버리고 비싼 연소탄을 얻는다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마을 연락해라. 우리 연소탄 있으니 골드나 보석 가지고 사러 오라고 알려줘라."
필요 이상의 연소탄을 얻은 백작은 머리를 굴렸다. 노예로 바꾼 연소탄을 팔아서 골드와 보석을 얻고, 그걸로 식량을 구매할 구상을 짰다.
역천의 작은 날갯짓이 야마토 길드를 궁지로 몰았고 네크로에겐 오히려 날개를 줬다. 길드장이자 오아시스의 성주인 진돗개마저 네크로의 닦달을 못 이겨 곡괭이랑 삽을 들고 탄광에 내려갔다. 유저들도 갑자기 좋아진 대우에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소탄 캐는 데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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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 길드는 우릴 안 돕는 건가?"
야마토 길드 수뇌부가 회의를 열었다.
"동맹석으로 국가 동맹을 맺어야 지원할 자격이 생깁니다."
"아니, 그냥 도와주면 되지. 뭔 또 자격씩이나."
야마토 길드의 길드장은 게임을 모르는 중년이었다. 야마토에게 돈을 대주는 기업 연합의 대표일 뿐이었다.
"두 나라가 상호불가침 동맹을 맺으려면 경매장 최저 판매 가격이 10만 골드인 하급 동맹석을 각자 하나씩 소모해야 합니다. 중급 동맹석은 30만 골드부터 시작하는데, 상대 수도가 공격받을 때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럼 당장 두 개 사서 동맹을 맺어. 60만 골드면 큰돈도 아니잖아."
"물량이 없습니다. 동맹석을 얻는 방법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효 기간이 겨우 석 달입니다."
"난 그런 거 몰라. 내가 아는 건, 우리가 수도에 묶이면 가미카제 그 양아치들이 동남부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다는 거야."
우르크의 공격을 받은 지 사흘째. 야마토 소속 유저들은 전투가 신나기만 했지만, 길드 수뇌부는 성벽 보수 비용부터 죽은 NPC를 보충하는 비용까지 애만 탔다.
"초인동맹이 300만 골드를 주면 수성전에 10만 유저를 일주일 투입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남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안돼. 우리 주적은 가미카제지만, 멀리 보면 초인동맹도 적이야. 초인동맹이 지금 어려운 상황인데 우리가 밧줄을 내려 저들을 모래구덩이에서 꺼내주는 건 절대 안 돼. 그 돈을 차라리 네크로 길드에 주겠어."
"그쪽은 국가 소속이어서 돈을 줘도 수성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때 가장 말석에 앉아있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세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소학생처럼 손들 필요 없어."
"제가 우연히 네크로 길드의 길드장 진돗개 상을 만났습니다. 60만 골드면 야전을 벌여주겠다고 합니다."
"진짜 진돗개 상 맞는가? 비슷하게 생긴 사기꾼에게 속은 건 아니지?"
"절대 아닙니다. 오아시스의 성주인 진돗개 상이 틀림없었습니다."
"우리 동맹 사이인데 60만 골드나 요구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초인동맹의 300만 골드 요구를 꺼냈던 남자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세키를 질책했다.
"용병 길드를 통해 거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직접 용병 유저들을 고용하는 겁니다. 네크로 길드는 친한 길드들 데리고 대가 없이 돕는다고 했습니다."
"좀 정리해서 말해. 헷갈리게 하지 말고."
이세키는 길드장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자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뜨거운 머리도 식혔다. 자기가 생각해도 말을 너무 두서없이 했다 싶었다.
"진돗개 상은 아는 유저를 모두 데리고 우릴 돕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네크로 길드는 역천이나 대한제국처럼 강한 결속력을 갖춘 세력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친한 길드를 끌고 돕겠지만, 야전의 위험에 대비하여 60만 골드로 용병 유저를 고용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60만 골드라는 얘기지?"
"한 명에 20골드씩 책정하면 3만 명을 모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지휘권을 진돗개 상에게 주면 됩니다. 대략 4만 명 유저가 밖에서 우르크를 공격해 우리 부담을 덜어줄 겁니다."
"계산해 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머리가 반쯤 벗어진 남자가 보고했다.
