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용암
"반형운, 혹시 철혈팔기랑 몰래 거래했는가?"
가미카제 길드는 그간 기가 팍 죽어 지냈다. 마나포도 반형운이 독점 공급자이고 빙하시대는 어마어마한 스킬이었다. 다른 마법사 혹은 직업들도 분명히 저런 재앙급 스킬이 있을 텐데, 쉽게 얻지는 못했다.
처음부터 군대식으로 세력을 키운 후발주자들의 비애였다. 맨땅에 헤딩하며 어둠 속을 헤쳐온 한국 유저들은 역천과 네크로라는 규격 외로 칭할 수 있는 유저를 두 명이나 보유했다.
"난 당신들의 정보력에 매우 실망했다."
"정보를 공유하고 상의해서 결정해야 할 거 아냐."
"일단 내 말을 듣고 판단해."
"북부가 부활한 NPC들의 반란으로 나라가 전복되었어. 철혈팔기도 몰랐던 왕실 창고가 갑자기 나타났고, 그걸 드래곤에게 바치는 거로 난동이 끝났지."
반형운은 녹차로 목을 데웠다.
"북부 발전 수준이 팍 떨어져서 철혈팔기는 우리 쪽으로 옮기려고 의견을 모았다."
"사실인가?"
"지금이라도 알아봐. 사실인지 아닌지."
미지근해진 녹차가 마음에 안 들어 버리고 따뜻한 녹차를 잔에 부었다. 후후 불어서 적합한 온도로 식힌 후 천천히 삼켰다. 목이 시원하게 풀리며 기분이 나아졌다.
"철혈팔기가 건너오면 야마토도 건너와서 우릴 괴롭힐 거야. 만리장성도 건너와서 우리랑 철혈팔기를 동시에 괴롭히겠지. 성을 23개나 차지한 우리를 좋게 보는 세력은 없어."
"그래서 철혈팔기랑 연락해서 좋은 정보를 건넸지. 북부 온도가 오르고 곡식 생산량이 300%까지 상승할 거라는 걸. 이건 내가 천만 엔 써서 어렵게 얻어낸 정보야. 그걸 철혈팔기에게 알려서 우리 쪽으로 안 건너오게 했지."
"결과적으로 잘한 건 맞는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한테 정보 공개하고 함께 상의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철혈팔기한테 암암리에 동맹 맺자고 제안하면서 저 정보 던져준 거다. 너희랑 상의했으면 철혈팔기가 내 의도를 의심부터 했겠지. 내부 단속 좀 해라."
"우린 비밀 엄수에 자신 있다."
"내가 정보 던진 후 철혈팔기가 10분 동안 딴소리하면서 시간 끌더라. 그 정확한 시간을 문자로 알려줄 테니, 간부 중 그 시간대에 통화한 사람 있는지 확인이나 해봐."
"고작 그 정보로 철혈팔기가 돈 많이 들 게 뻔한 북부에 남기로 했다고?"
"쿨타임 돌아오는 대로 서부 한 번 견제해 주기로 약속했다. 철혈팔기가 건너오면 도시는 몰라도 마을은 몰살이다. 기마병에 대처할 방법을 한시 급히 마련해야 한다."
"기마병은 숫자가 많아지면 방어력 생명력 그리고 저항 모두 올라간다. 저주술사 아니면 대량의 사냥꾼밖에 없다."
"우리 길드에서 푸레 다섯 키우고 있다. 마스터까지 키우고 위력이 어떤지 확인되면 결과를 공유하겠다."
숲의 종족 푸레가 되면 스킬 숙련도가 30%로 떨어졌다. 기존 숙련도가 푸레 종족에서는 30% 수준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푸레의 전투력을 기대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러나 길드 단위로 키우는 건 고민해 봐야 할 일이었다. 퀘스트를 못 끝내면 부족을 떠나지 못하게 결계로 가뒀다. 꽤 긴 시간 전력이 유실될 걸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그 비율을 얼마로 할지 가늠해야 했다. 위력이 강한 직업이나 종족을 무작정 많이 키운다고 대규모 집단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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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자 길드, 대외적으로 네크로 길드로 더 많이 불리는 대형 길드. 길드원이 1600명에 달하는데, 생산직이 절대 대부분이었다. 전투 직업은 채 서른도 되지 않았다.
