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정령왕과 태풍의 눈1
낚싯대가 만궁으로 당긴 활보다 더 심하게 휘었다. 제이크가 네크로 허리를 잡고 버텼고 해동청은 제이크 허리띠를 물어 당겼다. 레벨2가 되면서 해동청은 큰 오토바이 정도 크기가 되었고 힘도 훨씬 세졌다.
팟 소리와 함께 낚싯대가 세상 곧게 펴졌다. 낚싯대로부터 느껴지는 강한 진동이 손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 진동은 네크로의 마지막 인내를 무너뜨리고 차곡차곡 쌓인 짜증을 폭발시켰다.
"시발. 말이 돼? 낚시로 고래를 낚으라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된다. 난 힘이 부족하고 넌 기술이 부족하다."
'너 게임 NPC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고생문이 훤했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기술 키우면 된다."
네크로는 아직 전문도 아닌 숙련 단계에 머물러 있는 낚시 스킬을 보며 후회했다. 평소 할 일 없을 때 낚시나 좀 할걸.
제이크와 함께 갯지렁이를 넉넉히 잡은 네크로는 당분간 휴식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람 고래를 잡으려면 초식 상어를 미끼로 써야 했다. 마침 미리 잡아둔 초식 상어도 미끼로 다 날려버렸기에 제이크 말대로 당분간 다른 물고기를 낚으며 숙련도 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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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뭐 봐?"
"낚시 동영상. 스킬 말고 기술 익히려고."
"현실 낚시 기술이 도움이 돼?"
"원리를 알면 도움이 되긴 해. 낚시라는 걸 이해하고 대상 물고기를 이해하면 좀 더 쉽게 잡혀. 레전드도 어차피 현실 데이터 참조했을 거 아냐."
광해의 말에 동해도 세공 관련 동영상을 검색해서 즐겨찾기에 추가했다.
"넌 조각칼 사고 얼음으로 연습해도 되잖아. 신소재로 만든 얇은 장갑 끼면 손가락이 얼지도 않는대."
"오빠. 그럼 나도 그림 그리는 연습 좀 할까?"
"네 재능은 노력이 필요치 않아."
개를 고양이처럼 그리는 재능도 하늘이 내린 게 틀림없다.
"현성아, 개그 좀 해 봐. 광대하려면 개그 연습도 해야 할 거 아냐."
"성필이 넌 그럼 곡괭이질 해. 삽질도 좀 하고."
시킨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둘이 또 투덕거렸다.
"형, 언제 돌아와?"
"말도 마.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쉽게 생각했는데, 차라리 뱀파이어 퀸 열 마리랑 싸우는 게 나을 거 같아."
"요새 다른 국가들 다 엄청 확장하는데, 우리만 그대로야."
"백작 작위 나올 때까지 확장 안 하기로 했다니까. 그나저나 야마토랑 초인동맹은 요즘 뭐 소식 없어?"
"야마토는 유저 모두 돈 벌려고 혈안이 됐어. 연소탄 최대고객이긴 한데, 자꾸 싸게 해달라고 징징거려서 짜증 나 죽겠어."
네크로의 탄광에서 생산한 연소탄은 NPC 것보다 조금 쌌다. 세라프가 판매하는 가격을 기준으로 3% 싸게 파는 것이기에 누구도 불만 없었다. 네크로가 연소탄을 전략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건, 네크로의 3% 할인 연소탄이 모든 인간 도시와 마을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누구한테 팔고 누구한테 안 팔지에 따라 3%의 어마어마한 차이가 났다.
달랑 도시 하나 혹은 마을 하나면 3%가 별거 아니겠지만, 마을이 수십 개면 그 3%가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초인동맹 자금이 풀렸어. 검은 언덕 남쪽 도시를 점령하고 수도 세우겠대. 남은 도시는 북부에서 점령할 생각인 거 같아."
"만리장성에서 풀어줬나 보다. 철혈팔기가 북부에서 제대로 확장한 모양이네."
"둘이 같은 시간에 도시 하나씩 공격하는 거 보면 은밀한 거래가 있었던 거 같아."
