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를 지어2
'소환수를 줄이면 전투팀이나 사냥팀이 올 때 위험하다. 소환수가 많으면 빨리 죽여 전투팀이나 사냥팀이 아예 오지 않는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고수가 할 일. 네크로는 순찰팀 열을 해골과 좀비로 만든 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를 들었다.
'이런 점은 전보다 훨씬 편하구나. 예전엔 머리로 암산해야 했는데.'
나뭇가지로 바닥에 공식을 끄적이며 빠르게 계산했다.
"스킬 해골 제작 오프."
"스킬 좀비 제작 오프."
"스킬 해골 강화 온."
"스킬 자폭 온."
"스킬 악덕 고용주 오프."
"스킬 불사 온."
숫자가 좀 더 많은 해골을 강화하고 네크로맨서 궁극기 자폭을 장착했다. 빨간 물약 100배 가격인 마나 물약 3개를 미리 준비했다. 친화력 5이기에 궁극기 한 번 쓸 마나는 넉넉했다. 혹시 마나가 부족할 경우 마나 물약을 마시면 된다.
불사 : 캐릭터가 사망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
사령술사만 보유한 패시브 스킬이다.
부활 대기 10분 시간이 사라지고, 1시간 동안 스탯 30% 하락 페널티도 받지 않는다. VR 게임 때는 없었던 숙련도 하락과 정도가 심해진 장비 내구도 하락은 어쩔 수 없지만, 수련자 세트 덕분에 숙련도 하락 페널티도 사라졌다.
승산이 크다는 계산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마을에 진입하자 전투팀이 달려왔다.
'5분이면 순찰팀이 전부 달려오고 15분이면 사냥팀이 전부 복귀한다. 5분 안에 끝내야 한다.'
네크로가 순찰팀을 이용해 전투팀을 끌어내려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전투팀을 끌어내 없앤 후 마을에 진입해 족장과 싸우면, 더 오랜 시간 싸울 수 있다. 15분 후 전투팀이 리젠한 후에야 카운트가 시작된다.
20분은 되어야 순찰팀이 마을로 진입한다는 뜻이다. 버그라면 버그로 볼 수 있다.
비록 좀비나 해골에 일일이 명령을 내릴 순 없지만, 가상현실 게임의 자유도가 네크로 편을 들어주었다. 미리 여섯 마리 흡혈 좀비만 밧줄로 묶어서 곁에 두었다. 쉽게 풀리도록 매듭을 짓는 과정에 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교한 손가락 놀림 덕분에 결국 성공했다.
'지금이다.'
60여 마리 좀비와 해골이 전투팀과 엉킨 사이 네크로는 여섯 흡혈 좀비를 잡아끌며 앞으로 달렸다. 힘이 7인 네크로를 여섯 좀비는 저항하지 못했다. 가까운 우르크 전사에게 덤비려고 버둥질쳤지만, 네크로의 힘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최대 스탯이 10인 레전드에서 힘 7에 체력 8은 꽤 높은 수준에 속한다.
"혼자서 내게 도전하다니. 네 무모한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족장이 친위대 네 명을 거느리고 네크로를 맞이했다. 성기사 키울 때 혼자 도전하고 같은 대사를 들은 적 있었다. 그때는 소환수도 없이 정말 혼자였다. 물론, 유니크 무기 '불의 심판'은 천군만마보다 더 든든했다.
'몬스터 보고 쫄릴 수도 있구나.'
우르크 전사나 순찰자들도 꽤 흉악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래픽 이상의 '포스'는 없었다. 그런데 족장은 어떻게 연출한 건지, 보는 순간 위축감이 들었다. 살짝 튀어나온 눈이나 콧구멍이 큰 주먹코, 위아래로 흉악하게 솟은 네 개의 송곳니는 일반 우르크와 큰 차이 없다. 덩치가 조금 더 크긴 하지만, 그걸로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설마 스킬?'
