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시대
"우리 예상이 빗나갔다."
"정확히는 당신들 예상이지. 난 처음부터 배를 철혈팔기에 파는 걸 반대했다."
가미카제 길드 중진과 반형운이 영상 회의를 했다. 가미카제는 여럿이 나왔지만 역천 길드에선 반형운이 홀로 나왔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대책을 빨리 세워야 한다."
'이런 부분에선 한국 사람들이 배워야 해. 사과하는 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전혀 망설이지 않아.'
물론, 이득이 안 되거나 손해가 되는 일은 끝까지 우기는 습성도 있었다.
"우선 전략을 명확히 해라. 철혈팔기를 견제할 건지 서부의 야마토와 초인동맹을 견제할 건지."
초인동맹은 이미 왕의 혈통을 얻었지만, 건국하지 않았다. 자금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도시를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네크로도 탄광 못 얻었으면 나라를 유지하지 못했다.
왕의 혈통은 같은 서버 내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 이젠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서버의 5개 왕의 혈통은 전부 임자를 찾았다. 북부에서 아무 견제도 받지 않고 확장하는 철혈팔기도 고구려를 흉내 내 포탈 없는 도시 하나 점령하고 마을만 점령하며 건국을 미뤘다.
"둘 다 견제할 수는 없는 건가?"
"하나만 견제할 수 있다. 둘 다 견제하려다간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둘 다 견제할 수도 있다는 거군. 저놈은 괴물인가?'
"네 생각이 궁금하다."
"나라면 서부를 견제하겠다."
"설명 부탁한다."
"서부에는 야마토, 초인동맹, 네크로가 있고 만리장성과 손잡은 한국 세력도 있다. 한꺼번에 여럿을 견제할 수 있으니 좋은 거지."
"그러면 철혈팔기가 너무 득세하는 거 아닐까? 전투력은 철혈팔기가 가장 강하다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중국을 공격했을 때, 국민당 총수 장개석이 뭐라 했지?"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외적을 물리치려면 우선 내부가 안정되어야 한다면서, 일본과 싸우는 대신 모택동의 혁명군을 공격했다."
"일부러 철혈팔기가 강해지게 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만리장성과 초인동맹은 철혈팔기를 견제할 거야. 야마토랑 대한제국 길드만 신경 쓰면 되는데, 우린 마나포가 있어."
마나포는 성벽과 마찬가지 존재다. 전투 상황에서만 내구도를 깎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스킬을 펼쳐도 전혀 손상을 받지 않는다.
전투 상황을 만들려고 무작정 상대를 공격한 후 마나포를 파괴하는 것도 막혔다. 전투에 참여하는 유저는 반드시 도시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곳에서 게임 옵션을 통해 상대를 공격할 것을 밝혀야 한다.
공성 옵션을 통해 공격자가 되면 도시에 접근하기 무섭게 공격받는다. 게다가 마나포 내구도도 장난 아니어서 웬만한 유저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도시를 점령해도 되는 게 아닌가?"
반형운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인내력 경합이야. 우리가 먼저 포탈 뚫으면 야마토랑 만리장성은 반드시 이쪽으로 온다. 남은 길드들은 잘 모르겠고. 우리랑 싸우려면 근거지는 있어야겠으니 도시를 점령할 거야. 그때부터 그들은 이곳에 묶이고 만다. 철혈팔기가 도시들을 점령하고 포탈을 열어도 몸을 못 뺄 거야. 이미 점령한 도시에 투자한 금액이 생각나서 쉽게 발을 못 빼지. 게다가 북부는 추워서 활동하는 게 굉장히 귀찮아."
"철혈팔기가 포탈 열 때까지 도시 점령 안 하고 계속 참자고?"
"우리가 서부를 견제하면, 철혈팔기는 포탈을 열 가능성이 커."
"정보원이 있어? 왜 그렇게 확신하지?"