"역천이랑 가미카제가 도시 16개까지 확장했어. 대륙 도시만 16개야. 희망의 등대는 아무나 가져가라고 그냥 버려뒀어."
"그건 아닐 거야. 누가 희망의 등대를 점령하고 왕족 NPC를 국왕으로 삼으면 국왕이 죽어도 부활하잖아. 그럼 나라가 한 번 더 생존할 수 있어. 부활한 왕을 데리고 다른 도시로 가서 수도 선포하면 되니까. 꽤 전략적인 곳이어서 역천이 비싸게 팔아먹을 거 같아."
"와, 형은 이런 생각 어떻게 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음식이 도착했다. 동해는 피자 두 조각에 족발 조금 먹고 물러섰다. 그에 대조되게 김연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연이 너 그러다 살찌겠다. 게임 때문에 운동도 전혀 안 하는데."
"나 170까지 크면 밥 줄일 거야. 다이어트도 그때 하면 돼."
"여자 키 너무 크면 남자 만나기 힘들어."
"괜찮아. 어차피 난 덩치 큰 남자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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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바람. 어떻게 하면 바람을 가둘 수 있을까?"
"먼저 바람을 들어야 해. 바람이 외치는 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바람도 몰라. 그러나 바람 소리를 들으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 느껴져."
"다음엔 바람을 봐야지. 바람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 바람 하면 떠오르는 게 뭐야? 바로 자유야. 바람은 죽일 수 있지만 가둘 순 없어. 왜냐면 갇힌 순간 바람은 소멸하거든. 바람의 자유를 느껴. 그게 바람을 바르게 보는 거야."
"마지막엔 바람을 가두는 거야. 아까 가둘 수 없다고 했지만, 그건 바람을 모르는 자들을 말하는 거야. 바람을 아는 자는 바람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이해하고 바람의 자유를 이해하거든. 그걸 이해하고 바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크기의 공간에 바람을 가두는 거야."
'시발, 개소리구나.'
"근데 정령왕은 어떻게 잠들게 됐지?"
"사향 고래가 있어. 실수로 사향이 활동기인 사향 고래를 먹고 취했어. 깨우려면 초식 상어의 똥밖에 없는데. 나도 섬에 갇혀서 똥 구하러 바다로 못 들어가."
"바람 고래가 사향 고래 먹어도 취할까?"
"당연하지. 정령왕도 취하는데 바람 고래 따위가."
"사향 고래는 뭘 먹는데?"
"닥치는 대로 잘 먹어."
"제이크, 우리 사향 고래를 낚는 거야."
정보를 얻은 네크로는 제이크에게 9강 낚싯대를 건넸다. 초식 상어나 바람 고래는 퀘스트 당사자인 네크로가 직접 잡아야 하지만, 사향 고래는 제이크가 잡아도 된다.
그러나 미끼를 가리지 않는 사향 고래여서 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초식 상어는 미역을 미끼로 쓰기에 다른 물고기들이 잘 물지 않았고, 바람 고래는 초식 상어를 미끼로 쓰기에 작은 고기들이 바늘을 삼키지 못했다.
'낚시 스킬 숙련도 올린다고 생각하자.'
기술보다는 운에 기대야 하는 상황. 그리고 네크로의 운은 나쁘지 않았다. VR 게임일 때 60레벨 되고 얼마 안 되어 이벤트 몹을 잡고 유니크 반지를 얻었다. 그걸 팔아 1천6백만 현금을 챙겼다. 그리고 마스터 되기 직전에 유니크 망치를 얻어서 게임으로 먹고사는 결심을 내렸다.
억울하게 캐릭터 삭제한 후에도 행운의 연속이었다. 가끔은 운영자가 일부러 자신을 밀어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제이크 수고했어."
이틀 만에 사향 고래를 낚시로 잡아 올린 제이크는 배꼽 아래에서 사향을 뜯어냈다. 산책하는 바람이 말하던 활동기인지 모르지만, 코를 탁 쏘는 냄새가 무척 강하게 맡아졌다.
"이제부터 초식 상어 낚는 거야."
