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언덕의 푸른 꽃잎2
꺽. 트림을 끝낸 해동청이 입을 우물거리더니 퉤 하고 아이템 하나 뱉어냈다.
"고향 언덕의 푸른 꽃잎."
- 퀘스트 고향 언덕의 푸른 꽃잎을 완성했습니다.
- 다음 퀘스트인 '피 머금은 장미'로 넘어갑니다.
- 퀘스트 관련 정보는 다미안에게서 얻으십시오.
그웩의 치유술로도 다미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철벽이 다미안을 업고 던전 탈출 스크롤을 찢었다. 하지만 철벽만 사라지고 다미안은 그대로 남았다.
"같은 편이 아니라는 거구나. 제이크 맵 밝혀."
지도를 보며 1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던전 밖으로 나가니 철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꿈이 아니었구나."
던전 나오자마자 정신을 차린 다미안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웩이 치유 스킬을 펼치자 다미안의 안색이 점점 나아졌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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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 결단의 시간입니다."
"저희 결심은 확고합니다. 죽은 후 언데드가 되어서라도 우르크와 싸우겠습니다."
다미안은 가신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기사의 탑 꼭대기에 뚫린 창문을 통해 밖을 살폈다. 잎과 가지는 물론 꽃잎까지 푸르러서 영지 이름마저 푸른 언덕이었다. 그 푸른 언덕이 3년이 넘는 전투에 검은 언덕이 되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체가 썩으면서 독기가 생겼고, 그 독기를 견디지 못한 꽃나무들이 하나둘 말라 죽었다.
덕분에 우르크들이 공격하는 루트가 한정되어 수비에 도움이 되었지만, 영주성의 모든 사람이 텃밭에서 나는 채소와 3년이 넘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밀가루로 목숨을 연명했다.
"영주님, 술 세 통에 밀가루 열 포대 남았습니다. 영주성의 쥐도 다 잡아먹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데드의 꼬임에 넘어가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 그지없군."
"어차피 우리가 무너지면 소금성이나 푸른 호수가 우르크 손에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젭니다. 차라리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는 언데드가 되어 영원히 우르크와 싸우는 게 낫습니다."
"그래도 좀 더 버텨보면 신이 기적을 내려주시지 않을까?"
또각또각. 기사의 탑 최고층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 개에 달하는 계단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 기사의 탑 최고층. 무장한 기사나 병사라면 더 묵직한 소리를 내야 했고 맨발로 다니는 하인이라면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말아야 했다.
"오, 내 사랑하는 딸. 힘들게 여기까진 왜 왔어."
철편을 박은 가죽 구두를 신은 다미안의 열 살짜리 딸이 또각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비록 경사가 높지 않지만, 천 개나 되는 계단을 타고 오른 여자아이의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고 작은 콧구멍이 원망스럽다는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빠, 나 푸른 꽃잎 찾아냈어."
거의 다미안 손바닥 절반 크기의 푸른 꽃잎이 딸의 손에 들려있었다. 다미안은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우르크의 손에 죽은 부인이 생전에 산책하다가 엄청 큰 푸른 꽃을 발견하고 뜯어서 책갈피에 끼워 넣었다. 꽃잎이 마르면서 대부분 바스러졌고 겨우 하나만 남았다.
부인이 생각날 때나 가끔 찾아보고 평소에는 쉽게 손이 닿지 않을 책장 가장 높은 곳에 숨겨뒀다. 어른도 사다리 놓고 겨우 닿을 곳에 숨긴 책을 어린 딸이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했다.
"아빠. 나 제물로 바쳐. 이대로 우르크에게 지는 건 자존심이 상해."
다미안은 매서운 눈으로 가신들을 쏘아봤다. 평소라면 눈을 깔며 시선을 마주칠 엄두도 못 냈을 가신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미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영주, 우리 가족도 모조리 우르크 손에 죽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 최후의 발악이나 합시다."
둥둥둥.