특히 농부 직업이 천 명에 달하는 아주 기괴한 길드였다.
그리고 이 길드의 길드장이 사실 진돗개라는 걸 모르는 유저가 대부분이었다. 동맹 길드 사이에선 네크로보다 인기가 더 높은 진돗개는, 전사 직업에 가장 중요한 힘을 키우려고 오늘도 탄광에서 곡괭이를 들고 벽을 찍었다.
깡 소리와 함께 곡괭이에서 불꽃이 번쩍했다.
- 행운 스탯이 7에서 3이 되었습니다.
-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습니다.
네크로가 바람의 정령왕 깨우려고 낚시에 몰두할 때, 진돗개는 탄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게임 시간으로 한 달에 어마어마한 채굴 기록을 세우고 행운 스탯을 얻었다.
대장장이나 광부들은 작은 업적을 세워도 쉽게 얻는 스탯. 스탯 올리는 방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스탯 소모도 대중없어서 다들 크게 기대하지 않던 스탯이었다.
"형, 주먹 크기 다이아몬드 캐냈어."
진돗개의 말이 길드 채널로 들려오기 바쁘게, 네크로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탄광에서 전설 등급 다이아몬드를 얻었습니다. 탄광 가치가 1.3배로 격상합니다.
- 해당 다이아몬드로 왕관을 만들면 국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네크로는 머리에 쓴 비룡의 투구를 벗어서 손으로 정겹게 쓸었다.
'얘도 이젠 보내줄 때가 됐구나. 투구 없는 사람은 철벽뿐인가?'
광부가 캐낸 모든 물건은 자동으로 창고에 들어갔다. 네크로는 창고로부터 해당 다이아몬드를 찾아들고 세공사를 찾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첫 코부터 제대로 꿰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장간을 방문했다.
"전하, 소인의 재주로는 감히 시도도 못 하겠습니다. 이건 드워프 아니면 만질 수 없는 물건입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아공간에 넣은 네크로는 텔레포트의 쿨타임을 확인했다. 며칠 안 남은 걸 확인하고 일단 비룡의 투구를 좀 더 사용하기로 했다.
'국정이나 신경 쓰자. 사냥터가 마땅치도 않고.'
망치 대신 도장을 든 네크로는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국가 대소사를 처리했다. 모든 마을이 최소 대형 마을로 되도록 신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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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포트, 드래곤 산맥."
네크로의 국가는 자작이 6명으로 늘었다. 이제 자작 2명만 더 생기면 백작을 임명할 수 있고, 백작을 임명하면 네크로의 우르크 제국 백작 작위가 소멸한다. 그러면 우르크 도시 및 마을을 점령해 세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다.
"제이크."
"알테르 화산. 완전히 죽은 사화산이다."
'뭐지? 난 검은 용암 호수를 떠올렸는데.'
해동청은 감히 소환하지 못했다. 드래곤은 같은 종족끼리도 사이가 나쁘다. 드래곤 밀도가 대륙 어디보다 높은 곳에서 탈것이라지만 정체성은 드래곤이 분명한 해동청을 소환하는 게 무척 꺼려졌다.
"저기 큰 새 있다."
네크로는 제이크와 함께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퀘스트 관련된 새라면 몹이어도 말이 통할 거고, 그게 아니라면 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 해동청이 있어 비행 몹도 딱히 겁나진 않지만, 귀찮은 건 사절.
"누구냐?"
"바알드로의 추종자 네크로다. 너는 누구냐?"
"레오칸에 쫓겨 알테르에 자리 잡은 불새 일족의 족장이다."
