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귀환1
이례적으로 유니콘에서 광해에게 에르제베트의 침공 날짜를 미리 귀띔했다.
[에르제베트의 공성전은 유니콘에서 생중계하겠습니다. 계약서는 이메일로 이미 보내드렸습니다. 빠른 확인과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친 광해는 바로 메일을 확인했다. 유니콘은 에르제베트의 소금성 공성전 생중계를 원했다. 초상권 및 출연료 개념으로 1억의 계약금을 주고, 광고 수익의 30%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냥 생방송과 비슷하고 시야가 전지적 시점인 것만 달랐다.
계약금은 몰라도 보너스는 광해 혼자서 다 먹는 게 아니었다. 길드는 물론 동맹 세력에까지 골고루 이익이 가도록 보상금을 분배해야 한다. 게다가 광고료 30%가 무척 커 보여도 전쟁 준비에 드는 자금도 만만치 않다.
문제라면 길드와 국가 그리고 각 세력에 할당하는 비율을 광해 본인이 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에르제베트의 실력을 확실히 모르니 준비에 자금을 얼마 투자할지도 막막했다.
검색으로 한계가 있어 뿜뿜의 기획사 사장을 만나 식사하며 조언을 받았다. 연예인들이 어떻게 급이 나뉘는지, 등급에 따라 출연료를 얼마 받는지, 연예인이 왜 그만큼의 가치를 갖는지, 자세히 듣고 나름대로 공식을 만들었다.
"방송 활동을 병행할 생각이 있다면 꼭 저를 찾아주십시오. 이광해 씨랑 여동생 그리고 윤성필 씨는 어느 정도 스타성이 있습니다. 롱런을 생각하시면 트레이닝 몇 년 받으셔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바로 방송 데뷔하셔도 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맨날 전투가 끊이지 않아 몸 뺄 겨를이 없네요."
돌아가자마자 바로 계약 금액을 수정하고 비율을 정해 메일로 보냈다. 계약금을 다섯이 나눠 받는 거로 하고 광고료 배당은 개인이 아닌 세력에만 분배했다. 메일 보내고 5분도 안 되어 유니콘의 차 대리가 전화했다.
[이광해 씨. 위에서 동의했습니다. 디지털 사인을 한 계약서를 보내드렸습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메일을 열어 보니 유니콘이 사인을 끝낸 계약서가 와 있었다. 사인을 끝내고 1분도 안 되어 워터마크로 날짜와 시간이 사인 위에 찍혔다. 5분도 안 지나 계약서 공증이 끝나고 공증 문서도 메일로 도착했다.
근처 공원에 가서 달리기로 땀을 살짝 빼고 돌아오니 동생들도 저녁 먹으려고 로그아웃했다. 광해와 성필이 솜씨를 부려 푸짐하게 집밥을 차렸다.
"오빠, 무슨 일 있어? 뿜뿜네 회사 갔다면서?"
정말 궁금한지 김연이 식사도 마다하고 질문했다.
"에르제베트가 일주일 뒤에 소금성 공격한다. 그리고 공성전 사흘 뒤에 우리 영화 개봉할 거야."
"대박. 우리도 시사회 가는 거야?"
"어. 손님으로. 배우로 포토라인에 서기엔 우리가 너무 한 게 없잖아."
"근데 뿜뿜네 회사는 왜?"
"에르제베트 공성전 유니콘에서 생중계하겠대. 계약금이랑 보너스가 있는데 조언받으려고 갔어. 계약은 이미 끝냈고, 보너스는 동맹들과 나누고 계약금은 우리 다섯만 받기로 했어."
"올해 시작부터 좋네? 근데 공성전 패배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우리만 큰일 나지. 유니콘은 화제만 되면 장땡이야. 레전드를 영화화해서 엔터 쪽에도 손을 뻗으려는 모양이야.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이후 가상현실 기술로 영화를 찍는 바람이 불지도 몰라."
