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제베트2
에르제베트 곁에 있을 땐 그저 덩치 좀 크구나 싶었는데, 도발에 걸려 가까이 온 드레이크는 그저 크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했다. 더구나 몸통과 비교해도 작다는 말이 안 나오는 커다란 대가리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꼬리, 왼쪽."
네크로와 동해 그리고 진돗개는 황급히 철벽 왼쪽으로 움직였다. 몸을 비튼 철벽이 방패로 바닥을 쓸어 오는 드레이크 꼬리를 막았다. 유니크 방패의 옵션 덕분에 밀리지 않고 드레이크 꼬리를 막아냈다.
그러나 공격을 막아낸 일행은 오히려 더 긴장했다.
"앗싸, 브레스다."
불의 용과 달리, 드레이크는 브레스를 쏘고도 작아지지 않았다. 어두운 녹색의 브레스를 철벽이 정면으로 맞섰다. 신발의 독 면역 옵션 덕분에 데미지를 별로 안 입었지만, 신발 내구도 하락으로 수리비는 최소 수백 골드 깨질 예정이었다.
"좀비의 고환 팔지 말걸."
철벽이 정면에서 독 브레스를 막았지만, 그 여파만으로도 동해는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독 면역 옵션이 있는 진돗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고, 유독 저항이 어마어마한 네크로만 괜찮았다. 독 저항에 가장 관련이 큰 체력이 10이고 생명력 회복도 남달리 빨라서 물약을 들이켤 정도는 아니었다.
독 브레스를 다 뿜은 드레이크가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남은 브레스를 삼켜 수습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실제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참수."
진돗개의 스킬은 그저 피통 살짝 움직이게 한 것 외에 다른 효과를 얻지 못했다. 동해의 투심권도 내부 타격에 실패해 스킬 데미지만 입혔다.
둘이 스킬로 공격할 때 네크로는 묵묵히 드레이크 뒷다리를 팼다. 방어력 하락 옵션이 최대한 많이 터지기를 바라며 드레이크가 몸을 돌리며 꼬리로 공격할 때까지 공격에만 전념했다.
"오빠도 방패 드는 거 어때?"
"양손 무기 한 손으로 들면 공격력 떨어져. 그걸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방패가 없어."
드레이크 꼬리에 맞아 튕긴 네크로는 빠르게 복귀했다. 50% 데미지를 남은 넷이 나눠 받기에 누구도 쉽게 죽지 않았다. 더구나 순수 방어력 제외하면 철벽보다 모든 방면에서 나은 수비 데이터를 보여주는 네크로가 죽을 일은 없었다.
"꼬리, 오른쪽."
이번엔 셋이 철벽 오른쪽으로 숨었다. 철벽이 가냘픈 손목으로 방패를 움직여 드레이크의 꼬리 공격을 막았다.
"젠장, 이번엔 폭격이다."
꼬리 공격이 막히면 이어지는 몇 개 패턴 중, 일행이 반기는 건 브레스였다. 브레스가 끝나면 공격 기회가 반드시 생겼다. 그러나 남은 패턴은 공격 기회가 아예 없거나 시간이 너무 짧았다.
박쥐 것과 닮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활짝 펴고 드레이크가 날아올랐다. 얇은 날개로 저 육중한 몸을 어떻게 지탱하나 의구심이 생기는 장면이었다. 드레이크는 높이 날다가 갑자기 날개를 거뒀다. 육중한 몸이 일행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졌다.
철벽이 무기를 바닥에 던지고 두 손으로 방패를 꽉 잡았다. 방패의 옵션은 그저 밀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안 밀린다고 데미지가 안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방패 각도가 정확하지 않으면 데미지가 훨씬 많이 들어온다. 너무 정면도 안되고 너무 기울여도 안 되고, 충돌할 때 방패가 흔들려도 안 된다.
"씨, 나 오른팔 골절."
원래는 철벽이 수비하고 나서 기회가 있으면 공격하고 없으면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네크로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풀스윙으로 드레이크를 때렸다.
"오빠, 괜찮아?"
"빨리 패. 카운터 판정이야."
