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1
"시발, 안 죽었어."
여자다. 물론, 여자라고 방심하지 않고 여자라서 봐주지 않는다.
현실에서나 여자 남자 피지컬 차이가 있지, 게임에선 스탯과 장비 그리고 컨트롤이 전부다.
힘 7
민첩 5
체력 8
친화력 5
체력 8에 마스터 랭크에 만렙인 성기사가 피통이 절반이나 까였다. 웬만한 캐릭은 한 방에 보낼 정도 위력이다.
얇은 가죽 갑옷과 칼날이 푸른 비수. 직업은 도둑이다. 빠른 스캔으로 확인한 장비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레전드 평균 수준을 조금 웃도는 세팅.
이제 남은 건 컨트롤이다. 스탯은 게임을 오래 한 성기사보다 나을 수 없고, 아이템도 무기 제외 매직 템으로 맞춘 성기사보다 월등하진 않았다.
망치를 휘둘렀다. 액티브 중에 직접 발동해야 하는 스킬이 '강타' 하나 뿐이기에 게임 시스템이 헷갈릴 일도 없었다. 모션만으로 강타 스킬이 펼쳐졌고, 유니크 해머가 기습한 여성 유저 머리를 때렸다.
회피에 장점을 갖춘 도둑이지만, 기습에 실패한 후 유저 본인이 당황한 바람에 피하지도 못하고 즉사했다. 컨트롤은 빵점.
굳이 도둑 유저를 위해 핑계를 마련하자면, 성기사가 몸 돌리는 게 너무 빨랐다. 광해가 바닥을 발로 차면서 회전의자를 돌렸고, 센서가 그걸 감응해서 게임에 적용했다. 속도와 정확도가 '뒤로 180도 돌기' 이펙트를 클릭한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했다.
"쓰레기는 죽어."
마찬가지로 당황한 두 유저도 뚝배기를 깨버렸다. 잔혹 옵션을 최대로 한 덕분에 셋 다 머리에서 피와 뇌수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세 유저의 시체를 한데 모은 후, 성기사는 이팩트 아이콘을 불러 '오줌싸개'를 클릭했다. 아랫배를 쑥 내민 성기사는 유저들 몸에 굵은 오줌을 쌌다.
"성기사 랭킹 3위를 PK 하려 하다니. 병신들."
쾌감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현실에서 분출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배출됐다. 게다가 광해 말은 상대에게 들리지 않는다. 욕했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시체가 사라지며 5골드에 레어 비수와 매직 투구를 떨어뜨렸다.
PK를 당한 시점에서 사냥을 계속하기 힘들다. 성기사는 장착한 아이템을 전부 예비 아이템으로 갈고 무기도 매직으로 들었다. 검은 갑옷과 투구는 어느새 은백색으로 바뀌었고 음침해 보이던 성기사가 밝은 모습으로 변했다.
'템 전부 새로 바꿨으니 당사자들 앞에서 알짱거려도 절대 못 알아보겠지.'
이런 안이한 생각을 비웃듯, 얼마 안 가서 포위당했다.
펄럭이는 푸른 로브. 머리에 꽂은 깃털. 쌍수 무기. 장갑 위에 권갑. 얇은 가죽 갑옷에 날이 푸른 비수.
'마법사, 사냥꾼, 전사, 무인, 도둑.'
복장과 무기로 빠르게 상대 구성을 판단했다.
"감히 우리 검은 백합 길드원을 죽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마법사가 리더.'
"언니, 잡아서 길드로 끌고 가요."
'내가 아이템 갈아입는 걸 누가 봤다.'
도둑이 은신하고 있었거나, 성기사 시야 밖에 사냥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매직 무기를 휘둘러 공간을 확보한 후 빠르게 유니크로 교체했다. 남은 아이템이야 거기서 거기니 괜찮지만, 매직과 유니크 무기의 성능 차이는 리어카와 스포츠카 정도 된다.
화살촉 모양 아이콘이 시야에 떴다. 사냥꾼의 표적 스킬 '오늘은 너다'. 스킬 부가효과인 디버프로 이동 속도가 느려졌다.