제이크는 몇 분 안 되어 초식 상어 한 마리 낚아 올렸다. 배를 가르고 사향을 넣은 후 봉합했다. 네크로는 초식 상어를 미끼로 끼우고 바다에 던졌다. 부레가 터져 부력을 잃은 초식 상어는 깊은 바다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근데 실제로 이런 지형이 있을까?'
갯바위에서 심해 낚시가 가능한 특이한 지형이었다. 현실에도 이런 지형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바람의 정령왕 덕분에 이렇게 된 건지. 꽤 설정에 충실한 레전드여서 이러한 지형에도 뭔가 이유나 설정이 있을 것 같았다.
'바다에 잠긴 부분에 구멍이 있고 던전이 있다든지.'
몇 분 안 되어 바람 고래가 바늘을 물고 요동쳤다.
'잠깐. 고래가 어떻게 저 작은 낚싯바늘에 잡히지?'
미터급 대어를 상대로 한 낚싯바늘이긴 하지만, 고래를 상대하기엔 너무 작았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낚시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현실적인 패치를 하겠지.'
아까 들은 산책하는 바람의 개소리가 도움이 되었다. 바람 고래가 마음껏 뛰놀게 놔뒀다. 굳이 힘 뺀답시고 낚싯대를 휘젓지도 않고 릴링도 하지 않았다. 전에는 밀고 당기며 상대 힘을 빼려고 했는데 늘 네크로 힘이 먼저 빠졌고, 결국 낚싯바늘까지 빠졌다.
'됐다.'
괜히 입 밖으로 꺼내면 부정 탈까 봐 속으로만 환호했다. 사향에 '중독'되었는지 바람 고래가 힘을 잃었다. 감고 당기는 대로 순순히 끌려 나왔다.
바람 고래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정상이라면 무게 제한이 걸리겠지만, 퀘스트 아이템이라 순순히 들어갔다.
흥분으로 꽉 쥔 주먹을 겨우 펴고 마음을 안정한 후 바람의 정령왕이 잠든 곳으로 갔다.
"나 초식 상어 똥이 있는데."
"정말? 그럼 제발 정령왕 좀 깨워줘."
"정령왕 깨워주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줄 수 있어?"
"그럼. 존재 걸고 맹세할게."
잠자는 정령왕 가까이 다가간 네크로는 인벤토리에서 똥을 꺼냈다. 정령왕 코 밑에 갖다 대니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 바람의 정령왕이 깨어났습니다.
- 자신을 깨워준 네크로에게 큰 호감을 느꼈습니다.
- 정령왕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 민첩이 더 빠르게 상승합니다.
- 명중률이 올랐습니다. 상대의 회피율에 상관없이 일정 명중률 수준을 유지합니다.
- 회피율이 올랐습니다. 상대의 명중률에 상관없이 일정 회피율 수준을 유지합니다.
- 바람 속성 공격을 받을 때 데미지가 감소합니다.
"여기 선물로 바람 고래를 준비했습니다."
정령왕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바람 고래를 흡입했다. 입으로 뜯어먹는 게 아니라 실제로 바람 들이키는 것처럼 쭉 빨아들였다.
- 바람의 정령왕이 잠들었습니다.
사향에 취한 바람 고래를 먹은 정령왕이 또 취해서 잠들었다. 산책하는 바람이 가슴을 쾅쾅 쳤다. 네크로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태풍의 눈을 수습했다.
'초식 상어 낚시 또 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경험이 쌓였고 제이크도 함께할 수 있으니 며칠 안 걸릴 자신이 있었다. 다만, 너무 많이 잡아서 씨가 마르지 않았을까 살짝 걱정되었다.
"야, 나 네 반지에 깃들어도 돼?"
"왜?"
"아까 약속했잖아. 널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기로. 근데 정령왕이 잠들어서 약속 못 지키게 됐어. 그럼 나 소멸한단 말이야."
"내 반지에 깃들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
"그럼."
"수락한다."
- 산책하는 바람이 패왕의 권위 반지에 깃들었습니다.
- 패왕의 권위 반지가 성장을 끝냈습니다.
- 패왕의 권위 반지가 신화 등급이 되었습니다.