철벽의 방패 각도가 미흡하다고 느낀 네크로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나섰다. 절묘한 타이밍 덕분에 드레이크가 카운터 판정을 받으며 피해를 보았고 상태이상으로 반항 능력도 잃었다. 그러나 카운터에 성공한 네크로도 오른팔 골절 페널티를 받았다.
"야, 살이 물렁물렁해졌어."
참수 스킬로 목에 꽤 큰 상처를 낸 진돗개가 기쁘게 외쳤다. 스킬 쿨타임이 조금 긴 편이어서 진돗개는 스킬 말고 기술로 참수를 펼쳤다. 다른 스킬은 동작을 똑같이 흉내 내도 효과가 없지만, 기술에서 스킬로 진화한 참수는 요령대로 타격하면 꽤 괜찮은 데미지를 생산했다.
"심정지, 내출혈."
냉기 덕분에 심정지 확률이 올라갔지만, 내출혈은 드물었다. 그런데 덩치만큼 심장도 큰지, 얼어서 심장이 멈춘 상황에 내출혈까지 터졌다.
"형, 나 죽을 거 같아."
갑자기 현피가 파티 채널로 불길한 말을 했다.
"왜?"
"나 마법 거울로 쟤 스킬 2번이나 반사했어. 이거 성공률 20%짜리 스킬이거든. 아마 이번엔 막지 못할 거야."
아이템 스킬인 마법 거울은 쿨타임이 20분이나 되었지만, 에르제베트도 심장이 다쳐서 스킬을 자주 사용하지 못했다. 이미 에르제베트가 사용한 큰 스킬 2개를 현피가 마법 거울로 반사했다.
"피의 저주."
"마법 거울. 제발."
나쁜 예감이 더 잘 맞는다는 건 과학이었다. 현피는 피의 저주를 막아내지 못하고 즉사했다. 현피를 가볍게 제거한 피의 저주가 뭉쳐있는 일행을 덮쳤다.
"으아, 이게 뭐야."
면역 혹은 저항 상승 옵션이 붙은 아이템. 아이템을 착용하면 해당 속성에 강세를 보이지만, 면역 아이템 하나로 무적은 아니었다. 면역에 성공하는 대신 아이템 내구도가 다른 공격 받을 때보다 더 빨리 떨어졌다.
"강철 보루가 내구도 0 됐어."
철벽은 황급히 레전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고 레어 갑옷을 착용했다.
"시발, 나 왼팔 멀쩡했지."
오른팔 회복에 주력하던 네크로가 갑자기 욕지거리를 뱉었다. 신력 덕분에 한 손으로도 둔기 사용할 수 있었는데, 오른팔에서 몰려오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아 깜빡했다.
"형, 안전하게 대가리 때려."
왼손으로 무기를 든 네크로가 드레이크 머리를 때렸다. 방어력 하락 옵션이 자주 터졌는지 드레이크 살이 훨씬 물렁해졌다.
"형, 나 소금성에서 부활했어."
어느새 10분이 지났는지 길드 채널로 현피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대기해. 상황 좀 지켜봐야 할 거 같아."
"난 그럼 피목 공략이나 마저 쓸게."
피 끓는 목마름 던전은 어제부터 유저에게 개방했다. 그간 몇 번 공략해서 해골용이 드래곤 심장 가루를 안 준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공개를 결심했다.
7층은 다미안 대신 그랜드 마스터 등급의 네크로맨서가 등장했는데, 아이템으로 저주술사 스킬도 쓰는 꽤 까다로운 소환 네크였다.
드레이크가 호흡을 멈추자 일행은 물약을 마셔 생명력을 빠르게 채웠다. 제이크가 칼을 들고 드레이크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지만, 현피가 없어서 누구도 호들갑 떨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고작 그 실력에 내가 이토록 궁지에 몰리다니. 어쩔 수 없이 내 재주를 모두 펼쳐야겠구나."
말을 마친 에르제베트가 푸른 장미를 소매로부터 꺼내 자기 심장에 꽂았다.
"앗, 저건 푸른 언덕에만 나는 푸른 장미. 저걸 꽂으면 일정 기간 심장이 멀쩡해요."