멀리서 맹수 가죽으로 만든 북이 울렸다. 영리함이 부족하지만 우직함이 넘치는 우르크. 3년 동안 놈들과 싸우면서 든 확신이 있었다. 이놈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하지만 다미안의 영주성은 조용했다. 살아서 숨 쉬는 자 대부분이 기사의 탑에 모여있었다. 여기에 없는 자들은 거동조차 불편한 자들이었다.
"에르제베트, 그대의 거래에 응하노라."
흡혈귀의 여왕 에르제베트가 나타났다. 가증스럽게도 다미안의 사별한 부인 모습으로. 자기 어머니가 아닌 걸 알면서도 다미안의 딸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에르제베트를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사령술사의 능력을 내리노라. 고귀한 푸른 피가 흐르는 네 딸은 내가 데려가겠다."
에르제베트의 손에서 붉은 장미가 나타나더니 쏜살같이 날아서 다미안의 딸 얀의 심장에 꽂혔다. 그 장면을 보면서도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계약은 신성하니까.
에르제베트와 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혹여 계약이 깨질까 봐, 다미안은 딸을 마지막으로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영주시여,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가신들이 자신의 심장이나 목에 비수를 꽂았다. 점점 크게 들려오는 북소리에 다미안은 마음을 다잡고 주문을 외웠다. 검은 연기가 다미안의 몸에서 타래처럼 풀려나가 영주성과 언덕을 뒤덮었다. 수많은 시체가 안식을 버리고 언데드가 되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언데드와 포기를 모르는 우르크들이 묵직하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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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제베트는 체이테 성에 살고 있습니다. 체이테 성은 검은 백조 호수 중심에 있는 영생의 섬에 있습니다.
- 에르제베트를 죽이고 얀의 가슴에 꽂힌 피 머금은 장미를 뽑아내십시오. 1/2의 숲의 종족 혈통을 갖춘 얀을 구해내면 숲의 종족 푸레가 등장합니다. 사냥꾼과 약초꾼을 비롯한 일부 직업 유저는 푸레 종족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너무 슬퍼."
철벽은 물론 현피와 동해도 눈물을 흘렸다.
"야, 과몰입 안 좋아. 이게 게임이라는 걸 항상 명심해."
"냉동인간."
철벽의 일침에 동해와 현피도 눈물을 그치고 웃어버렸다.
"다미안, 당신의 딸을 우리가 구해오겠다."
"정말? 그게 가능한가? 내 딸이 아직 살아있는가?"
"그런데 국왕인 내가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 힘들다. 그래서 네가 내 세력에 들어오고 나 대신 국가 관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겠다. 내 딸만 구해온다면."
다미안을 즐기자 길드원으로 받아들인 후, 국가 재상으로 임명했다. 직업이나 스탯 그리고 명성치 모두 부합하여 재상으로 임명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웃기는 건, 재상보다 명성이나 스탯 요구가 낮은 관직들은 여전히 채워 넣을 NPC가 없어서 비워뒀다.
- 재상을 임명했습니다.
- 행정 비용이 13% 감소합니다.
- 인심이 안정되었습니다. 치안이 상승했습니다.
- 모든 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이 다미안의 명성에 끌려 WORLD 왕국에 귀순합니다.
- 인구 증가 속도가 7% 상승했습니다.
"요 몇 개는 내가 정한 비율대로 투자한다. 당분간 군사 투자는 없다. 남은 분야는 상황에 따라 네가 투자해라."
"전하의 명에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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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대륙 북부. 수십 척의 배가 해안가에 나타났다. 배마다 어찌 이 많은 유저가 탈 수 있을지 의심들 정도로 많은 유저가 내렸다.
중국 삼대 세력 중 하나인 철혈팔기의 유저들이었다.
백 척이 넘는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오는 과정에서 반 이상이 침몰했다. 그 배들에 탔던 유저들이 로그인 할 때 남은 배에 무작위로 등장했기에, 모든 배에서 적재량을 초과하는 유저가 내렸다.