"그냥 게임 동영상을 편집하면 영화 되니까. 이젠 얼굴 때문에 배우 못 하던 사람들도 연기 쉽게 하겠네? 근데 레전드는 돈 버는 게 없는 거 아냐?"
"유튭 덕분에 일반인도 콘텐츠 만들어 돈 벌고 그랬잖아. 그렇다고 유튭이 돈 안 벌어? 레전드는 유니콘의 게임이야. 개인 초상권은 레전드도 어쩔 수 없지만, 남은 부분에서 권리를 주장할 게 꽤 많을 거야. 가상현실이 방송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도 손을 뻗는 거지. 이미 웹 드라마 같은 형식으로 브라운관을 향한 도전이 있었지만, 생각만큼 위력적이진 않았어."
레전드 생방송 때문에 유튭이 살짝 주춤했다. 여러 가지 조치로 다시 기세를 되찾긴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밀릴 게 자명했다. 레전드 세상에선 현실에서 상상만 가능한 일들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근데 만약 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수도 옮기면 에르제베트가 공격 멈출까?"
"우리가 지면 소금성이 뱀파이어 성이 되는 거야. 소금성 주민이 500만이 넘는데, 이들 모두 뱀파이어나 감염자가 돼. 그리고 우리는 소금성과 끝없는 전쟁을 해야겠지. 수성전에 지면 공성전을 이길 가능성도 거의 없으니까."
현성과 성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소금성은 여러 도시와 수로나 육로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였다. 만약 소금성이 뱀파이어 퀸에게 넘어가고, 500만이 넘는 소금성 주민이 그 수하가 된다면 나라가 위험하다.
"형들, 뭔 걱정이야. 이기면 되잖아."
동해의 말에 광해가 머리를 저었다.
"이겨도 문제야. 에르제베트만 해도 드래곤만큼 세다고 그랬어. 우리가 이겨버리면 다른 세력이 더는 우리를 약자로 안 보고 경계하고 견제할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우리가 도시 숫자 2위고 마을은 1위야. 당장은 아니어도 슬슬 견제가 들어올 타이밍인데, 에르제베트를 이기면 더 빨리 그리고 강하게 들어올 거야."
"형, 일단 이기고 보자."
어차피 엿될 거라면 이기고 되는 게 낫다.
"그래. 당연히 이겨야 하는 건데 걱정해서 뭐해. 어서 식사나 하자."
김연은 이미 밥을 새로 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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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역사적은 아닌 것 같은데요. 게임 생중계야 수없이 하셨잖아요."
"기존 게임과 가상현실은 다릅니다. 모니터에 비치는 화면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는 것과 실제와 똑같은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영상으로 화면에 내보내는 건 다릅니다."
"뭐, 그래도 생방송도 그렇고 동영상을 통해 많이 해왔던 일이잖습니까."
"생중계라는 게 다릅니다. 생방송은 유저 시점과 인공위성 시점 두 가지뿐이죠. 동영상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추출하고 각색한 영상이고요. 생중계는 유니콘 인공지능에 한계가 있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보여줘야 할 화면이 많을 때 어느 화면을 메인에 띄우냐가 생중계의 묘미거든요."
유니콘이 섭외한 두 해설위원이 정해진 대본에 따라 대화했다.
"만약 오늘 생중계가 성공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생중계를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카메라 컨트롤도 인공지능이 한다면, 정말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합 인공지능이 1분에 인간 1년 어치의 사고를 한답니다."
"그렇다면 정말 혁명이겠네요."
"기계화 자동화는 인간이 수십 년이나 추구해오던 목표입니다. 기계화야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지만, 자동화는 아직도 변수가 많은 목축업이나 농사나 어업에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이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기계에 맡기면, 진짜 과학자들 예측대로 인간은 머리가 커지고 팔다리가 가는 생명으로 진화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스포츠나 예술은 인공지능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축적한 지식을 통해 판단할 뿐, 창조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자기 계발이나 휴식에 할당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생업에서 해방되어 더 높은 뭔가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진화를 더불어 정신적으로 인류 전체가 한 단계 더 성숙할 기회가 주어지는 거죠."