다행히 족장이 필요한 대사를 다 한 후에야 네 명의 친위대가 움직였다. 그 사이 네크로는 흡혈 좀비를 묶었던 매듭을 전부 풀었다. 졸지에 자유를 얻은 흡혈 좀비들은 가까운 친위대를 덮쳤다.
네 명의 친위대가 좀비들에게 묶인 걸 확인한 네크로는 싸우는 자들 사이로 달렸다. 말만 친위대고 족장을 보호하려는 의지 따위는 없는지 들러붙은 흡혈 좀비에게만 집중하며 스쳐 지나가는 네크로를 무시했다.
"너의 무모함에 거듭 찬사를 보낸다."
5미터 거리에 네크로가 들어서자 족장이 정해진 대사를 던졌다. 네크로는 달리던 관성 그대로 도약했다. 훌쩍 몸을 날린 네크로는 강타 스킬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한 손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남은 손으로 마나 물약을 입에 부었다. 마나가 충분하긴 한데,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물약을 마셨다.
"자폭!"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전쟁영화에서 가끔 무음으로 주인공이 악다구니를 뱉는 장면을 보여줄 때가 있다. 네크로 상태가 현재 딱 그랬다. 아지랑이보다 왜곡이 훨씬 심한 시각 정보를 제외한 어떠한 정보도 전달받지 못했다. 피부로 느껴지던 바람이나 코로 들어오던 싱그러운 숲 내음, 귀로 들리던 온갖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사라졌다.
- 사망하였습니다. 바로 부활하시겠습니까?
"부활."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회복됐다. 부활하자마자 네크로는 지팡이를 들고 바닥에 쓰러진 족장을 두들겼다. 자폭의 여파에 흡혈 좀비와 친위대도 당했는데, 흡혈 좀비는 같은 편으로 인식되어 직접 피해는 받지 않고 후폭풍에만 휩쓸렸다. 자폭의 어마어마한 위력에 여러 가지 상태이상을 얻은 친위대들은 흡혈 좀비에게 잡혀 미동도 못 했다.
- 지팡이 내구도가 1 남았습니다.
무기 내구도가 1이 되면 음성으로 경고하는 게임 옵션을 활성화했다.
지팡이는 양손 무기다. 그러나 네크로는 신력 스킬 덕분에 한 손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왼손으로 아직 상태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족장을 두드려 패며 오른손으로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죽어, 시발. 어서 죽으라고."
내구도가 얼마 안 남은 무기를 버리고 새 지팡이로 공격했다. 힘 7에 숙련도 꽉 찬 강타 스킬로 쉴새 없이 때렸더니 상태이상이 사라졌을 때 족장 피통은 보일락 말락 바닥을 가리켰다.
"위대한 전사에게 경의를."
뻥튀기 기계에 넣었다 꺼낸 것처럼 처참하게 변한 족장은, 다 죽어가는 주제에 떨림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네크로에게 찬사를 안기고 시체가 되었다.
- 축하합니다. 족장에게 단 한 번의 반격도 허용하지 않았기에 보물상자 등급이 다이아몬드로 정해졌습니다.
이건 계산을 벗어난 부분이다. VR 게임을 할 때 혼자서 우르크 마을에 도전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마스터가 되고 유니크 무기 '불의 심판'을 얻은 후 우르크 마을에 도전했다. 그땐 도망자 마을이 아니라 정식으로 제국에 속한 주술사도 있는 마을이었다.
당연히 가만히 서서 맞으며 때렸기에 이런 업적이 있다는 사실을 여태껏 몰랐다. VR 게임에서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족장이 죽자 친위대를 포함한 마을 구성원이 전부 사라졌다. 24시간 흐르고 족장이 리젠함에 따라 마을 주민들도 생겨난다.
살아남은 40마리 조금 넘는 해골과 좀비들이 다가왔다. 네크로 가까이 다가온 소환수들은 회복의 빛 덕분에 생명력이 조금씩 차올랐다.