"4만 명이라 쳤고 레벨은 70으로 가정했습니다. 이들이 제대로 활약해주면 매일 100만 골드가량 지출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매일 지출이 100만 골드도 안 되는데 어떻게 100만 골드 이상 절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인동맹을 언급했던 남자가 화를 버럭 냈다.
"우르크는 일반 몹과 달리 종족입니다. 중앙섬에서야 게임처럼 리젠되지만, 대륙에선 줄어든 우르크 인구는 주변 상황에 맞춰 느리게 회복합니다. 지금 대륙 중앙의 숲 서쪽 부분이 의아하게 죽어버렸습니다. 그게 우르크들이 우릴 공격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핵심만 간단하게."
"죄송합니다. 중요한 얘기여서 자세히 하겠습니다."
대머리 남자는 기회다 싶었는지 호랑이 길드장의 귀찮은 말투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우르크를 열 죽이면, 우르크 도시나 마을에서 새로 태어날 우르크는 하나 정도입니다. 식량을 얻을 숲이 사라졌으니깐요. 우르크의 공격을 다 막아낸 후 우린 우르크 도시를 쉽게 점령할 수 있습니다."
"좋은 발상이야.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가미카제랑 역천은 동남부에 묶였습니다. 희망의 등대는 무시해도 되고, 수도엔 포탈도 없습니다. 마을은 가득 점령했는데 우르크의 공격에 유저들이 묶여있습니다. 철혈팔기는 배를 백 척이나 구해서 북부를 개척하고 있는데, 가미카제랑 마찬가지로 기호지세입니다. 지금 가미카제랑 철혈팔기 누구도 포탈을 먼저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리장성은 아주 균형적으로 잘 발전한 길듭니다. 그런데 이들은 왕의 혈통이 없습니다. NPC 왕을 추대하면 커다란 약점 하나 품게 됩니다.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으면 국가가 그냥 사라집니다. 유저가 왕이면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어도 부활해서 새로 수도를 지정하면 됩니다. 도시 세 개만 있으면 국가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머리 사내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초인동맹을 언급했던 남자는 훅 치고 올라오는 대머리 때문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렵게 이인자 자리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순식간에 내쳐질 것 같았다.
"초인동맹은 자금 문제로 도시는커녕 마을 점령도 꺼리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인답지 않게 단합이 무척 뛰어난 길드여서 돈 문제만 해결하면 무섭게 발전할 겁니다. 하지만, 돈 문제가 풀리더라도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네크로 길드는 도시 네 개를 점령한 후, 올해에는 확장하지 않는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더 많은 도시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핑계를 댔는데, 제 생각엔 네크로의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그 부분을 자세히 말해 봐."
"탄광은 길드나 국가가 아닌 네크로 개인 소유입니다. 탄광을 얻은 경로는 모르지만, 광산과 달리 퀘스트를 안 해도 됩니다. 드래곤 산맥의 오지에 있는 광산이랑 도시 밑에 있는 탄광의 차이인지 획득 경로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네크로가 국가 소속 네 도시에는 연소탄을 무료로 배급하고 국가 소속 마을에는 최저가로 공급합니다."
"그러니까, 네크로는 돈 더 벌려고 일부러 확장 안 한다는 말이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우릴 방해할 길드가 없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이런 호황이 얼마나 가는지 모르지만, 우린 우르크를 물리치고 우르크 도시를 빠르게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 우리 세력을 불리는 새 말고 또 무슨 새가 있지?"
"역천이나 가미카제는 우릴 방해할 힘이 없습니다. 초인동맹이 우릴 방해하려면 도시를 빼앗아야 하는데, 그들은 여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네크로 길드를 통해 상호불가침 협약도 맺었고요. 물론, 이득이 충분하다면 협약을 쉽게 찢어버리겠죠. 하지만, 지금 초인동맹은 우릴 건드려서 좋은 일 없습니다."
"대한제국, 이놈들은 역천과 철천지원수입니다. 우릴 견제해서 역천 좋은 일 할 생각도 없을 거고, 만리장성은 왕의 혈통 못 얻으면 NPC 왕을 추대해야 합니다. 초인동맹과 철혈팔기라는 강한 적이 둘이나 있는데, 하나 추가하고 싶진 않을 겁니다."
길드장이 짝짝짝 손뼉을 쳤다.
"대한제국은 만리장성이 역천을 견제하려는 수단이야. 이미 꽂을 자리가 있는 칼이니 우리 등에 꽂지 않을 거고. 만리장성은 변수가 많아 함부로 척을 지지 못한다라. 좋았어. 너무 훌륭해."
