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굴 던전2
우르크 마을이나 도시를 공격할 때와 달리, 대족장을 죽여도 모든 우르크가 사라지지 않았다. 대족장이 죽자 전투 끝이라고 방심했던 쪼꼬미는 순식간에 친위대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시발. 아이템 수리비만 몇백 골드야. 게다가 공헌도 3위도 물 건너갔어.'
대기실에서 10분 카운트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쪼꼬미가 땅을 쳤다. 그러나 대족장을 먼저 해치운 게 아무 효과도 없는 건 아니었다. 대족장의 죽음에 몇 가지 버프가 사라졌다.
10분이 지나서 쪼꼬미가 부활했을 땐 이미 전투가 거의 끝났다. 부활하자마자 습관적으로 은신을 펼친 쪼꼬미는, 의욕을 잃고 대족장의 의자에 퍼더버렸다. 대족장이 드랍한 레어 아이템도 쪼꼬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상급 레어 나와봤자 수리비랑 내구도 복구하는 비용만으로도 적자다.
다른 아이템들은 괜찮은데, 칼날비를 사용하며 내구도 0이 된 비수가 문제다. 몇 골드 혹은 몇십 골드만 나올 다른 템들과 달리, 유니크 비수 수리비만 해도 수백 골드 나간다.
레어 아이템 하나 먹고 멍하니 있는데, 배틀넷과 역천이 들어왔다.
"너희는 밖에서 잘 지키고 있어.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배틀넷의 무식함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가 시청을 울렸다. 쪼꼬미는 둘이 무슨 음모를 꾸미나 궁금해서 귀를 세웠다.
"입구가 도시 내부, 그것도 핵심 건물인 집무청에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럼요. 이런 게 있다는 단서를 알면서도 겨우 발견했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둘이 다가오자 쪼꼬미는 슬며시 구석으로 피했다. 배틀넷이 의자를 잡고 뒤로 훌쩍 젖혔다. 의자가 뒤로 홱 넘어가더니, 책상이 드르륵 밀려났다.
"힘이 8 이상이어야 제낄 수 있는 의자입니다."
책상이 밀려나고 생긴 지하 통로 입구가 미처 닫히기 전에 쪼꼬미도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니 인공미가 점점 사라졌다. 계단이 끝난 다음부터는 울퉁불퉁한 길이 펼쳐졌다.
은신 스킬의 정식 명칭은 '그림자 걷기'다. 더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그림자 숨기'도 있는데, 걷지 못하는 페널티가 있다. 그림자 걷기는 어두울수록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 덕분에 쪼꼬미는 얼마 안 지나 역천과 배틀넷을 따라잡았다.
"붉은 광산 던전을 처음 발견했을 땐 정말 애먹었습니다. 광석 모으는 수집퀘만 하면서 친밀도를 쌓았죠. 개인 친밀도는 쉽게 쌓을 수 있었는데 길드 대 종족 친밀도는 너무 어렵더군요."
'배틀넷 평소 일부러 무식한 척 한 건가? 세 보이려고? 지금 말투는 완전 대기업 사원 프레젠테이션인데?'
쪼꼬미는 모르지만, 배틀넷은 붉은 광산 던전의 종족과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걸 강조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혀가 꼬이는 걸 억지로 참으며 교양있는 말투를 썼다.
"퀘스트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역천이 나른한 말투로 배틀넷의 연설을 끊었다.
"그래, 오래된 친구. 무슨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는가."
쪼꼬미로선 처음 보는 종족이다.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과 몸에 부스스한 털마저 붉은색이다. 눈은 퇴화하여 흰자위만 있었다.
"배를 만들려고 한다. 길이 80갈의 용골을 붉은 광석으로 제작해달라."
"잠시만."
다른 부위에 비교해 팔이 유난히 굵고 손이 큰 종족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산했다.
"1만2천 골드."
"결과 좋으면 계속 거래한다. 길드 이름으로 약속."
"좋아. 1만8백 골드."
"한곕니다."