그간 존재감이 잊힌 얀이 갑자기 나타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잠깐이지만, 심장이 힘차게 맥동하는 느낌은 정말 좋군."
"우리 뭐 없지?"
죽음의 군단이나 불의 용 스킬 다 써버렸다. 제이크에게 얼음 폭탄과 같은 마법 혹은 주술 물품들이 있긴 하지만, 그걸로 뱀파이어 퀸에게 데미지를 입힌다는 발상을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다.
"죽음밖에 없는 거 같아."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몰라."
"제이크, 약점."
"못 찾겠다."
"얀,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심장에 푸른 장미를 꽂은 에르제베트의 모습이 조금씩 변했다. 사람 크기였던 덩치가 점점 커졌다.
"저 장미를 뽑으면 되는데, 그러려면 심장에 큰 타격을 줘서 못 움직이게 해야 해요."
"뽑는 건 동해, 근데 심장 멈추는 것도 동해가 해야 하는데."
"혼자 다 하면 안 될까?"
"철벽, 도발 쓰지 마. 먹힐 것 같지 않아."
괜히 저항 당해서 상태이상 걸리면 낭패다.
"철벽 정면, 난 왼쪽 다리, 돗개는 오른쪽 다리. 왼쪽 오른쪽은 뱀파이어 기준이야. 동해는 궁극기 쓰고 장미 뽑으면 돼."
"셋, 둘, 하나."
네크로의 구호에 맞춰 셋이 에르제베트를 향해 뛰쳐 갔다. 동해는 느린 걸음으로 걸으면서 공명일섬을 사용할 기회만 노렸다. 100% 적중하는 필살기지만, 상대의 방어 태세에 따라 데미지가 변했다. 최대한 수비가 어려운 상황에서 스킬을 펼쳐야 했다.
셋이 접근하자 에르제베트의 손가락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왔다. 야생 맹수의 발톱처럼 무서운 느낌이 아니라 잘 다듬어져 예술품 같은 정갈한 손톱이었다. 하나는 진돗개를 공격하고 하나는 네크로를 공격했다.
"피하자."
둘이 공격받는 사이 철벽이 접근했다. 유니크 무기 분노의 철퇴로 에르제베트의 다리를 때렸다.
"스턴!"
"공명일섬."
철벽의 고막을 찢는 외침에 동해가 바로 반응했다. 공간을 넘어 에레제베트의 심장 부위를 타격했다. 스킬이 끝나자 꼭 쥐었던 주먹을 폈다. 푸른 장미에 가시가 있었지만, 동해는 개의치 않고 움켜쥐었다. 장미를 뽑으려는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해야."
"인간은 멍청해서 속이는 재미가 있군."
"시발, 몹이 스턴 걸린 척 속였다고?"
"나 분명히 시스템 메시지 들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누구도 에레제베트를 공격해서 동해를 구할 생각을 못 했다.
"다리만 스턴 걸렸다."
제이크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시발, 이거 게임 맞아? 몹이 일부러 다리만 스턴 걸려서 유저 속인다고?"
동해 몸이 박살 났다. 핏물과 살점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잔인한 장면은 누구에게도 충격을 주지 못했다. 몹에게 속았다는 충격이 너무 커서 약한 감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광전사."
진돗개가 광전사를 펼치고 에르제베트에게 달려들었다.
"형, 철벽이랑 도망쳐. 내가 최대한 잡고 있을게."
그러나 진돗개는 10초도 못 버티고 대기실 꾸미러 떠났다.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놈들이군. 너희 둘은 내가 특별히 곁에 두고 부려먹으마."
래퍼라도 되는 듯, 에르제베트의 입에서 스킬명 십수 개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네크로와 철벽은 뭐가 뭔지 구분할 겨를도 없이 생포되었다.
"붉은 장미는? 고분고분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없다."
네크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진실이군. 얀은 심장이 수십 년 더 몸에 머무를 수 있어 기쁘겠구나."
에르제베트가 갑자기 돌아서며 제이크를 잡았다.
"쥐새끼 같은 놈."
에르제베트 뒤로 접근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조용히 숨었으면 들키지 않았을 텐데, 네크로를 구하려고 시도하다가 잡혔다.
"신이시여, 기적을 내려주십시오."