"우리가 빠르게 확장하면 가미카제나 철혈팔기가 인내심을 잃을 겁니다. 둘 중 하나는 참지 못하고 도시를 점령하고 포탈 활성화해서 빠른 확장을 꾀할 겁니다. 만약 철혈팔기가 먼저 포탈을 열면 초인동맹이나 만리장성은 대륙 북부로 가서 철혈팔기를 방해할 겁니다."
"만약 가미카제가 먼저 확장하면?"
"우리가 더 빠릅니다. 조급한 건 가미카제 쪽이지요. 우린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분에 우르크의 저항을 덜 받을 테니깐요. 그리고 만리장성은 몰라도 대한제국은 아마 저쪽으로 건너가서 역천 길드를 견제할 겁니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대한제국은 역천을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하고, 역천은 대한제국을 친중파 앞잡이라고 욕합니다. 저들이 인터넷상에서 벌이는 설전은 칼 들고 서로 죽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돕니다. 대한제국이 계속 세력을 유지하고 결속력을 다지려면 상대가 확장하며 포털이 열리는 즉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철혈팔기가 먼저 확장할 게 확실하겠군."
"만약, 네 추측이 틀렸다면 어떡할 거야."
초인동맹을 언급했던 남자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냈다.
"지금부터 상의해야죠. 제 생각이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힘을 실어주시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은 논리적으로 반박하시면 됩니다. 토론을 통해 제 부족함으로 생긴 논리의 구멍을 메운다면 더 좋은 대책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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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야마토에서 투명 진주 백 알 보내왔어."
"용병 길드에 의뢰는 넣었겠지?"
"응."
"공성전 수성전은 죽지만 않으면 시스템이 주는 전리품으로 손해 보지 않아. 거기에 20골드의 보상이 있으면 유저 모으는 건 순식간이지. 친한 길드들에 빨리의뢰 받으라고 쪽지 돌려."
"그나저나 다음 퀘스트부터 형 혼자서 해야 하잖아. 템 최소 유니크로 맞춰야 하는 게 아냐?"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지금 템으로도 만족스러워."
"그나저나 게륵은 아직도 안 끝났네?"
"만약 아이템 사라지면 너까지 죽일 거야."
네크로는 시스템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보였다. 에르제베트를 잡으면서 피 머금은 장미 하나 더 얻었다.
숲의 여왕 피를 머금은 흡혈귀 일족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
흡혈귀 여왕 피를 머금은 숲의 일족을 상징하는 푸른 장미.
둘 중 어느 장미를 하약스에 장착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게륵이 아이템 합성을 제안했다. 두 장미를 하나로 합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네크로가 보기엔 성공했을 때 얻을 숙련도에 미쳐 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형, 그 무슨 결정이 성공률 올려주는 거라면서?"
"불사의 결정 하나당 25% 성공률 상승. 게다가 밤의 결정 하나 갈아 넣었어. 신전에 바치면 신앙 스탯 최소 1 주는 귀한 물건 말이야."
"75%에 기본 성공률 있을 거 아냐. 반드시 성공할 거야."
긴장한 나머지 네크로는 게륵이 두 장미를 합치는 방에서 나왔다. 게륵을 용병으로 데리고 있는 죄로 진돗개가 네크로 말 상대를 해줬다.
동해는 용병 길드에서 주술로 드레이크 알 부화하는 걸 지켜보았고 철벽은 신전에서 유니콘의 알에 레어 아이템을 먹이는 중이었다. 다행히 드래곤과 달리 마무리로 유니크 하나만 먹이면 부화할 수 있었다.
"형, 현피 요새 연애하는 거 아냐? 쩍하면 일 있다고 로그인 안 하고."
"현피가 그 래퍼랑 만나면 딱인데. 둘이 정말 천생연분이야."
"형 현피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어."
-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 피 머금은 붉은 장미와 피 머금은 푸른 장미가 합쳐 피 머금은 장미가 되었습니다.
네크로가 대화하다 말고 화닥닥 달려가자 진돗개도 덩달아 뛰었다. 방에 들어간 네크로는 날카로운 가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미를 덥석 잡았고, 진돗개는 합성에 성공한 게륵을 꽉 안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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