"말했잖아. 북부는 추워서 활동하기 굉장히 불편하다고. 이들은 지금 포탈 없이 탈것 혹은 뛰어다니는 거로 활동해. 북부의 매서운 추위에 장시간 노출되어 있다고. 만약 포탈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포탈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막 이동하면서 확장을 넓힐 수 있잖아."
"철혈팔기가 그렇게 확신할 정도로 서부를 견제할 수 있다고?"
"철혈팔기가 포탈 안 열면 우리도 참으면 되는 거지.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래. 일단 서부를 견제하도록 하자. 그 후 북부와 서부의 동향을 엄밀히 살피면서 다음 단계 계획을 짜자고."
회의를 끝낸 반형운은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가미카제 길드에 경고 삼아 내 실력을 과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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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말라비틀어진 심장
분류 : 특수
등급 : 유일
능력 : 피의 주술사로 전직
특별 : 그랜드 마스터 랭크부터 사용 가능
이것 외에 재료 아이템 불사의 결정 세 개를 얻었다. 혈마노처럼 붉은 보석은 아이템 업그레이드에 사용된다고 설명에 적혀있었다.
"우리 안 가도 돼?"
"응. 우리도 여기 한번 쭉 훑어보고 철수할 거야. 어차피 보스몹 리젠이 일 년 이상 걸려. 그 기간에는 몹도 없는 흉가야."
진돗개와 동해도 소금성에서 부활했다. 진돗개는 신이 기적을 내려 얀이 각성했고, 덕분에 퀸을 쉽게 쓰러뜨렸다는 말에 피눈물을 흘렸다.
"드레이크 알 몇 개 얻었는데, 혹시 탈것 바꿀 생각 있으면 정보 좀 알아봐. 드레이크 알은 어떻게 부화하는지 말이야."
"형님, 사랑합니다."
대화하느라 잠시 멈춘 사이에 제이크는 한참 앞서 나갔다. 네크로는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철벽이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제이크를 따라 휘적휘적 걸었다.
"야, 정신 좀 차려."
"오빠. 유니콘 알 제게 주는 거 맞죠?"
"응.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
"오빠, 고마워요."
제이크가 지하를 뒤지다가 유니콘 알 하나 발견했다. 에르제베트가 후라이나 해 먹으려고 구한 건 아니었는지, 얀은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했다.
"오빠. 유니콘 알 있잖아요."
"그만해. 유니콘 세 글자만 들으면 경기 일으키겠어."
"아니. 드래곤처럼 뭐 잔뜩 먹여야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알에서 태어나자마자 무거운 갑옷에 방패를 든 너를 태우고 다니는 것도 좀 비현실적이다."
"오빠, 같이 유니콘 키워주실 거죠?"
"응. 그러니까 유니콘 얘기 그만하자."
"지하에는 뭐 없다. 출구 찾겠다."
이미 지도제작이 끝났기에 위층으로 향하는 출구를 바로 찾았다. 출구로 올라가니 화려한 저택이 일행을 반겼다.
"와. 오빠, 저거 은촛대 아냐?"
"제이크, 비싼 물건 알려줘."
은촛대나 비싸 보이는 그림과 멋진 조각상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의자나 탁자도 비싸 보이면 인벤토리에 넣어 은행으로 전송했다. 제이크가 비싸다는 기준이 어느 정돈지 모르지만, 제이크가 비싸다고 평가한 물건은 모조리 쓸어 담았다.
"이 욕조, 너무 탐나는데."
물론, 인벤토리에 담기지 않는 물건도 있었다. 붉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욕조는 무게 제한이 걸려 인벤토리로 들어가지 않았다. 철벽이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오빠, 저 샹들리에도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밥상 위에 책상 놓고 그 위에 걸상 놓고 샹들리에를 뜯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힘 스탯 8이어서 간신히 샹들리에를 바닥에 떨구지 않았다.