이름 : 패왕의 권위
분류 : 반지
등급 : 신화
능력 : 스킬 쿨타임 감소
능력 : 통솔력 +8
능력 : 소환계열 스킬 지속 시간 50% 증가
특별 : 스킬 '죽음의 군단' 사용 가능 - 쿨타임 10일
특별 : 스킬 '텔레포트' 사용 가능 - 쿨타임 30일
'뭐지? 왜 갑자기 성장이 끝났지? 최고신이 개입한 건가?'
네크로의 예측대로 최고신이 개입했다. 패왕의 권위에 성장형이 붙어있었기에 이후 다른 정령도 반지에 들러붙을 수 있다. 원래 유니크 때부터 밸런스 붕괴를 걱정케 하는 아이템이었는데, 이젠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공간이동 최고등급 스킬 텔레포트를 내주면서 성장형 특성을 지웠다.
- 모든 조건을 만족하여 퀘스트를 완성했습니다.
- 다음 목적지는 북부의 설원에 있는 하얀 뿔 산맥입니다.
- 하얀 뿔 산맥에서 길 안내를 해줄 수인족을 찾으십시오.
"텔레포트, 소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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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입니다."
"확실한 정보 맞는가?"
"거짓 정보라고 의심하기보단, 사실이라고 믿는 게 낫습니다."
"당장 네크로 길드와 연락한다."
야마토가 급히 연락해 만남이 성사됐다. 오아시스 성의 즐기자 길드 하우스의 방에서 네크로와 진돗개가 야마토의 간부들과 대면했다.
"묻고 싶습니다. 역천 얼음 마법, 쿨타임 180일 맞습니까?"
"스킬 설명엔 그런데, 실제로 180일 안 되어도 스킬 쓰는 것 같습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아이템 내장이 아니어서 쿨타임 감소라고 합니다."
한국어가 조금 서툴렀지만, 의미는 확실히 전달되었다.
"도와주십시오."
"힘없는 우리가 어찌 돕는단 말씀입니까?"
"도시 세 개만 가져가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버틸 수 있겠습니다."
도시 세 개를 주는 쪽이 굽신굽신 사정하고, 받은 쪽이 난감한 기색으로 거듭 거절했다.
"도시 하나만 더 늘여도 우리 길드 망합니다."
"한 달 운영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제가 퀘스트로 밖을 돌다가 돌아온 지 며칠 안 됩니다. 다른 분들과 상의하겠습니다."
"형, 도시 세 개는 괜찮아. 우리 인구 지금 800만이야. 오히려 경작할 밭이 부족해."
"그 외의 지출은? 그리고 우리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도 안 좋을 텐데."
"다들 우르크를 너무 얕봤어. 지금 북부도 그렇고 역천 길드도 그렇고. 어느 정도 확장하고 나서 우르크에게 시달려서 꼼짝 못 하고 있어."
"우리도 그 꼴이 나지 말란 법이 없는데."
"지도 공유."
진돗개가 지도를 네크로에게 공유했다.
"요 세 개 성을 차지하면 우르크와 수비 면적 엄청 줄일 수 있어. 야마토랑 서로 공격 안 한다는 전제 하이긴 하지만."
"초인동맹은?"
"원하는 성을 야마토가 차지해서 고민하고 있어."
"그럼 우린 두 개 갖고 초인동맹에 하나 주는 거로 하자."
파티 채널로 대화를 마친 네크로는 야마토 길드에게 초인동맹을 언급했다. 서로 이해타산이 맞아 합의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즐기자 길드에게 도시 2개 내주고 초인동맹에 1개 내준 야마토는 우르크에게도 도시 3개를 연이어 내줬다.
빙하시대 덕분에 역천은 당분간 핵탄두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 26억에 사간 전함도 그렇고, 총 2억에 사간 아이템도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한편, 야마토가 한껏 위축되자 가미카제와 역천은 눈길을 북부로 돌렸다. 그곳에선 철혈팔기가 만리장성과 초인동맹의 필사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속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 작가의말
상어는 부레가 없습니다. 글에선 부레와 부력 라임 타느라 일부러 넣었습니다. 저 때문에 상어도 부레 있다고 여기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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