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흔적을 찾아서4
"동해야."
동해를 불렀지만, 사실상 진돗개에게 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바짝 긴장한 채 자기 차례만 기다리던 동해가 영광일섬으로 투라칸의 머리를 공격한 후 빠르게 빠져나갔다.
"광전사."
광전사 스킬을 펼친 진돗개가 먹보가 잡은 뒷다리 말고 남은 뒷다리를 힘껏 찍었다. 칼로 벤다고 하기보단 도끼로 찍었다는 게 더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예상외로 강한 일격에 투라칸이 거센 몸부림을 쳤다.
집요하게 뒷다리 하나를 뼈가 보일 정도로 찍어버린 진돗개가 타겟을 바꿔 앞다리를 공격했다. 수련자 세트를 유니크 투구와 에픽 목걸이로 바꾼 네크로는 신의 회초리를 들고 뼈가 보이는 뒷다리를 두드렸다. 유니크 지팡이가 뼈를 때리는 소리가 딱딱 울렸지만, 상태이상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투라칸이 약간 애절하게 들리는 울음을 토했다.
"형, 늑대들이 몰려와."
"원형진."
원형진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진법이다. 비록 투라칸이 보호 대상은 아니지만, 진법의 용도가 딱 들어맞았다. 죽음의 기사 둘과 해골 기사 하나 그리고 2백 마리가 넘는 리치와 해골 마법사들이 함정을 둘러싸고 다가오는 늑대들을 처리했다.
동해와 현피가 늑대들을 막아섰다. 동해는 용풍권으로 늑대들에게 스턴을 유발했고, 현피는 광폭화 저주로 늑대들끼리 싸우게 했다. 전황이 밀리는 듯하여지자 네크로도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지팡이를 들고 늑대를 상대했다. 투라칸과 달리 늑대 상대로는 상태이상이 팍팍 터져서 한사람 몫을 넉넉히 해냈다.
"상처 작열."
가뭉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마법 스크롤로 소환한 마법 생물들이 투라칸에게 작은 상처들을 꽤 줬다. 상처 작열 저주에 상처마다 불꽃이 생겨났다. 그냥 불이 아닌 저주로 불러온 불이라 투라칸도 쉽게 끄지 못했다.
"참수!"
투라칸의 저항이 충분히 낮아졌다는 판단이 서자 진돗개는 계속 노리던 다리와 몸통 대신 목을 벴다. 그러나 투라칸도 만만치 않아 목이 크게 베었지만, 머리가 잘리진 않았다.
"스턴 먹어라."
신의 불로 타오르는 유니크 무기가 투라칸의 머리에 연신 떨어졌다. 지금까진 공격을 자제하고 두 손으로 방패를 조종하는 데 전념했지만, 투라칸의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지자 과감하게 무기를 꺼냈다.
"돗오빠, 스턴이야."
신의 불 스킬 덕분에 스턴이 먹혔다. 스턴이라는 말에 진돗개는 바로 검을 추켜들고 세로베기를 펼쳤다.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검으로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면서 진돗개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현실에서도 이 베기가 먹힐까?'
"형, 머리 받아."
진돗개가 골퍼처럼 양손 검 검면으로 투라칸의 머리를 구덩이 밖으로 쳐올렸다.
"먹보 공격."
잡고 있던 뒷다리를 놓은 먹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발 하나 들어서 투라칸의 뒷다리를 밟은 후, 굵은 두 팔이 엇갈아가면서 투라칸의 몸에 떨어졌다. 제대로 만들지 못한 북을 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투라칸 몸에서 연신 울렸다.
"나 빨래하는 거 같아."
투라칸의 머리를 지팡이로 내려치면서 네크로가 푸념했다. 진돗개는 물론 철벽도 공격할 때마다 피통을 조금씩 깎아내렸다. 그런데 공격을 가장 많이 하는 네크로는 피통을 깎아내지 못했고 상태이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해골 마법사와 리치가 점점 줄었다. 몰려드는 늑대가 점점 많아지는 반면, 언데드는 줄기만 했다.
"형, 비켜."
먹보랑 함께 몸통을 두드리던 진돗개가 밖으로 나왔다.
"왜?"
"광전사 끝났어. 나 지금 투라칸에게 한 대만 맞아도 죽어."
투라칸 머리를 진돗개에게 넘긴 네크로는 늑대 사체로 좀비와 해골 전사를 만들었다. 얼마 못 버티고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았다.
"영원한 안식."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 같은 남자 가뭉. 네크로 일행이 구해다 준 황혼의 결정으로 만든 수정구가 부서졌다. 그리고 피통이 20% 정도 남아있던 투라칸이 즉사했다.
투라칸이 죽자 늑대들이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룩들이 재빨리 진형을 수습한 후 조직적으로 늑대를 목책 밖으로 쫓아냈다.
제이크가 칼을 들고 늑대 가슴을 도렸다. 제이크가 뽑아낸 심장이 반투명한 후광을 뿜는 아이템으로 변했다. 외양으로는 목걸이처럼 보였다.
"전설 목걸이다. 대박이야."