"웃겨. 뱀파이어 퀸이 리젠된 다음에 집 꼴 보면 뭐라고 할까?"
"야, 저 커튼도 벗겨가자. 저 정도 크기의 천도 드물잖아."
특별한 아이템은 얻지 못했지만, 저택을 터는 과정은 즐거웠다. 인벤토리와 아공간을 꽉 채우려고 주방의 취사도구마저 모조리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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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은 페가수스의 입에 먹이를 넣어줬다. 다들 페가수스를 순수 탈것이라고 오해하는데, 역천이 얻은 페가수스는 잘린 메두사의 목에서 튀어나온 최초의 페가수스라는 설정이 있었다. 그래서 석화 저주를 내리는 재주를 품고 있는데, 역천의 최측근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자, 배불렀으면 다시 출발하자."
역천을 태운 페가수스가 힘찬 날갯짓으로 몸을 하늘에 띄웠다. 중간에 음식을 몇 번이나 보충해주고 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속도가 빠른 편인 페가수스를 타고도 게임 시간으로 하루 이상 걸렸다.
"조금 더, 조금 더 높이 날아올라."
역천은 치밀한 계산으로 페가수스의 높이를 조절했다.
"됐어. 전투 모드."
페가수스는 아군이 아닌 존재가 가까이 오면 석화 저주를 비롯한 여러 공격을 퍼부을 준비가 됐다. 그러나 역천이 바란 건 페가수스가 전투에 참여하는 게 아니었다. 페가수스가 전투 모드가 되면서 탑승한 역천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맛난 거야. 어서 먹어."
페가수스에게 냉기 저항을 올려주는 화염의 열매를 먹인 후 역천을 마법을 사용했다.
"엄동설한."
얼음 왕관이 품은 스킬. 여러 패시브와 아이템 덕분에 스킬 위력, 지속 시간, 범위 등이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만리동토."
얼어붙은 넓은 땅. 레전드 아이템 얼어붙은 심장에 내장된 스킬이었다. 얼음 마법답게 범위가 넓었다.
"빙하시대."
엄동설한은 공기 온도를 내리고 만리동토는 땅을 얼렸다. 물약으로 마나를 꽉 채운 후 빙하시대를 사용했다. 사냥과 채집에 많이 의존하는 우르크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대륙 중부의 풍요로운 숲 서부가 서서히 얼음 숲이 되었다.
땅이 얼어붙으며 나무와 풀 뿌리들이 가닥가닥 끊어졌다. 수분이 많은 나무는 많은 대로, 적은 나무는 적은 대로. 기온이 내려가며 나무들이 딱딱 비명을 질렀다. 수분이 많은 나무는 좀 더 오래 버텼지만, 수분이 많은 덕에 더 심하게 갈라 터졌다.
새싹이 스러지고 꽃이 시들었다. 열매들도 극심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눈도 안 내리고 갑자기 냉기가 침습했기에 숲은 흰색이 아닌 회색으로 변했다.
'고도를 조금 더 높여도 되겠다. 스킬 범위나 위력이 내 계산보다 훨씬 강하다.'
역천의 친화력은 10으로 표시되었지만, 실질적으론 11에 가깝다. 하지만 10과 11의 경계는 유저 직업에 따라 다르기에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귀찮았던 유니콘 개발팀은 10 이상 스탯은 전부 10으로 표기했다. 그래서 역천이 계산에 틀릴 수밖에 없었다.
[상무님, 유니콘이 긴급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약 보름 전부터 다양한 루트로 식량을 사재기했다. 서부와 북부가 개발되면서 광석 가격이 상승하는 걸 미리 확인했기에, 우르크의 식량난이 대륙 전체의 식량 가격에 영향을 끼칠 거로 추측했다.
"가미카제에게 들키진 않았겠지?"
[걱정 마십시오. 이건 절대 안 들킵니다.]