"마나포도 샀어야 했는데."
세 세력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중국의 중앙섬에서 바다 항해에 적합한 배 백 척을 마련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십여 척을 제외하면 전부 엄청 비싼 가격으로 역천 길드로부터 구매한 배였다.
마탄포의 하위호환인 마나포는 사거리나 위력이나 마탄포보다 훨씬 부족했다. 그러나 공격 데미지만 보면 최상위 유저보다도 나았다. 비싼 연료를 소모한다는 점과 쉽게 뜨거워져서 사용이 불편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었다. 돈 걱정 없어서 효율 따위를 따질 필요 없는 철혈팔기 입장에서는 마나포가 더 많은 결함이 있더라도 무제한으로 사들이고 싶었다.
"제길. 한국 따위에게 농락당하다니."
"농락이라니? 우리가 배 팔라고 하니까 군말 없이 팔았잖아."
"멍청아. 역천 길드 혼자서 배 백 대나 만들었겠어? 일본 신풍 길드 배까지 가져다가 우리한테 판 거야."
한국 중앙섬의 남부 항구는 한 달에 배 12척 정도 만든다. 백 척에 가까운 배는 8개 월정도 생산량에 맞먹는다. 더구나 초반에는 한 달에 두세 척 정도가 한계였다.
"얘네 판단엔 이젠 배가 별 필요 없다는 거야. 특히 마나포가 없는 배는 얼마 오든지 다 침몰시킬 수 있다는 게야. 전함과 배 일부만 남기고 우리한테 악성 재고 떠넘긴 거라고."
"문제는 우리한테 필요하잖아."
"젠장. 그게 문제야. 예전에도 미국에서 유행하던 아이템이 일본에서 유행하고, 일본에서 유행하던 아이템이 한국에서 유행하고, 한국에서 유행이 끝난 다음 중국에 와서 유행했어. 항상 남들보다 늦으니까 돈은 다 일본 한국이 벌어갔지."
"뭘 그리 복잡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대륙 동남부나 서남부에서 부대끼는 놈들과 달리 우린 대륙 북부에서 혼자 놀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길드들 단속 잘해. 도시는 포탈 없는 수준으로 딱 하나만 점령한다. 그리고 마을만 점령하는 거야. 쓸데없이 포탈 있는 도시 점령하면 바로 다른 놈들이 몰려올 거란 말이야."
머릿수로는 만리장성이 최고고 실력으론 철혈팔기가 최고다. 단합은 초인동맹이 남은 두 길드를 압도했다. 정부를 등에 업은 만리장성보다 훨씬 자금력이 탄탄한 철혈팔기여서 초반부터 아이템 구매에 돈 물 쓰듯 하며 실력 차이를 벌려갔다. 그런데 너무 실력 위주로 세력을 굴리다 보니 제멋대로인 놈이 많아졌다. 돈줄이 한둘이 아니어서 벌써 계파가 갈라지고 내부 알력이 심화했다.
"그렇게 말하면 또 도전하는 놈들은 다 쓰러뜨리면 된다는 둥 개소리할 거야."
"최악은 백련교야. 그 새끼들이 북부로 오면 우린 망한다고."
회교도. 중국에서 무슬림을 믿는 자들이 만든 레전드 세력 백련교. 중국 정부마저 이들을 함부로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이슬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생각해 이들에게 우대 정책을 펼치고 종교적 자유를 엄청 많이 줬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를 탄압하던 것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야, 또라이들 왔다."
1서버로 불리는 한국 서버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직업인 기마병. 고수 대부분이 처음부터 있었던 8대 직업이기도 하고, 솔로잉이나 소규모 파티를 즐기는 한국 유저들에겐 말을 타고 단체 전투를 해야 하는 기마병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효율을 따지는 초인동맹이나 만리장성도 레전드의 전쟁에선 공성전과 수성전 위주가 될 수밖에 없음을 분석해내고 기마병을 키우지 않았다.