다리에 밧줄이 감겼다. 도둑 스킬 '옭아매기'. 두 다리를 묶을 수도 있고 팔 하나 묶을 수도 있다. 마법사가 주문 외우며 시선을 끄는 사이, 도둑이 은신으로 접근해 다리를 묶어버렸다.
전사 스킬 '묶어두기'도 들어왔다. 하지만 성기사의 높은 저항이 스턴에 반항했다. 스킬에 실패한 전사 몸이 살짝 경직한 틈을 타서 유니크 망치가 움직였다. 공격과 방어 모두 괜찮은 직업이 전사라지만, 유니크 아이템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죽이지는 못해도 한 방에 피통이 10% 이하로 줄면서 상태이상 '어지러움'을 유발했다.
"마법의 세계."
마법사의 궁극기. 시꺼먼 구 하나 생겨났다. 축구공 크기의 구 안에서 온갖 마법이 튀어나와 성기사를 공격했다. 물약을 급히 들이켠 성기사는 마법에 깨진 카이트 실드 대신 작은 암실드를 꺼냈다. 마법 저항에 블록 보정이 붙은 매직 방패로, 원거리 공격수들을 상대하는 데 제격이었다.
"언니. 벌써 마법 쓰면 어떡해요. 우리 근접해서 피 좀 빼야 되는데."
같은 파티라고 해도 스킬 피해를 전혀 안 받는 건 아니다. 직접 공격은 안 당하지만, 폭발과 속성 데미지를 비롯한 부가 효과는 받는다.
무인의 '혈도 터뜨리기'나 도둑의 '동맥 베기'는 출혈 효과로 지속적인 데미지를 줄 뿐만 아니라 저항을 낮추는 부가효과를 동반한다.
"괜찮아. 다섯이서 성기사 하나 못 해치울까."
현실이라면 매우 긴박한 상황이겠지만, 이건 그냥 게임일 뿐. 광해는 게임과 현실을 엄격히 구분했다. 게임을 현실과 혼동하고 몰입하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게다가 PK 경험도 풍부하여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피통을 확인하며 마법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함께 덤벼. 피 얼마 안 남았을 거야."
움직임과 낯빛으로 피통 가늠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 정도 베테랑은 아닌 것 같았다.
물약을 통해 피통 40%까지 회복한 전사가 무인과 함께 접근했다. 도둑은 은신하고 기회를 기다리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격 스킬인가?'
정확한 명칭은 '저격 화살'. 준비 시간 10초인 고급 스킬이다. 일격필살 확률이 있는 스킬 중 하나로, 사냥꾼의 PK 필수 스킬.
'셋, 둘, 하나.'
피해를 감수하고 앞구르기 했다. 의자에 앉은 몸을 직접 움직이진 못하고 이펙트 아이콘을 클릭했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고글로부터 앞구르기 하면서 보이는 시각 정보가 전해졌다. 그러나 광해는 거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뇌가 명확히 어느 정보가 진짜고 어느 정보가 가짠지 구분했다.
성기사가 피하는 바람에 저격 화살을 맞은 도둑이 즉사했다. 화살 데미지에 죽은 게 아니라, 재수 없게 발동한 일격필살 효과 탓이었다. 대신 성기사는 무인의 혈도 터뜨리기 때문에 출혈 피해를 보았다.
"예란아."
당황한 사냥꾼이 도둑 이름을 외쳤다.
"얼음 가루."
마법사의 범위 스킬. 얼음 마법에 속하는 '얼음 가루'는 살상력이 거의 없지만, 동결 능력이 뛰어나다.
"언니!"
그러나 성기사가 무인이랑 전사와 엉겨있는 상황에서 저 마법을 쓴 건 모자란 판단이었다. 저항이 강한 성기사 중에서도 저항에 신경 쓴 '성기삽니다'는 동결 피해를 덜 입었다. 적이라곤 성기사 하나뿐이어서 마음 놓고 싸웠던 전사와 무인은 머리에 망치 하나씩 맞고 얼어붙은 시체로 변했다.