"진행하죠. 골드로 드릴까요, 현금으로 드릴까요?"
"골드로 주시죠."
"무기나 방어구는 안 만드는가?"
"용골 의뢰가 가장 중요한 거야. 용골 의뢰 끝나면 그때 무기랑 방어구 제작을 맡길게."
'시발. 그래서 이 새끼들이 유난히 유니크 아이템이 많았구나.'
유니크를 얻을 수 있는 경로는 우르크 사냥밖에 없었다. 그것도 마을은 안 되고 우륵하이의 우르크들만 매우 낮은 확률로 유니크를 드랍했다.
그리고 가끔 이벤트로 무작위 등장하는 인간형 몹들이 유니크를 드물게 드랍했다. 이건 온전히 운에 맡겨야 할 부분이어서, 널리 알려진 방법은 우륵하이에서 사냥하는 것밖에 없다고 봐도 되었다.
OB가 굳이 비인기 사냥터 근처의 피의 장벽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설마. 저 역천이란 새끼는 우리 길드가 숨긴 비밀도 알고 있을까? 왠지 그럴 가능성이 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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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념적인 하루야."
현피가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유니크만 줘서 레어는 아예 안주나 했지."
네크로가 4연속 유니크를 얻었고, 넷이 함께 와서 이틀 연속 유니크를 얻었다. 그리고 사흘째에 여왕개미는 레어템 하나 달랑 떨구고 산화했다.
"목걸이 끗발이 다한 거야. 사채업자들 눈물이 말랐나 봐."
여왕개미를 잡고 처음으로 레어 아이템을 얻었다. 지금까지 줄곧 유니크만 드랍했어서 레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가 지워졌다. 그런 상태에서 레어템이 떡하니 놓여있으니 다들 힘 빠졌다. 네크로만 빼고.
"형 대단하다. 어떻게 이 와중에도 스킬 숙련도 올릴 생각 하지?"
"좀비 강화랑 해골 강화 그리고 패시브 스킬 숙련도 올리는 데 정말 좋아. 정작 좀비 제작이랑 해골 제작은 숙련도가 잘 안 오르지만."
그때 여왕개미를 잡고 쉬는 일행을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다름 아니라 피의 장벽 지배권을 회복한 OB 길드의 유저들이었다.
"PK 할까?"
"참아. 중심 도시랑 남부 항구 복구할 때까지 사고 치지 말라고 했잖아."
"고작 넷인데 뭘."
"넷이니까 별거 없을 거잖아."
"아냐. 저 전사 목에 레어 목걸이. 백짜리 최상급 레어야."
"백 골드? 백만 원?"
"백만 원. 언제부터 백 골드가 최상급이 되었어?"
이들은 길드 채널이 아닌 새로 생긴 파티 채널 기능을 사용했다. 지금 네크로 일행도 파티 채널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대화가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았다.
"벗겨먹기 스킬 있어?"
"숙련 등급인데요. 아직 실전이 부족해 전문 등급 못 됐습니다."
"시발. 죽여도 목걸이 못 벗겨내면 말짱 황 아냐."
"그럼 그냥 스트레스 풀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근데 넷이서 여왕개미 잡았으면 고수 아닐까?"
"시발. 저 네크로맨서 봐봐. 제작 스킬 모두 실패하고 있잖아. 다른 무리가 여왕개미 없앤 후 버린 템 주우러 나타난 거지들 틀림없어. 아무래도 비밀의 방에서 보물 상자 노리고 온 놈들이야. 저기 앉아있는 네크로맨서가 불사 패시브 달고 몸으로 함정 터뜨리며 상자 들춘 게 틀림없다니까."
"경매하자. 우린 40이고 저들은 넷이야. 골드 가장 많이 낸 네 명이 PK하고, 그 골드는 남은 사람들이 나누는 거야."
"1골드.","나두.","나두."
1골드 이상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 가장 먼저 부른 넷이 당첨되었다.
"백짜리 템 먹으면 한턱내는 거다?"