"레오칸은 이미 죽었을 텐데?"
"레오칸의 죽음은 우리도 확인했다. 하지만, 불새의 봉우리는 이미 불씨를 피우기 적합하지 않게 변했다. 오랜 기간 관리하지 않았으니."
불새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퀘스트 해결의 실마리가 이들에게 있다고 느껴졌다.
"혹시 근처에 불의 정령왕이 있어?"
"드래곤 산맥에 정령왕이 살 수 없다. 드래곤은 자기 속성에 맞는 정령왕을 잡아두는 습성이 있으니까."
"정령왕은 드래곤만큼 강하다고 들었는데."
"근데 정령왕은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그럼 혹시 용암의 질주를 어떻게 구하는지 방법을 알아?"
"불씨를 끌어오는 과정에 용암의 질주가 생겨나기도 한다."
네크로는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하얀 뿔 산맥에 무작정 찾아갔다가 삽질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텔레포트로 이동하면 그래도 비슷한 위치로 보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지금 상황은 그 기대에 넘치게 부응했다.
'난 퀘스트 걸려 있으니까, 그 과정에 내가 참여하기만 하면 무조건 생겨날 거야.'
"그래, 불씨를 어떻게 끌어오지?"
"땅굴을 파야 한다."
'또?'
"우리는 이미 이곳을 관리하여 불씨를 받아들여도 괜찮게 가꿨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다른 화산까지 땅굴을 뚫고 그쪽 용암을 끌어오는 거다. 용암이 알테르까지 한달음에 질주해오면 불씨가 옮겨질 것이고, 알테르는 새로운 불새의 둥지가 된다."
"실패하면?"
"그럼 우린 다른 사화산을 찾아 새롭게 가꿔야겠지. 늙지 않는 우리에게 수십 년은 짧은 시간이야."
'불새 무리가 하나밖에 없는 건가? 게임이니까 여기서 실패해도 다른 불새 무리를 찾아내면 퀘스트가 이어지겠지? 아니야. 실패는 생각도 말고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필요한 정보를 다 캐물은 네크로는 참담한 마음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부터 4백 킬로미터나 되는 곳의 화산까지 땅굴을 뚫어야 한다고? 나 땅 파는 스킬도 없는데.'
네크로는 막막한 마음을 억지로 추슬렀다.
'첫 번째 퀘스트만 봐도, 내가 낚시꾼 직업을 선택한 데 맞춰서 퀘스트를 줬어. 이것도 반드시 해결책이 있을 거야.'
낚시를 못 한다면 바다에 잠수해서 싸우는 방법도 있고, 바다의 물고기들을 먹이로 유인해서 사냥하는 방법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네크로는 낚시 스킬을 보유한 탓에 낚시만 생각했던 거였다.
터무니없는 오해였지만, 그래도 네크로가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됐다.
"너희는 땅 팔 줄 알아?"
"모른다. 신의 안배에 따라 누군가 우릴 도울 거다."
'참 편한 마인드다. 늙지 않는다고 느긋하고, 신이 안배했다고 느긋하고.'
"그게 누군지는 알아?"
"우린 모른다. 신이 알면 된다."
"돗개야, 혹시 있어?"
길드 채널에서 진돗개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불새 부족이 있는 지역이 마침 안전지대여서 네크로는 로그아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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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지으라고? 갑자기 왜?"
도서관 지으려면 아카데미도 지어야 하고 신학교도 지어야 한다. 그리고 인쇄소도 만들어야 하고 나무를 베는 목공소도 운영해야 한다.
"미안. 내가 너무 나갔지? 도서관을 지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내가 지금 퀘스트 하는데 정보 부족으로 미칠 지경이야."
"뭔데? 희망의 등대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잖아. 나 거기 책 거의 다 읽었어."
"땅굴 엄청 잘 파는 종족이 필요해. 말이 통하는."