"두고 보자."
그냥 유저가 두고 보자 했으면 콧방귀나 뀌겠지만, 상대는 길드다. 그것도 삼대 길드 중 하나인 WM의 하부 길드. 자칫 WM까지 나서면 성기사는 게임 접어야 한다.
유니크 해머를 사냥꾼에게 휙 던진 성기사는 마법사를 향해 달려갔다. 사냥꾼은 마법사를 기다렸는지 미처 멀리 가지 못했다. 유니크 해머에 머리를 얻어맞은 사냥꾼은 바닥에 누워 해롱거렸다. 스킬이 아닌 평타라서 피통이 작은 사냥꾼도 목숨은 부지했다.
"때리지 마. 나쁜 새끼. 여자 때리는 거 아냐."
"어따 반말이야."
음성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았기에 게임 속 성기사는 과묵하게 마법사 얼굴을 때리기만 했다. 얼굴에 딱히 약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유저는 얼굴에 공격 들어오면 멈칫한다.
살이 터지고 피가 튀기고 이빨이 부러졌다. 마법사는 반항도 못 하고 맞기만 했다.
마법사가 시체로 변한 후 해머를 주워들어 사냥꾼 머리를 힘껏 때렸다. 이들이 드랍한 아이템을 전부 챙긴 후, 이동 포인트에서 포탈 타고 도시로 갔다. 도시 안에선 PK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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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고글을 벗고 컴퓨터를 끈 광해는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WM은 OB와 PM과 함께 레전드 삼대 길드로 불린다. 길드 인원이 200명으로 제한된 덕분에 정예만 추린 길드. 거기에 하부 길드 수십 개 거느린 어마어마한 세력이었다.
WM은 여성 유저만, OB는 남성 유저만 받는다. 둘이 맨날 죽자고 싸우니 WM을 피하려면 OB 세력 범위로 가는 게 맞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문제는 OB도 WM 못지않은 병신들이라는 거지.'
성기사 랭킹 1위였다가 지금은 3위가 된 광해에게도 영입 제안이 들어왔었다. 그러나 OB는 매일 여성 유저 3명씩 PK로 죽여야 한다는 병신 규정이 있다.
'WM도 마찬가지지만.'
WM 및 그 하부 길드들은 충성도 테스트가 있다. '1일1살남'이라고, 매일 남성 유저 한 명씩 PK 해야 한다. 순순히 PK 당하면 지속해서 괴롭히지 않았다. 혹시 반항하면 반항을 멈출 때까지 PK 했다.
광해는 방금 반항을 넘어서 반격을 했다. 아무래도 게임 접을 때까지 쫓아다니지 않을까 짐작된다.
몇 달 전 큰마음 먹고 바꾼 최신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WM과 PK 그리고 레전드를 조합해서 검색하니 게시판에 글이 수두룩하게 떴다. 조회수가 가장 많은 게시글 몇 개 클릭한 광해는 단어와 문장에서 전해오는 암울함에 절망했다.
도시 안에선 PK가 안 된다. 타겟팅 자체가 안 되고, 유저든 NPC든 스킬 피해를 보지 않는다. 문제는, WM 하부 길드 중 하나인 '진드기'가 24시간 길드원을 파견해 목표 유저를 교대로 따라다녔다. '순간 이동'이 가능한 마법사 제외하면 누구도 이들 감시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도시만 벗어나면 척살조가 따라붙는다.'
WM의 사대천왕으로 불리는 척살조 조장들. 전부 마스터에 현질러다. 고글마저 중고로 산 광해와 달리 매일 습관적으로 결제하는 유저들이다.
폰뱅킹으로 계좌 잔금을 확인했다. 게임 출시 1년 반. 3개월 이후부터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고작 15개월에 1억 5천 모았다. 매달 부모님께 2백씩 보내드렸으니, 그것까지 합치면 1억 8천.
'지금까진 안 들켰다. 근데 왜 불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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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 반 알을 먹고 푹 잤다. 오전에 자고 오후부터 새벽까지 게임을 하는 광해는, 가끔 잠이 안 오면 수면제 도움을 받았다.