채팅창에는 두 해설위원을 향한 욕설로 도배되었다. 게임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생뚱맞은 인공지능 타령을 해대고 있으니 열 받을 만도 했다. 동시통역 인공지능이 접속자의 설정을 통해 해당 국가의 언어로 바꿔서 들려줬기에 해설위원의 말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전투의 승자는 누구라고 봅니까?"
"정보가 부족해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유니콘이 시키는 대로 인공지능을 홍보해주고 수명을 늘린 두 해설위원이 드디어 본론에 들어갔다.
"죽어도 10분이면 부활하는 유저가 승리하지 않을까요?"
"전투 시작하고 30분 이후엔 전투에 새롭게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수성 유저는 목숨이 3개뿐입니다. 3번 죽으면 전투에서 배제됩니다."
"유니콘이 추구하는 현실과 다름없는 가상현실 목표를 위배하는 것 같네요?"
"제가 운영팀으로부터 들은 얘긴데요. 이후 공성전 수성전은 모두 특수 필드로 진행한답니다. 공성전과 수성전에서 유저 부활 횟수를 제한할 겁니다."
"박 해설위원께선 참 대단하십니다. 박 위원님 지갑보다 더 열기 힘들다는 레전드 운영팀의 입을 어떻게 열었습니까?"
"김 해설위원께선 소식이 어둡군요. 요즘 신재오 부장의 입이 터진 쌀가마니처럼 정보를 쏟아냅니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안 알려줬다는 듯이, 회사에서 제한한 정보 빼고는 정말 친절하고 상세히 알려줍니다."
운영팀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조금씩 풀면서 공성전의 시작을 기다렸다. 쉬지 않고 계속 대화하던 둘이었지만, 정작 공성전이 시작하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이하동문입니다."
다행히 시청자들도 둘을 욕하기보단 화면에 집중했다.
가장 먼저 화면에 나타난 건 네크로의 탈것 해동청이었다. 금속 비늘이 밝은 후광을 뿜는 메탈 드래곤의 날갯짓은 잉어의 꼬리 짓마냥 부드러웠다. 작게 보이던 해동청의 몸이 점점 크게 확대되었다. 화면에 비늘 몇 장만 보일 정도로 확대한 후, 카메라 시점이 빠르지만 부드럽게 움직였다.
해동청의 배에서 가슴을 지나 목을 훑은 후 턱에서 잠시 멈칫했던 시야는, 곧바로 심술 많아 보이는 드래곤의 콧구멍을 지나 콧등의 잔 비늘을 보여줬다. 휙 눈을 지나쳐서 몽톡한 뿔을 비춘 카메라가 다시 돌아와 해동청의 눈을 화면에 내보냈다.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박힌, 지구의 전 지배자였던 파충류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눈이었다. 폭력과 파괴를 한껏 담은 눈이 점점 확대했다. 길게 찢어진 눈동자 안에 네모난 눈동자가 있었고, 네모난 눈동자 안에 삼각형 눈동자가 있었다.
아무리 파고들어 가도 계속 새로운 눈동자가 나타났다. 필름이 빠르게 감기듯 화면이 휙휙 지나더니 드디어 마지막 눈동자가 정체를 드러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동그랄 수 있을까 싶은 눈동자는 핏물로 찰랑댔다.
그 핏물 안에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의 미녀가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미녀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확대되어 화면을 점령했다. 그리고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멀어졌다. 찰랑거리는 핏물이 다시 등장했고, 핏물을 담은 붉은 대리석 욕조가 보였다. 욕조가 작아짐에 따라 점점 많은 인물이 화면에 등장했다.
"미안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이 훌륭한 화면에 제 목소리가 얹혀서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생각 듭니다만, 출연료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출연료 믿고 어제 카드 긁었거든요."