"고작 백 갖고 누구 코에 붙인다고. 차라리 거지 똥꼬에서 콩나물 빼 먹어라."
넷이 공동으로 훌쩍 뛰어들어 기습했다. 개미 사체를 주무르던 네크로맨서가 발라당 눕더니 두 발로 전사를 찼다. 발차기에 밀려난 전사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떴다. 아무리 다리 힘이 팔보다 세다곤 하지만, 그래봤자 스탯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속절없이 밀린 게 이해되지 않았다.
"도와줘?"
조롱기 가득 담긴 말이 파티 채널로 들려왔다. 전사는 이를 악물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제작 네크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편 전사가 달려왔다. 움직임이 느린 게 광전사 후유증인 것 같은데, 속도보다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계속 제작 네크를 공격하다간 전사에게 한칼 먹을 가능성이 크다.
'시발. 어느 멍청한 새끼가 후유증 전사한테 당한 거야?'
전사에게 덤빈 도둑은 출혈 상태이상의 부가효과 중 하나인 '빈혈'로 드러누웠다. 도둑의 동맥 베기는 전사가 높은 저항으로 버텨냈다.
'살은 준다.'
전사를 무시하고 제작 네크를 죽이려 했다. 자기 공격력과 방어력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제작 네크의 지팡이가 교묘하게 움직이면서 전사 무기를 흘려버렸다.
'시발, 아무리 가상현실이라도 이게 가능해?'
레어 검의 절삭 속성에 옆구리가 깊숙이 베인 OB 길드의 전사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익숙한 대기실 풍경이었다.
"병신들. 방심해도 분수가 있지."
좋은 구경거리다 싶었던 남은 길드원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전사를 습격한 도둑은 반격에 당해 출혈로 바닥에 쓰러졌다가 곧 죽었다. 무인과 소환 네크로 보이는 둘을 공격한 놈들은 성공했지만, 소환 네크는 바로 부활했다.
그사이 제작 네크를 습격한 전사가 죽었고, 전사와 네크 손에 남은 둘도 죽었다. 넷이 넷을 습격했는데, 넷 다 죽고 저쪽은 셋이나 남아있는 상황.
36명이 우르르 몰려가자, 거지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길드 채널이나 파티 채널로 대화하는지 입술만 움직이고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 모양만 봐도 시발을 연발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소환."
비록 어렵지 않게 해치웠지만, 상대 아이템 수준이 높고 실력도 괜찮은 편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수십 명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자 욕지거리가 나왔다. 마음을 진정한 네크로는 바로 소환으로 숨겨둔 소환수들을 불렀다.
"진짜 시발이다. 결국 자폭 쓰는구나. 여왕개미 상대로 안 써서 기뻤는데."
아이템을 수련자 세트로 바꾼 네크로가 자폭을 썼다. 갑자기 나타난 언데드는 60레벨에 마스터 랭크의 고수들에게 순식간에 녹았다. 그러나 네크로가 가운데로 파고들어 자폭하는 걸 막아내지 못하도록 주의를 끌어주는 중대한 공헌을 했다.
"자폭."
자폭 후 바로 부활한 네크로의 귀에 진돗개의 말이 들려왔다.
"자폭 안 써서 유니크 안 준 건가?"
아이템을 재빨리 교체한 네크로는 바닥에 누운 마법사 머리를 때렸다. 저항을 꽤 맞췄는지 몇 대 버티긴 했지만, 상태이상이 사라질 때까지 살아있진 못했다.
"파멸."
여왕개미 상대로도 쓰지 않았던 궁극기를 펼친 진돗개가 상대 성기사의 팔 하나 베어버렸다. 레어 검의 절삭 속성이 정말 적절하게 발휘되었다.
그러나 성기사도 전투 경험이 많은지 잘린 팔을 신경도 안 쓰고 방패치기로 진돗개를 공격했다.
"자폭."
네 번째로 부활한 현성이가 끝내 기회를 잡고 자폭을 사용했다. 직접 공격에 노출되지 않은 네크로는 미처 후폭풍이 오기 전에 정신 못 차리는 상대 사냥꾼 유저의 뒤통수를 후렸다. 작은 혹이 삐죽 솟았다.