"좋아. 가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데이터 쌓고, 적당한 시기에 모아둔 걸 풀어.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히 벌면 돼. 욕심부리는 건 데이터가 충분히 쌓인 다음에 하도록. 성과에 눈이 멀어서 일 그르치는 멍청이는 없다고 믿는다."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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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연소탄 가격이 크게 올랐어."
"왜?"
"갑자기 추워졌대."
"벌써 반년인가?"
"뭔 소리야?"
"아냐. 갑자기 말이 헛나갔어."
'이상하다. 분명히 트롤왕을 상대로 빙하시대 사용한 지 반년이 안 되었는데. 아이템 스킬도 쿨타임 줄일 방법이 있는가?'
유저가 점령한 도시 및 마을은 길드 상인 유저들이 연소탄을 직접 판매했고, 남은 물량은 세라프에게 판매했다. 세라프와 거래하는 건 숙련도가 가장 높은 상인 유저가 도맡아 했는데, 갑자기 치솟은 가격에 길드장인 진돗개에게 보고를 올렸다.
'역천 덕분에 돈더미에 앉게 생겼는데, 한우 세트에 감사 문자까지 보내야 하나?'
역천이 아무리 음식 사재기한다고 해도 양이 제한되었다. 반면 서브 직업이 생기면서 오아시스에 머무르던 유저는 꽤 높은 비율로 광부를 선택했다. 탄광 매장량은 아직 모르지만, 일일 생산량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전략 물자로 취급해 외교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폭리를 취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가격이 상승해서 이윤을 크게 남기게 생겼다.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해. 1억에 싸게 넘긴 보답을 이제야 받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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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야마토 길드에서 도와달라고 요청이 왔어."
"초인동맹은? 돕겠대?"
"돈 주면 돕겠다는데? 돈이 진짜 궁한가 봐."
"덩치가 커서 그래. 팔다리 하나 정도 자르면 풍족할 수도 있는데, 욕심이 큰 자들이라서 지금 덩치를 유지하려는 거지. 그저 유지만 하는 게 아니라 키우려 애쓰기도 하고."
"우리 도와 말아?"
"네가 좀 나서 봐."
"왜?"
"난 우르크랑 아직 못 싸우잖아. 그리고 난 왕이야. 내가 나서면 국가 행위가 된다고. 네가 즐기자 길드장으로서 동맹 길드들을 이끌고 재밌는 이벤트 한 번 하는 거지."
한가하게 대화하는 둘과 달리, 왕궁 NPC들은 무척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전에 코쿤의 전함에서 털었던 사치품과 에르제베트의 성에서 쓸어온 물건들을 배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정신 없는 현장을 다미안이 실수 하나 없게 지휘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에르베레트의 심장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제게 주시겠습니까?"
"이유는?"
"수십 년을 사령술사로 살았습니다. 제가 피의 주술사가 되면 위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르제베트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찾아왔을 때 자기 심장을 품은 저부터 찾을 테니, 제가 고양이 목의 방울이 되겠습니다."
종속자에 감염되고 나서도 자력으로 정신 차린 사람이었다. 게임 설정이긴 하지만, 플롯도 없이 대충 쓴 소설이 아니었다. 인간보다 사고 능력이 수천수만 배로 추정하는 AI가 만든 설정이었다. 경험 부족으로 작은 설정 충돌이나 결함이 가끔 보이지만, 이 방대한 설정에 아무 흠도 없다는 게 훨씬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니 피의 주술사 직업을 얻은 다미안이 정신이 회까닥해서 민폐를 끼칠 확률보단, 지금보다 훨씬 유용한 NPC가 된다는 분석이 합리적. 더구나 다미안의 딸이 철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 재상이 이 귀찮은 물건을 처분해주겠다면 나야 고맙지."
네크로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말라비틀어진 심장을 건네자 다미안이 감격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의도치 않게 엿들었는데, 야마토 국을 도우러 가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거기에 가서 솜씨를 보여도 괜찮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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