"뱀파이어 퀸 에르제베트군요. 화면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포스가 느껴지는데, 게임에서 실제로 대면한 유저들은 얼마나 떨릴지 짐작이 어렵네요."
"어제 네크로 유저를 짧게 인터뷰했습니다. 예전에 에르제베트를 한 번 잡은 적 있다고 합니다. WORLD의 재상 NPC 다미안이 그때 얻은 아이템으로 피의 주술사로 전직했다죠."
"그럼 오늘 유저들이 승산 있는 거 아닙니까?"
"그땐 에르제베트가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에르제베트는 신의 기적의 여파에 반항하지 못하고 얀의 화살에 꼼짝없이 당했다. 신의 기적이 없었다면 얀의 화살을 피했을 가능성이 무척 컸다. 이젠 심장을 회복했으니 신의 기적이 내려진다 해도 화살 세 발이나 심장에 꽂는 행운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수성전에 참여한 유저는 54만 명이 넘습니다. 정확히는 54만 하고도 3029명이 더 있습니다. 전투 NPC는 총 19만입니다. 10만 조금 넘는 숫자는 네크로 왕국 NPC이고 남은 9만 정도는 유저의 용병이거나 뱀파이어에 원한이 있어 찾아온 NPC입니다."
"뱀파이어 퀸 측은 상급 뱀파이어만 2천이 넘습니다. 중급 뱀파이어가 3만이고 하급은 27만입니다. 감염자는 7만인데 대부분 사령술사와 저주술사 그리고 주술사라고 합니다."
"게다가 드레이크가 5백 마리나 있군요. 양측의 공중전도 볼만하겠습니다."
유저가 하는 공성전과 달리 임시 신전이 생성되지 않았다. 에르제베트가 몸을 담근 붉은 대리석 욕조가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번쩍 뜬 에르제베트의 눈동자는 기대완 달리 검은색이었다.
보이지 않는 실로 당기는 것처럼, 에르제베트의 몸이 욕조에서 일으켜졌다. 찰랑대던 붉은 핏물이 새빨간 드레스가 되어 에르제베트의 몸을 감쌌다. 붉은 머릿결과 눈썹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드레스로 노출 없이 몸을 감쌌지만, 오뚝한 콧날과 붉은 입술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예전의 에르제베트와 생김새만 비슷한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정도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
"오늘, 여기서. 인간이 섬기는 바알드로의 신전을 파괴하고 그 대주교의 해골을 요강으로 만들어 마구간에 넣어야겠다."
오랫동안 숨겼던 짝사랑을 고백하듯 수줍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밀어를 속삭이듯 달콤하게, 오래된 친구에게 일상을 전하듯 스스럼없이. 에르제베트의 아름다운 입술을 비집고 포근한 목소리가 나왔다. 비록 그 내용엔 증오의 가시가 잔뜩 돋쳐있지만, 저 얼굴 저 표정과 저 목소리로 상욕을 퍼부어도 낯을 찡그릴 사람은 몇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여기서, 흡혈귀 일족이 여왕을 잃을 것이다. 네 심장을 영원히 멈출 푸른 화살이 오늘 쏘아질 것이다. 여왕이 사라지면 신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고, 우리는 기어코 그 신을 찾아 목을 베고 심장에 썩은 말뚝을 박을 것이다."
유저들은 보통 부끄러워서 생략하는 전투 선언. 왠지 멋있게 들렸다.
- 작가의말
마지막 대사에 양념 많이 쳤습니다. 요즘 이런 식으로 미사여구를 잔뜩 치면 필력 좋다고 칭찬받더군요.
개인적으론 생소한 단어를 오남용하며 있는 척하는 글을 혐오합니다. 그래서 글이 담백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는데, 메인 요리 정도는 양념 좀 쳐야 할 것 같습니다.
뜬금포 2탄의 비밀이 여기서 밝혀집니다. 신재오 부장의 입을 수월하게 열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아마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예상하고 계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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