후폭풍에 네크로도 중심 잡기 힘들었다. 그래도 힘 7에 민첩 5 덕분에 넘어지거나 날려가진 않았다. 바로 부활한 현성이 지팡이를 들고 바닥에 쓰러진 유저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안타깝게도 수준 이하의 타격으로 판정받아 데미지는 1도 들어가지 않았다.
"파멸의 돌풍."
딱 3초만 유지되었지만, 육신의 자유를 빼앗긴 PK 범들이 끌려와서 시체로 변했다.
"시발, 비수 부서졌어."
귀속하지 않았기에 네크로가 선물로 준 비수는 진돗개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그사이 언데드가 100마리 이상 규모로 늘었다. 딱히 60레벨의 마스터 랭크 유저에게 피해를 주진 못했지만, 도망가지 못하게 잘 잡아두었다.
10분 지나서 멋모르고 부활한 네 유저를 또 죽인 후, 부활한 동해와 함께 개미굴 공동을 빠르게 떠났다. 물론 유저들이 드랍한 아이템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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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굴 던전은 나날이 발전했다. 부화장뿐 아니라 보물 방도 위치가 랜덤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대륙의 던전들도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 중앙섬에 묶여있는 유저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
부화장에서 네크로만 좀비와 해골 제작하는 데 몰두하고, 남은 셋은 우두커니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OB 길드 확실해?"
"아는 얼굴 몇 있었어."
"지금쯤 던전 입구 막고 나가는 사람들 조사하고 난리겠지?"
느긋한 말투는 네크로 것이었다.
"형, 왜 이렇게 침착해?"
"우리가 누군지 모를 거야. 조만간 얘네 중심 도시로 가야 하잖아. 우리한테 신경 오래 못 써."
부화장의 알을 전부 좀비와 해골로 만든 후. 네크로의 풍부한 경험 덕분에 안전지대를 찾아내 로그아웃했다.
다들 걱정이 많은 것 같아서 현성이 차로 조금 먼 곳으로 외식하러 갔다. 분위기 좋고 맛도 좋은 중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한 넷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귀가했다.
그러나 기분은 한순간 원위치했다.
"형, 큰일이야. 누가 영상 게시판에 올렸어."
꽉 찬 1분의 짧은 영상이고 올린 지 1시간 조금 넘었다. 그런데 이미 수백 개 댓글이 달렸다.
"다들 버그 아니냐고 하는데?"
"공지 떴어."
공지 내용은 현재 올려진 영상에 관한 해명이었다. 주요 골자를 보면.
부화장에서 알로도 좀비 혹은 해골을 만들 수 있는데, 이건 버그가 맞다.
제작 네크는 통솔 제한이 없다. 언데드가 너무 많아서 이동에 방해될 수도 있기에 역소환 기능으로 감출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역소환한 언데드를 소환할 때, 악용을 막으려고 1초에 10마리씩 소환되게 제한했다. 해당 영상은 부화장의 알로 수천 마리 언데드를 만든 제작 네크의 전투 영상이다.
공지 말미에는 개미 알을 생명체로 인정하지만, 좀비와 해골 전사를 제작할 수 없도록 수정했다고 적혔다.
"형. 우리 얼굴 다 팔렸어."
"영상만 찍은 게 아니라 스샷을 찍었을 수도 있어."
"성형으로 얼굴 바꿔도 소용없을 것 같아. 스킬 조합이나 광해 형 전투 방식만 봐도 바로 들킬걸."
광해는 마른세수로 얼굴의 혈액순환을 도왔다. 수많은 생각이 마구 교차했다. 머릿속을 비우고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템 팔아서 한 달에 수천만 수익을 올렸다. 잠시 힐링 받아도 되지 않을까?'
"형, 웃음이 나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지우고 정색한 표정으로 바꿨다.
"얘들아, 우리 배 타고 대륙 가자. 대륙에 최초로 도착한 팀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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