얀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황무지처럼 메마른 마음에 다미안과 탈출이라는 희망이 씨앗이 심어졌다. 그런데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무참히 짓밟혔다.
"신은 이름을 빼앗기고 죽어가고 있어.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여기 처박혀 사느라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 못 들었구나. 신은 이름을 찾았다."
"또 가짜 이름으로 신도들이나 홀리고 다니는 거겠지."
"신의 이름은 바알드로다."
"앗."
에르제베트가 벌에 쏘인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안돼. 내 심장을 빨리 되찾아야 해."
- 신이 기적을 내렸습니다.
네크로의 3에 불과했던 신앙 스탯이 소모됐다. 네크로와 철벽을 구속했던 스킬들이 물에 닿은 눈처럼 사라졌다.
얀의 머리에 월계관이 씌워졌다. 원래 입었던 주름이 많은 치마와 레이스가 풍성한 상의가 굵은 실로 짠 옷으로 바뀌었다. 왼손에 하얀 활대와 푸른 활줄이 인상적인 활이 들렸다. 활대에 페가수스를 비롯한 몇 가지 동물 문양이 새겨있었다.
"말도 안 돼. 신이 빼앗긴 이름을 되찾다니."
"유니콘의 뿔."
얀이 나지막이 스킬을 사용하자, 오른손에 화살 한 대가 생겨났다. 화살촉이 곧은 뿔 모양이었다.
"저격 화살."
사냥꾼 스킬 저격 화살은 원래 10초의 준비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얀은 스킬명을 외치자마자 바로 화살을 쏘아냈다.
화살은 무척 빠르지만, 궤적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화살이 적중하자 네크로는 무기로 에르제베트의 오금을 후려쳤다. 키가 5미터나 되어 심장에 꽂힌 장미가 손에 닿지 않았다.
"뽑아."
철벽이 유니콘의 뿔 곁에 꽂힌 푸른 장미를 뽑았다.
"공격해요. 약해진 거지 죽은 건 아니에요."
고작 스킬 두 개에 지쳤는지, 얀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의 불, 신의 분노, 천벌, 이교도 심판, 도발. 오빠, 스킬 하나도 저항 못 했어."
네크로는 두 손으로 거대한 전투 망치를 들고 뱀파이어 퀸의 머리와 심장 부위를 골고루 두드렸다. 공격력이 네크로보다 떨어지는 철벽은 배나 팔다리 위주로 공격했다.
"골락의 송곳니."
마나가 돌아왔는지 얀이 새로운 화살을 소환했다. 아까 유니콘의 뿔은 곧아서 그럴듯했는데, 골락의 송곳니는 맹수 발톱처럼 끝이 살짝 휘어 화살 느낌이 덜했다.
"저격 화살."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10초 정도 기다렸다가 화살을 쏘았다. 가까이에서 쏜 것도 있지만, 숲의 여왕 혈통을 1/2이나 보유한 얀은 정확히 유니콘의 뿔 곁에 골락의 송곳니를 꽂았다.
"철벽, 나 머리 때릴 테니 넌 심장 때려."
"왜요?"
"심장에 스턴 주라고. 전체 스턴은 어려워도 부분 스턴은 아까도 먹혔잖아."
다리만 스턴 걸린 게 아니라 다리라도 스턴 걸렸다는 역발상. 희망이 보이자 네크로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흰 수리의 부리."
뾰족한 부리가 화살촉 2개로 보였다.
"저격 화살."
이번에도 10초 정도 기다렸다가 화살을 쏘아냈다. 세 번째 화살까지 심장에 박히자 에르제베트의 피통이 팍 깎였다.
"이젠 그만 죽으라고."
힘껏 내려친 네크로의 전투 망치에 에르제베트의 머리가 박살 났다.
"오빠, 그만 때려. 제이크 칼 뽑았어."
"안타깝지만, 에르제베트에게 영원한 죽음을 내리지 못했어요. 언젠가 부활해서 우리에게 복수하려 할 거예요. 집착이 심한 성격이거든요."
"에픽 아이템은 어림도 없단 얘기로 들리는데."
"드레스 이쁘던데, 그거라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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