맹수의 해골과 이빨 그리고 화려한 깃털로 치장한 족장의 방에는 돈주머니 하나와 상자 2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200골드라. 여럿이 나누면야 얼마 안 된다지만, 혼자서 16만이면 나쁘진 않아. 그러나 시간을 투자하기엔 좀 그렇다. 실패할 가능성도 꽤 크니까.'
예전에 엄선한 사냥터에서 일반 사냥으로만 30만 이상의 일당을 벌었던 네크로였기에, 200골드가 그다지 성에 차진 않았다. 우르크 마을들 사이가 멀고, 주변에 적당한 사냥터도 없다. 당장 골드를 마련해서 레어 아이템에 투자할 생각으로 우르크 도망자 마을을 찾은 거였지,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확률로 따져야 하지만, 레어 아이템 잘 주는 마을만 돌면 돈벌이에는 훨씬 유리하다. 성기사 때 알아낸 드랍률이 높은 마을들을 순회하는 게 도망자 마을 터는 것보다 훨씬 낫다. 마을 외곽의 사냥팀만 상대해도 되기에 실패 부담이 전혀 없으니까.
'사흘. 마을 당 평균 200골드다. 그 돈으로 현재 경매장에 올라온 레어 아이템을 최대한 매입한다.'
네크로 계산으로 대략 사흘 뒤면 아이템 가격이 껑충 뛴다. 대부분 유저가 레전드를 단순한 게임만으로 생각하기에 대량의 신규 유저 유입과 오랜 기간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던 유령 유저의 귀환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많은 사람이 유저 유입으로 인한 수요의 상승을 체감하게 될 거다. 자본주의의 혜택을 듬뿍 받고 자란 신세대들은 아주 당연하게 아이템 가격을 올려버린다.
무늬가 투박한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광석 덩어리들이 있었다. 감정하기 전에는 뭔지 누구도 모른다. 미스릴처럼 귀한 광석일 수도 있고, 그냥 흔하디흔한 철이나 동일 수도 있다. 최악이면 그냥 돌멩이.
'미스릴이면 얼마나 좋을까?'
천 방어구만 허용되는 사령술사. 하지만 미스릴로 실을 뽑아 로브를 짜면 천 방어구로 인정된다. 다른 금속이 전혀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제한이 있어 상자 속 광석 전부 순수 미스릴이 아닌 이상 어림도 없지만.
심장이 툭툭 뛰었다. 다이아몬드 상자. 우르크 도망자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상자다. 우르크 도시쯤 되어야 간혹 등장하는 상자로, 단일 길드는 어림도 없고, PM에서 동맹 길드 12개와 함께 8백 명을 모아 성공해서 얻은 적 있다.
거기에서 마법사 유니크 아이템인 얼음 왕관이 나왔다. PM의 핵심 간부 중 마법사가 스킬을 전부 삭제하고 새로 키운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는데, 그 뒤로 잠잠했다.
'아직 초보니까 유니크보단 최상급 레어가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옵션이 잘 나온 최상급 레어는 유니크보다 훨씬 낫다. 유니크는 우월한 내구도와 똑같은 옵션이 서버에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메리트 그리고 가끔 괜찮은 스킬이 붙는 걸 제외하면 오히려 최상급 레어보다 못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 다이아몬드 등급의 상자 안에는 아이템 두 개가 있었다.
'심 봤다.'
네크로는 저도 모르게 심장 어림에 손을 갖다 댔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아예 후광이 없는 아이템 하나와 밝은 황금색 아이템이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감정하기 전에는 모르지만, 좋은 아이템일수록 밝은 빛을 낸다. 지금까지 본 레어 중에서 가장 밝은 황금빛에 기대감이 부쩍 상승했다.
'퀘스트 아이템, 레어 목걸이.'
같은 레어 목걸이도 급이 나뉜다. 다이아몬드 상자에서 나온 레어 목걸이라면 정말 옵션이 잘 빠졌을 거다. 게다가 엄청나게 밝은 황금빛은, 해당 옵션에서도 최상급 수치임을 암시한다. 설사 본인이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비싸게 팔 수 있다.