오직 청나라의 무적 기병을 그리워하는 철혈팔기의 일부 유저들만 기마병 직업을 선택했다. 말이 없거나 무리를 짓지 못하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마병. 다행히 직업 특성상 말이 죽어도 일정 시간 지나면 다시 소환할 수 있었다.
"근데 저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단 말이야. 세상 참 불공평해."
중앙섬에서는 무리를 지어 사냥터를 쓸고 다니는 민폐. 공성전이나 수성전 때 손가락만 빠는 쓸모없는 놈. 던전 공략할 때도 지형이 허락하지 않으면 뒤에서 조용히 걷기나 하는 짐짝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대륙에 오니 달라졌다. 도시 공성전에는 여전히 쓸모없는 놈이지만, 도시 대신 마을 공략 위주여서 기마병의 활약이 예견됐다. 이동 속도가 빠르고 활동 범위가 일반 유저들보다 훨씬 넓어서 공격에도 수비에도 중히 쓰일 계획이었다.
"일본 대화(야마토) 길드도 기마병 엄청 키웠다던데."
"그래서 신풍 길드랑 역천 길드가 도시 점령 못 하고 있잖아. 마을 수비 체계를 완성해야 도시를 점령할 거야. 안 그럼 기마병에게 그간 점령한 마을이 전부 털릴 게 분명해."
도시를 점령해 포탈을 여는 순간 야마토의 기마병들이 건너가 마을을 싹 쓸어버릴 것이다. 점령하지 않고 파괴만 일삼아도 고구려엔 큰 부담이었다.
"우린 대륙 북부, 대화랑 신풍 그리고 역천은 동남부, 초인동맹은 서부. 만리장성은 어딜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그쪽은 왕의 혈통 얻느라 정신없어. NPC를 왕으로 모시면 제약을 받을 뿐만 아니라 NPC 왕이 죽기라도 하면 다시 나라 세우지도 못하잖아."
"근데 우린 왜 서부로 안 간 거야?"
"대화랑 초인동맹이 연맹했어. 네크로 길드가 중간에서 중개인 했다고 하던데. 게다가 네크로 길드랑 만리장성 사이에도 뭔가 협약이 있어. 만리장성이랑 손잡은 한국 2대 세력 중 하나인 대한제국이 지금 서부에서 활동하잖아. 성이나 마을 하나 점령하지 않은 채 사냥만 열심히 한다고 들었어."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기마부대가 준비를 끝냈다. 뭐라 구호를 외친 후 기마부대가 2킬로미터 밖에 보이는 마을을 덮쳤다.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우린 언제쯤 내부 행정이 아니라 앞에 나서는 스타 유저가 될까?"
"꿈이나 깨. 우리처럼 만족이랑 한족 혼혈은 아무리 능력 있고 캐릭 잘 뽑혀도 앞에 내세우진 않아. 이쪽에선 만족 취급 제대로 안 해주고 저쪽에선 한족 아니라 그러고. 정말 좆 같은 세상이야."
"젠장. 필드 전에선 정말 강하네. 마을 점령 끝났다."
그냥 말 타고 쭉 밀고 들어갔다. 단일 면적밀도가 높을수록 방어력과 저항 그리고 생명력이 상승하는 병과 특성상, 대륙 변두리 마을에 사는 우르크들의 공격은 막거나 피하지도 않고 그냥 몸으로 때웠다.
"가자. 돌대가리들한테 우리가 세운 작전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지."
"시발. 게임이나 전쟁, 둘 중 하나라도 이해하고 와야 할 거 아냐. 아무것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질문이나 해대고."
"그래도 우리 돈줄이라고. 그리고 멍청하면 속여먹기 좋잖아."
"말 잘해서 지원 더 받아내면 보너스라도 주든가."
- 작가의말
다음 편은 결이 살짝 다릅니다. 흐름이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시도인데, 냉정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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