일어나 찬물로 속을 달랜 후,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걸으면서 복잡한 머리를 풀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밖에서 눈에 띄는 낯선 행인들이 죄다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 딱딱한 표정으로 걷는 사람조차 속으로부터 치미는 기쁨을 참으려고 억지로 얼굴을 굳힌 것으로 여겨졌다.
'그냥 게임이면 접고 마는데. 이건 내 직장이야.'
설익힌 라면을 김치에 곁들여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집을 청소했다. 집 안은 깨끗이 정리되었지만, 머리는 계속 복잡했고 마음도 여전히 뒤숭숭했다.
'회사에서 못 버티고 도망친 게 마지막이다. 이젠 나약하게 살지 않는다.'
괜찮은 회사를 스트레스 때문에 퇴사했다. 가장 괴로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히려 위로받았다. 회사 그만두고 게임에 올인한 후, 종일 레어 아이템 하나도 드랍하지 않을 때면 고글을 쓴 채 울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회사 그만둔 걸 엄청나게 후회했다.
안정적으로 고수익 사냥터 몇 개 개척한 후에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사라지진 않았다. 게임에 확신이 있어서 그만둔 것보다, 회사 생활이 힘들어서 그만둔 거였으니까.
결과가 좋다고 과정까지 미화할 정도로 자기합리화가 심하진 않다.
'지금까지 들킨 적 없다. WM에서 나를 모르면 계속하고, WM이 괴롭히면 아이템 골드 모조리 정리한 후 캐릭을 삭제한다. 한 달 뒤면 새로 키울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광해는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실행한 후 장갑과 고글을 썼다.
로그인하고 몇 분 안 되어 WM 길드에서 찾아왔다. 결국, 정체가 탄로 났다.
"잘못을 인정하나요?"
유니크 아이템으로 온몸을 도배한 여성 유저.
음성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은 성기사는 키보드를 불러내 손으로 타자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타자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PK를 당한 상태에서 반격했습니다. 무슨 잘못 말씀이죠?]
"남성 유저가 PK 했어도 죽였을 건가요? 상대가 남성 유저였으면 만나 술 한잔하자 이러면서 친해졌겠죠?"
"뭐 이런 개시발 상년이 다 있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타자했다.
[지금까지 나를 PK하고 살아남은 유저 한 명만 데려오시면 인정하겠습니다. 나를 먼저 공격하고 살아남은 유저는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구분 없이 말이죠.]
WM 길드 척살조의 네 조장 중 하나인 '띵언갓언'은 광해의 말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정이 어찌 됐든, 검은 백합 길드원을 죽인 건 인정하시죠?"
[팩트만 말씀드릴게요. 저는 PK 당하자마자 바로 반격해서 죽였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지 못했고, 검은 백합 길드원이라는 건 당연히 몰랐죠.]
"남자가 돼가지고 구질구질 변명만 늘어놓네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게 왜 변명인지 모르겠군요. 저도 중심 도시에 세금 바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실한 세납자를 핍박하실 겁니까?]
도시의 세금 중 일부는 지배 길드인 WM이 가져간다.
"그럼 이렇게 하죠. 당신 손에 죽은 여덟 유저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세요. 그럼 WM 길드 이름을 걸고 새벽에 있었던 일을 다신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어느새 광장에는 구경꾼이 천 명 가까이 모였다. 성기사에게 죽은 여덟 유저가 다리를 쩍 벌리고 한 줄로 섰다. 맨 앞에 선 도둑 유저가 '도발' 이펙트를 클릭했는지, 과장되게 비틀린 얼굴로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광해를 조롱했다.
"시발, 접을까?"
왼손 엄지와 식지를 비비니 이펙트 아이콘이 주르륵 떴다. 자주 사용한 오줌싸개와 같은 이팩트들이 위에 있었다. 밑으로 쭉 내리니 '포복전진' 아이콘이 보였다.
'월 천만.'
광해는 눈을 질끈 감고 이펙트 아이콘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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