'유저 몇만 명 더 늘면 200만 원까지 받을 수도 있어. 천만 원짜리 가상현실 기기를 살 수 있는 재력가들이니.'
유저가 많아질수록 아이템 가격이 올라간다. 귀한 아이템일수록 가격 상승 폭이 더 심하다.
'불의 심판 조금만 더 참다가 팔았으면 몇백 더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랬으면 캐릭터 생성하는 시간에 맞춰 삭제되었던 데이터가 적절하게 복구되는 우연이 발생할 수 없고, 지금처럼 꿀은 못 빨 거란 걸 네크로는 몰랐다. 알았다면 박 대리와 신 사원 집에 한우 세트를 주문해 보냈을지도 모른다.
"전송."
퀘스트 아이템과 레어 목걸이는 은행으로 전송했다. '성기삽니다' 시절 구매한 은행 금고가 그대로 네크로 캐릭터에 연결되었다. 덕분에 은행 금고를 구매하고 확장하는 데 필요한 골드 800을 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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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 실패도 겪으면서 어렵사리 도망자 마을 두 개를 추가로 털었다. 세 번째 마을을 해결하고 도시로 돌아갈 때 네크로 곁에는 해골 8마리와 좀비 3마리만 남았다.
'규모를 100 정도로 불리려면 또 반나절 고생해야 하고, 이놈들 안 죽게 레벨업 시키려면 또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기껏 키워봐야 고등급 사냥터에 가면 또 죽어 나가고. 나 아니면 정말 암울한 스킬이구나.'
길드 지원을 받아 최종 단계의 해골용이나 거인 좀비를 목표로 잡고 전략적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면 정말 힘든 제작형 네크로맨서다.
네크로도 성기사의 오라 계열 스킬이 아니었으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다. 고레벨이 되어서도 괜찮을지 계산 결과가 확실히 나오지 않아 아직도 자신의 스킬 선택을 끊임없이 의심했다.
도시에서 잡템과 쓸모없는 장비를 모두 처리한 네크로는 경매장에 접속했다. 도시나 마을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경매장에서 하나하나 따져가며 실용성이 강하고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레어 아이템만 골랐다.
"일괄 구매."
네크로는 가격이 싸고 옵션이 쓸만한 30골드에서 50골드 사이 레어 아이템을 구매했다. 짧은 기간 모은 골드를 대부분 써버렸다. 혹시나 가격이 오르지 않을 걸 대비해서 본인도 사용할 수 있거나, 반드시 되팔 수 있는 옵션들로 골랐다.
"제길. 안 하던 짓 하려니 심장이 쫄려 죽겠네."
갑자기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겨우 수백 골드, 현금으로 60만 안 되는 금액에도 네크로는 무척이나 떨렸다.
투기를 끝내고 바로 은행 창구로 가서 미확인 아이템을 감정했다.
"아이템 감정."
두 번째 마을은 정말 아까웠다. 딱 세 대 남겨두고 족장의 반격에 한 대 얻어맞았다.
세 번째 마을에서도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상태이상이 적게 걸려서 오히려 족장에게 죽을 뻔했다. 다행히 친위대를 해치운 흡혈 좀비들이 와서 돕는 바람에 겨우 이겼다. 대신 전투조와 싸우던 해골과 좀비들이 5분 뒤에 가세한 순찰팀에게 대부분 죽어버렸다.
그래도 레어 아이템 하나 건져서 퀘스트 아이템 하나에 레어 아이템 2개의 나쁘지 않은 수확을 했다. 캐릭터 만든 지 며칠 안 되는데 이 정도 수익이면 어마어마한 편이다.
"감정 완료했습니다. 직접 확인하십시오."
아이템 감정이 끝난 그때 갑자기 공지가 떴다.
- 10분 뒤 서버 접속을 제한하고 대규모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모든 유저에게 일회용 귀환 스크롤이 주어집니다. 도시나 마을이 아닌 지역에서 로그아웃해서 당한 불이익은 유니콘 사에서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 작가의말
감기가 많이 나았습니다.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부터 1일2연재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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