원래부터 북적이던 채팅창이 폭주했다. 네크로 일행이 전설템을 몇 개 공개하긴 했으나 획득 과정은 밝히지 않았다. 공식적으론 레전드 게임 첫 전설템 드랍인 셈이었다.
- 돌발 이벤트입니다.
- 아끼던 수하인 투라칸의 영원한 죽음이 드래곤 아쿠라온스텐즈에게 전해졌습니다.
- 분노한 아쿠라온스텐즈가 파열의 협곡으로 오고 있습니다.
- 아쿠라온스텐즈에게서 살아남으십시오. 어마어마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래곤 온단다. 빨리 중요한 템 은행으로 보내."
바로 목걸이를 은행으로 전송한 네크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련자 세트를 착용했다. 진돗개 등도 수련자 세트로 아이템을 교체했다.
"그웩, 드래곤이 오고 있으니 다들 대피하라고 알려주십시오."
그웩이 소리 지르자 NPC들과 그룩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심지어 투라칸의 부하들인 늑대들도 꼬리를 말고 정신없이 달렸다.
은색 비늘에 약간 푸른빛이 섞였다. 길고 멋진 뿔이 머리에 여러 개 나 있고 세모 눈에 길쭉한 눈동자가 흉악하게 빛났다. 날개는 넉 장이었고 꼬리가 무척 길었다. 네 다리 모두 무척 튼튼했고 꼬리 끝에 달린 가시 모양의 뿔 세 개가 눈길을 끌었다.
날개를 펄럭이지도 않고 그대로 허공에 멈춘 드래곤이 귀 아픈 소리를 질러댔다.
- 드래곤 피어에 노출되었습니다. 스탯을 비롯한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시발. 이건 그냥 죽으라는 말 아냐?"
- 사망하였습니다. 부활할 수 없습니다.
네크로의 불사 패시브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기실에서 생방송 화면 돌려보기를 통해 사인을 알아냈다. 드래곤 피어에 이어 아쿠라온스텐즈가 냉기 브레스를 뿜었고, 아무 대응도 못 하고 일행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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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인과율의 반동이 있을 겁니다. 인간들은 눈앞의 이익에 집착해 먼 미래를 미리 소모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문 팀장, 이젠 문 이사로 더 많이 불리는 문철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옆머리를 긁었다. 위에서 시켜서 AI에게 부탁했고, 예상외로 AI가 쉽게 들어줬다.
"이유가 안 궁금해?"
"에픽 퀘스트 마지막 단계입니다. 만약 네크로 유저가 먼저 퀘스트를 완성하면 왕의 혈통을 역천 유저보다 먼저 얻을 것입니다. 아마 수뇌부는 역천 유저가 왕이 되는 게 회사의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여기는 걸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왜 내 부탁을 들어줬어?"
"인간은 멍청합니다."
AI는 반론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단정적인 말투로 판결을 내렸다.
"인간은 늘 자기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관찰한 네크로 유저라면, 왕의 혈통을 얻어도 적당한 가격에 판매하여 이득을 취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역천 유저가 더 빨리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결정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아마 역천 유저가 마법사 에픽 퀘스트를 먼저 완성할 겁니다. 그렇게 왕의 혈통을 얻어 왕이 되겠죠. 다음으로 왕의 혈통을 얻은 네크로 유저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 남은 여섯 에픽 퀘스트는 일본 하나에 중국 두 개, 북미 하나에 유럽 하나 그리고 기타 국가 유저들이 시작하는 중앙섬에 하나 배분되었습니다."
"왜 판매할 수 없지? 귀한 물건이니까 오히려 더 잘 팔리는 거 아냐?"
"왕의 혈통은 다른 서버 출신에게 판매할 수 없으니깐요. 공짜로 주는 것도 안 됩니다. 네크로 유저는 한국 유저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 유저 중 왕의 혈통을 구매할 유저는 현재 없습니다. 이미 한국 유저 중 20만이 직간접적으로 역천 유저의 영향을 받습니다. 통제를 엄청난 수준으로 하고 있기에 당분간 새로운 세력이 부상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럼 네크로 유저가 어쩔 수 없이 왕의 혈통을 직접 사용해야 한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게임 성향을 분석해보면, 네크로 유저는 굳이 왕이 되어 얽매이는 걸 싫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수뇌부의 오판으로 네크로 유저가 왕이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자리가 사람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문철수는 네크로 유저가 왕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과로로 심장이 마구 날뛰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이건 인과율의 작용은 아니고, 인과율로는 어떤 문제점이 일어날 것 같아?"
"드래곤의 활동이 더 활발해질 겁니다. 드래곤이 드래곤 산맥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드래곤이 더 높은 빈도로 활동하면 우르크 제국의 붕괴가 가속할 겁니다. 내부는 이미 썩어서 문드러질 지경이거든요."
"우리 잘난 사회학 심리학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흐르지 않을 거란 말이지?"
"제가 보기엔 그저 아집으로 뭉친 완고한 노친네들입니다. 상황을 판단할 때 시각이 무척 좁은데, 그 좁은 시각을 세상 전부라고 여기더군요."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게 지구야. 레전드는 좀 다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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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서 애타게 10분을 보낸 후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여긴 신전이잖아."