수도에 대도서관을 지으면 굳이 책을 일일이 읽어볼 필요가 없다. 대도서관을 지으면 생기는 사서 NPC에게 질문하면 필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물론 후작 이상 작위의 유저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둬서 당장 도서관을 지어도 이용할 사람은 네크로밖에 없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도서관을 반드시 지어야 할 이유가 절실했다. 대륙은 상상했던 것보다 게임 요소가 넘쳐났지만, 단순한 게임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많이 품었다.
"형, 조금 급한 거 아냐?"
성필이 말에 광해는 고개를 저었다.
"에르제베트. 걔 죽일 방법도 미리 알아내야지. 드래곤만큼 강하다잖아. 나 드래곤한테 반항도 못 했어. 한 대 때리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리젠했나 확인하고, 리젠했으면 바로 죽여버리자. 어차피 심장이 다 나은 상태로 리젠될 게 아니잖아. 얀이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고 우리도 실력 꽤 늘었어."
"내가 걱정하는 건 에르제베트가 숨어버리는 거야."
"설마? 몹인데."
"우리가 투라칸 죽였을 때, 구룩 부족이나 다른 NPC들에겐 큰 상처 입고 도망친 거로 기억됐잖아. 에르제베트가 리젠한 후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잖아. 우리한테 큰 상처를 입었다고 여긴다면 우리를 피해 숨을지도 몰라."
성필은 다미안과 상의해서 도서관은 물론 기사 학교와 마법사 학교를 세울 계획을 짰다. 다른 국가에서 스카우트해갈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설정상 대부분은 자신을 양성한 국가에 충성하려 한다. 국가가 오랜 기간 기사나 마법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망생으로 버려두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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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대륙에서 땅굴 가장 잘 파는 종족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이성이 없는 존재 말고 말이 통하는 종족으로 말입니다."
방랑자가 백이 넘는 거대한 숙영지를 찾은 네크로가 음식을 나눠주고 질문했다.
"천산갑이야. 걔들 땅굴 진짜 잘 파."
"멍청한 놈. 말이 통해야 한다잖아. 천산갑은 말랑말랑한 땅만 파고 말도 안 통해. 내가 알기론 검은 바위 드워프가 땅굴을 가장 잘 파."
"검은 바위 드워프는 속도가 느려. 걔들은 예술성 강조하면서 늘 땅굴 벽에 벽화를 넣으려 하지. 내가 알기론 코볼트가 최고야. 만 명 단위 부족으로 살기에 속도도 빠르고."
"코볼트면 다 땅을 잘 팝니까?"
"아니지. 코볼트 중에서도 빨간 코 부족이 최고야. 속도도 빠르고 안정적이고 게다가 성실해. 빨간 코 코볼트가 지금까지 계약을 어겼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 없어."
순수 기술 측면에서 봤을 때 검은 바위 드워프가 짱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장인 정신이 문제였다. 예술성을 강조하며 벽화를 그리는가 하면, 군데군데 조각상을 세우기도 했다. 게다가 훌륭한 벽화나 조각상이 나오는 날이면 일을 멈추고 부족 잔치를 열어 맥주나 마시면서 놀았다.
네크로의 마음은 이미 빨간 코 코볼트로 기울었다. 그러나 숙영지의 방랑자들은 검은 바위 드워프와 빨간 코 코볼트 중 누가 더 우수한지를 놓고 멱살잡이를 했다. 결국, 말다툼이 주먹 다툼으로 변했고 적아 구분 없이 한데 엉켜서 싸웠다.
"당신의 무력이 인상적입니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난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저주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드래곤 산맥 최강의 전사. 부족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이름은 없다."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네크로와 제이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서 있는 전사였다. 지금에야 네크로가 근접 캐릭의 느낌이 더 강해졌고 제이크도 마음에 들어 괜찮지만, 옛날 사령술사 시절이라면 마음이 엄청나게 동했을 것 같았다.
"그럼 다들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이만."
절대 안녕하지 않을 것 같은 숙영지를 떠나 흰 수염 드워프 부족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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