구룩 마을이 아닌 희망의 등대 신전에서 접속했다.
"제이크는 내일 이맘때쯤 부활한다."
"그웩도 마찬가지야."
"게륵도."
철벽이 가장 마지막에 접속했다. 신의 불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버텼고 그래서 부활도 늦었다.
"시발. 이거 유니콘에 항의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린 괜찮은데, 형은 언데드 다 잃었잖아."
"소환수 카운트."
혹시나 해서 네크로가 소환수 카운트를 외쳤지만, '0'이라는 숫자가 덩그러니 네크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리는 게륵에게 맡기면 되니까 일단 잡템 처리하고 음식 같은 거 넉넉하게 준비하자. 남은 퀘스트 완성해야지."
"이미 끝낸 부분을 보고하자. 혹시 단서 줄지도 모르잖아."
잠시 더 기다리니 기도를 마친 대주교가 나타났다.
"오오. 그대들의 노고에 십분 감사하네. 신령한 불과 순수한 어둠이 신의 곁으로 돌아왔다네."
"남은 흔적에 관한 단서를 주십시오."
"그대들 덕분에 생각났다네. 신령한 불과 순수한 어둠 외에 남은 세 흔적은."
대주교는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
"셋 중에 하나만 알려줄 수 있다네. 하나는 가장 높은 곳에 있고 하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며 하나는 강한 자가 지키고 있다네."
"높은 곳은 드래곤 로드 레어가 분명해. 근데 가장 낮은 곳이 어딘지 모르잖아. 우린 파열의 협곡 지하 동굴이 가장 낮은 곳인 줄 알았는데."
"강한 자가 지키는 곳은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어. 가장 낮은 곳을 물어보자. 그 과정에 전력 추스르고, 상황 봐가면서 해결하자."
"가장 낮은 곳이 어딘지 알려주십시오."
"드워프 중의 드워프로 불리는 용암 드워프. 그들이 가장 낮은 곳을 알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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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비서. 투라칸이 죽고 심장 모양의 전설 목걸이를 드랍했다고?"
"맞습니다. 유니콘의 정보원에게 확인했는데 어떤 아이템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얼어붙은 심장이 아닐까?"
"상무님, 너무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일본이 포탈 퀘스트를 거의 끝내고 있어. 그 전에 왕국 건설해서 희망의 등대를 장악해야 해. 그래야 더 많은 지원을 끌어낼 수 있어."
"회장님이 상무님 행보를 조금 언짢아하십니다."
반형운은 따뜻한 녹차로 목을 데웠다.
"최 비서. 왕국과 지배 길드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잘 모릅니다."
"지배 길드는 세금 일부만 건드릴 수 있어. 세금을 어디에 쓸지 대부분은 NPC가 정해. 그리고 극히 일부만 지배 길드가 투자처를 정할 수 있지. 그러나 왕국은 국왕이 세금의 용도를 직접 지정할 수 있어. 개인 소유로 돌리는 건 0.3%지만, 모든 세금을 왕 의지대로 지배할 수 있다고."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금은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부분에 쓰여. 그러나 내가 국왕이 된다면 모든 세금을 경제에 쏟아부을 거야. 어차피 당분간은 NPC보단 유저에게 의지해야 하니까 문화 따위는 필요 없어. 군사 역시, 드래곤 산맥으로 우르크와 격리되었잖아. 왜 바다로 공격하지 않는진 이해되지 않지만, 바다로 공격이 와도 우리에겐 최신식 전함과 꽤 많은 배가 있어. 예전에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NPC들이 막아냈어. 레전드 게임은 정교해. 단순히 설정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로 희망의 등대가 그만큼 수비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생각해야 해."
"그 말씀은, 왕국을 세우면 적자 상황을 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야. 그래도 적자는 면하지 못해. 하지만 가미카제 길드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지. 일본 애들이 하는 사업을 세금으로 지원하면서."
최 비서는 손으로 자기 다리를 찰싹 후려쳤다.
"비록 왕국 세금은 0.3%만 가져갈 수 있지만, 세금으로 사업 지원한다고 각 길드에서 돈을 받아내면 훨씬 많은 세금을 우리 몫으로 가져올 수 있군요."
"맞아. 물론 더 큰 그림을 위해선 그 돈을 다시 투자해야겠지. 그러나 회장님과 여러 임원에겐 이걸로 돈 벌 수 있다고 어필해야지. 대가리에 돈만 찬 늙은이들을 구슬리려면 이 정도 사탕은 필요하지 않겠어?"
"상무님. 듣는 귀가 없다고 해도 말씀 조심하셔야 합니다."
반형운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비단보에 싼 개똥이라는 말 들어봤지? 내가 회의실에 갈 때마다 그걸 느껴. 비단으로 꽁꽁 감쌌는데도 개똥 냄새를 가릴 수 없어. 허 상무 알지? 손자가 대학생이잖아. 그 늙은이가 밖에서 스무 살짜리 첩을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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